8世-원(瑗) *도리옥 원-경질공(景質公)
원(瑗)할아버님은 호(號)가 서암(瑞巖)이시다. 1332년 즉 고려28대 충숙왕 복위(復位)원년 임신생(壬申生)이시다.
1353년 공민왕2년 문과에 등과하셔서 한원(翰苑)에 보직(補職)되셨다.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오르셨는 바 당시 고려는 명(明)나라의 끈질긴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왜구(倭寇)의 준동(蠢動)등등 주변국의 극성(極盛)으로 국정이 불안정한 난국에 조정의 고위요직을 맡아 국난극복에 진충보국하셨다. 이때 왕이 공은 가히 이 나라의 충신(忠臣)이오 라고 공로를 높이 찬양 치사했다고 한다.
1390년 공민왕2년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함이 옳다고 상소를 올린일이 있는데 그 상소문의 첫구절을 보면 “위국지본(爲國之本)은 재호득인심(在乎得人心)하고 득인지요(得人之要)는 재호찰사정(在乎察事情)이니 차왕정지소 당선야(此王政之所當先也)라” [以下略] 이렇게 시작해서 우선 국정쇄신(國政刷新)과 위기국난 타개(危機國難 打開)가 당면(當面)한 구국과제(救國課題)인즉 이 이시점에서 천도는 상책이 아님을 강조 설파하였던 것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조(李朝)가 개국되자 포은당(圃隱黨)관계로 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이 일시 유배(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할아버님께 누차 고관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의지를 굳히시고 모든 공직을 사양하셨는 바 한성천도(漢城遷都)후에 왕의 특명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명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는데 끝내 사양(辭讓)하시고 취임(就任)을 아니하셨다.
말년에는 서원 농서(瑞原 農墅)에서 시문(詩文)을 즐기시며 조용히 여생을 지내셨다.
1411년 신묘 11월13일 향수(享壽) 80세에 세상을 떠나시니 경질(景質)공 이란 시호를 받었다.
묘는 문성공조 남록 유좌(酉坐)지원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하고 개성 표절사(表節祠)에 추향(追享)하였다.
부인은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시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신 남휘주(南輝珠)공의 따님이시다. 묘는 공조와 합폄이시다.
후부인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이시고 선친이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공이시다. 묘는 공조 우록 신좌이시다.
슬하에 6남(종약, 종예, 종의, 종염, 종신, 종검) 5녀를 두셨는데 그 중 장남인 종약(從約)은 전실소생이고 차자 5명은 후실소생인 바 공주문중은 5남 되시는 종신(從信) 즉 참판공의 직계후손으로서 다음 9세에서 분파된 것이다
.
세향은 매년 음10월1일인 바 망향제로 올린다.
경질공 안원(安瑗)
정당문학 원숭(元崇)의 아들로서 1374년(공민왕 23)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몸소 찾아가 간청하여 벼슬에 나아가니,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 大學衍義》·《통감집람 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뒤 1404년 경상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개성유후를 역임하고 병사하였다.
위인이 근면성실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
전 개성 유후 “안원”의 졸기(조선왕조실록 편)
전 개성 유후 “안원”의 졸기
◆ 조선왕조실록인 태종실록(태종 22권, 11년(1411 신묘 / 명 영락(永樂) 9년) 11월 13일)에 기록되어진 순흥안씨 휘(諱) 자미(子美)시조로부터 8세이신 “휘 원”선조에 대한 내용이다.
시호(諡號)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전 개성유후(開城留後) 안원(安瑗)이 졸(卒)하였다.
안원은 순흥(順興) 사람이고 예전 이름은 정(定)인데, 정당 문학(政堂文學) 안원숭(安元崇)의 손자였다.
홍무(洪武) 갑인(甲寅)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어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사람 됨이 온화하고 누그러지고 부지런하고 근신하고 용의(容儀)가 장엄하고 진중하여, 비록 창졸(倉卒)한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질언(疾言) 거색(遽色)이 없었다. 병이 있으매, 자부(子婦)가 기도하기를 청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천명이 있다.’ 하였다. 죽으니, 나이 66세였다. 조회를 3일 동안을 정지하고, 사제(賜祭)하고, 부의로 종이 1백 50권, 촉(燭) 10정(丁)을 주고, 시호(諡號)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아들은 6인인데, 안종약(安從約)·안종례(安從禮)·안종의(安從義)·안종렴(安從廉)·안종신(安從信)·안종검(安從儉)이다.
--------------------------------------------------------------------------------
○前開城留後安瑗卒。 瑗, 順興人, 古名定, 政堂文學元崇之孫。 洪武甲寅及第, 歷官至司憲府大司憲。 爲人和緩勤謹, 容儀莊重, 雖當倉卒, 未嘗疾言遽色。 及有疾, 子婦請祈禱, 則止之曰: “有命。” 卒年六十六, 輟朝三日, 賜祭致賻紙百五十卷、燭十丁, 贈諡景質。 子六: 從約、從禮、從義、從廉、從信、從儉。
안원(安瑗)
성명(姓名)
|
안원(安瑗) |
본관(本貫)
|
순흥(順興) |
시대(時代)
|
|
자(字)
|
|
호(號)
|
서암(瑞巖) |
이력(履歷)
|
안원(安瑗) 순흥인
8世 안원(安瑗) *도리옥 원
호(號)가 서암(瑞巖)이시다. 1332년 즉 고려(高麗) 28대 충숙왕 복위(復位) 원년(元年) 임신생(壬申生)이시다. 1353년 공민왕(恭愍王) 2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한원(翰苑)에 보직(補職)되셨다. 그후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하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오르셨는 바 당시 고려는 명(明)나라의 끈질긴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왜구(倭寇)의 준동(蠢動)등등 주변국의 극성(極盛)으로 국정(國政)이 불안정한 난국에 조정의 고위요직을 맡아 국난극복(國難克服)에 진충보국하셨다. 이때 왕(王)이 공은 가히 이 나라의 충신(忠臣)이오 라고 공로(功勞)를 높이 찬양 치사했다고 한다. 1390년 공민왕2년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함이 옳다고 상소(上疏)를 올린일이 있는데 그 상소문(上疏文)의 첫구절을 보면 “위국지본(爲國之本)은 재호득인심(在乎得人心)하고 득인지요(得人之要)는 재호찰사정(在乎察事情)이니 차왕정지소 당선야(此王政之所當先也)라” [以下略] 이렇게 시작해서 우선 국정쇄신(國政刷新)과 위기국난 타개(危機國難 打開)가 당면(當面)한 구국과제(救國課題)인즉 이 이시점에서 천도는 상책이 아님을 강조 설파하였던 것이다.
1392년 고려(高麗)가 망하고 이조(李朝)가 개국(開國)되자 포은당(圃隱黨)관게로 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이 일시 유배(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고관(高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의지를 굳히시고 모든 공직을 사양(辭讓)하셨는 바 한성천도(漢城遷都)후에 왕의 특명(特命)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명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는데 끝내 사양(辭讓)하시고 취임(就任)을 아니하셨다.
말년(末年)에는 서원(瑞原) 농서(農墅)에서 시문(詩文)을 즐기시며 조용히 여생(餘生)을 지내셨다. 1411년 신묘 11월13일 향수(享壽) 80세에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경질(景質)공 이란 시호(諡號)를 받었다.
세향은 매년 음10월1일인 바 망향제로 올린다.
경질공 (景質公 ) (1파) 8 世
봉익대부 형조전서(奉翊大夫 刑曹典書)
1332년(고려 충혜왕 2년 ,임신년)에 출생하였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 大提學) 문혜공(文惠公) 휘 원숭(元崇)의 맏아들이다. 고려말의 유학자 문성공 휘 향(珦)의 5世孫이며, 문숙공 휘 목(牧)의 손자이다. 호(號)는 서암(瑞巖)이며 고려말 ~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353년(공민왕 2 계사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 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포은 정몽주의 도당이라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한뒤 왕이 직접 공께 찾아와서 간청함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大學衍義), 통감집람(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 뒤 1404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 개성유후를 역임했다. 시호를 경질(景質)이라 하였으니 의(義)를 따라서 일을 함에 경(景)이라 하고, 명실(名實)이 어긋나지 않음에 질(質)이라 한다.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거처하다가 1411년(태종 11)에 타계하셨다. 묘소는 문성공의 묘소 남쪽 기슭 유좌(酉坐)이다. 1822년(순조 임오년)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배향되었다. 개성(開城)의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配位는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며, 전리판서 남휘주의 딸이다. 맏아들 판서공 (이조판서 諱 從約)만을 낳고 타계 하셨다. 後配는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로 영평군(鈴平君)에 봉군된 윤척의 딸이다. 윤씨께서는 장자인 판서공을 제외한 5남5녀를 낳으셨다. 따라서 경질공께서는 11남매를 두셨다. |
묘(墓)
|
문성공조 남록 유좌(酉坐)지원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고 개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추향(追享)하였다. |
부(父)
|
안원숭(安元崇)
7世 안원숭(安元崇) *으뜸 원, 높을 숭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시조(始祖)이하 4세 문성공(文成公=諱 珦)할아버지 23세까지 약100년 간 관향(貫鄕)인 순흥(順興)에서 세거(世居)하셨다.
1265년 문성공(文成公)할아버지 23세 되시던 해 개성(開城=옛 松京 즉 당시 高麗 首都)으로 이사(移徙)하셔서 8세 경질 공(景質 公=諱 瑗) 까지 약150년 간 대대(代代)로 조정(朝廷)에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역임하시며 세거(世居)하셨다. |
모(母)
|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이시고 당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신 원선지(元善之)공의 따님이시다. |
배(配)
|
부인은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시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신 남휘주(南輝珠)공의 따님이시다. 묘는 공조와 합폄이시다. |
배(配)
|
후부인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공이시다. 묘는 공조 우록 신좌이시다. |
자(子)
|
안종약(安從約) 전실소생 |
자(子)
|
안종예(安從예) 후실소생 |
자(子)
|
안종의(安從의) 후실소생 |
자(子)
|
안종염(安從염) 후실소생 |
자(子)
|
안종신(安從信) 후실소생 참판공의 직계후손으로서 다음 9세에서 분파됨
안종신(安從信) 참판공파 공주소종
9世 안종신(安從信) *따를 종, 믿을 신
공주종중 直系인 참판공파(參判公派) 파조(派祖)이시다. 6 형제분 이신데 장형(長兄)인 판서공(判書公) 휘(諱) 종약(從約)은 종손(宗孫)으로 계승(繼承)하였고 그 아우 감찰공(監察公) 휘(諱) 종예(從禮), 첨추공(僉樞公) 휘(諱) 종의(從義), 도정공(都正公) 휘(諱) 종염(從廉), 그 다음분이 우리 파조 참판공(參判公) 휘(諱) 종신(從信)할아버님이시다.
또 할아버님의 아우 참의공(參議公) 휘(諱) 종검(從儉) 이렇세 6형제분인 바 각각 분파(分派)하셨다. 따라서 우리 공주(公州) 종중(宗中)은 참판공의 후손(後孫)임으로 차대(此代)부터는 참판공파 계통(系統)을 중심으로 기술(記述)하기로 한다. 할아버님께서는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 *현 도지사*)를 지내시고 경력소(經歷所) 경력(經歷)을 역임(歷任)하셨으며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判*현 국방차관)에 오르셨다.
배(配)부인은 증정부인(贈貞夫人) 고려(高麗) 종실(宗室) 왕씨(王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영복군(永福君) 휘(諱) 격(隔)이시고 조부(祖父)는 순안군(順安君) 휘(諱) 방(昉)이시며 증조(曾祖)가 낙낭군(樂浪君) 휘(諱) 수(琇)이시다. 슬하에 1남 진(進)과 1녀를 두셨다. |
자(子)
|
안종검(安從검) 후실소생 |
녀(女) |
5 녀(女) |
형제(兄弟)
|
제(弟) 안조동(安祖同) |
형제(兄弟)
|
제(弟) 안수(安垂) |
형제(兄弟) |
6 녀(女) |
문헌(文獻)
|
1. <서울六百年史>
19대 판한성부사 안 원(安 瑗)
태종 7년(1407) 12월 8일
2. 순흥안씨음사편(順興安氏蔭仕篇)
안원[주]전서아조루징부기시경질원숭자조동[주]문부학원제수[주]문한림조동제종약[주]문목사증리판원자
安瑗[주]典書我朝屢徵不起諡景質元崇子祖同[주]文副學瑗弟垂[주]文翰林祖同弟從約[주]文牧使贈吏判瑗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