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世-목(牧) *기를 목, (다스릴 목)-문숙공(文淑公)
목(牧)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25대 충열왕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 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신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 임오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하였다.
부인은 화평군부인(化平君夫人) 김씨 이시고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정공(文正公)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공의 따님이시다.
묘는 선고(先考) 문순공조하(文順公兆下) 자좌(子坐)지원이며 부인묘는 동원(同原)이영(異塋)이시다.
슬하(膝下)에 원숭(元崇), 원형(元衡), 원린(元璘) 등 3자와 1녀(민유(閔愉)) 여흥인(麗興人 : 대제학(大提學))를 두셨다
차자인 원형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신죽산 안씨(新竹山 安氏)로 분관(分貫)했고 또 그 다음 원린은 강진군(康津君)으로 봉군을 받았으므로 탐진 안씨(耽津*舊康津*安氏)로 분관을 하였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안목(安牧)
성명(姓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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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安牧) |
본관(本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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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順興) |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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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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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지(益之) |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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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謙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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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安牧) 순흥인
6世 안목(安牧) *기를 목, (다스릴 목)
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高麗) 25대 충열왕 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 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忠誠)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신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餘生)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純祖) 임오(壬午)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문숙공(文淑公)휘 ) 6 世 (1파)
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
1290년 (충렬왕, 경인년)에 출생한 휘목(安牧)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향(向)의 손자이고, 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檢校僉議 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자(字)는 익지(益之), 호(號)는 겸재(謙齋)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배위는 화평군부인 김씨(化平郡夫人 金氏)이며, 첨의중찬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김태현(台鉉)의 딸이다.
관직 및 업적
1315년(충숙왕)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1330년(충숙왕 원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해)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1339년(충숙왕, 기묘년)에 장령(掌令)으로서 전주(銓注)를 관장하여 공신(功臣)의 관작을 하사받았다. 그뒤 밀직제학 밀직부사를 거쳐 1348년(충목왕 4)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1352년(공민왕 1) 서연시독관(書筵侍讀官)을 지냈다.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에 이르렀다. 정계에서 은퇴한 말년에는 파주(坡州)의 교외에서 시(詩)를 벗삼아 한가로운 여생을 보냈다.
제향
360년 5월 (공민왕 경자년)에 별세하니 71歲로 장수하셨다.
조정에서는 순흥군(順興君)에 추봉하고, 문숙(文淑)이란 시호를 내렸다.
1822년(순조, 임오년)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제향되었다. |
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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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하 자좌(子坐) 지원이다. |
부(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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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기(安于器)
5世 안우기(安于器) *어조사 우, 그릇 기
할아버님 초휘(初諱)는 천(遷)이시고 자(字)가 허중(虛中)이시며 호(號)는 죽옥자(竹屋子),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선친(先親)이신 문성공의 위업(偉業)을 극계(克繼)하여 문아(文雅)로 현명(賢明)하셨다. 1265년 고려(高麗) 24대 원종 6년 을축생(乙丑生)이시다. 1282년 충열왕 8년 약관 18세의 홍안소년으로 문과(文科)에 등과하셨다. 그후 조정(朝廷)에 몸담아 국학제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사헌(大司憲),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檢校僉議), 찬성사겸판전의시사(贊成事兼判典儀寺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순평군(順平君)에 봉군(封君)되셨다. 1329년 즉 충숙왕16년 기사(己巳) 9월 12일 향수(享壽) 6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봉향되셨다. |
모(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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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철원군군부인(鐵原郡君夫人) 최씨이시고 그 선친(先親)이 당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신 최충약(崔沖若)공 이시다.
묘(墓)는 고조우록(考兆右麓) 임좌(壬坐)로 모셨다. |
모(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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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인은 이씨(李氏)이신데 생졸년(生卒年), 묘 등이 모두 실전(失傳)되었으므로 공조(公兆)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세사는 매년 10월 1일인 바 해방후는 금촌 판서 공묘역에서 망향제(望鄕祭)로 올린다. |
배(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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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화평군부인(化平君夫人) 김씨 이시고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정공(文正公)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선고(先考) 문순공조하(文順公兆下) 자좌(子坐)지원이며 부인묘는 동원(同原)이영(異塋)이시다. |
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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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숭(安元崇)
7世 안원숭(安元崇) *으뜸 원, 높을 숭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배(配)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이시고 당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신 원선지(元善之)공의 따님이시다. |
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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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형(安元衡)
차자(次子)인 원형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신죽산 안씨(新竹山 安氏)로 분관(分貫)했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
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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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린(安元璘) 강진군(康津君)으로 봉군을 받았으므로 탐진 안씨(耽津*舊康津*安氏)로 분관을 하였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
녀(女) |
민유(閔愉) 여흥인(麗興人 : 대제학(大提學) |
형제(兄弟) |
제(弟) 안신(安愼) 후실소생
차자(次子)이신 신(愼)할아버님 댁이 분파(分派)하셨는 바 이 할아버님께서 로부판관(鹵簿判官)을 지내셨으므로 판관공파(判官公派)라고 호칭한다. |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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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안목(安牧) (충숙왕조) |
동문선 제20권-칠언절구(七言絶句)
아들이 대언에 임명되므로 시를 지어 보임[示子拜代言]
안목(安牧) 여러 대 용의 목구멍이 옛날부터 많지 않았는데 / 累葉龍喉古未多 회헌(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과 죽옥이 스스로 (대언 벼슬로) 집을 전하였네 / 晦軒竹屋自傳家 내가 불우해 고생한 것이 비록 한스러우나 / 不才蹭蹬雖堪恨 천금의 자식을 낳은 것도 자랑할 만하니라 / 生得千金亦可誇
東文選卷之二十-七言絶句
示子拜代言[ 安牧] 累葉龍喉古未多。晦軒竹屋自傳家。不才蹭蹬雖堪恨。生得千金亦可誇。
아들 판서를 보내어 전주에 출진하다[送子判書出鎭全州]
안목(安牧) 곤 밖에서 걱정을 나누니 그 짐이 가볍지 않아 / 閫外分憂任不輕 우리 집에는 일찍 그 책임 맡은 두 서생이 있었다 / 吾家曾有兩書生 네가 지금 다행히 기구의 업을 이어받았으니 / 汝今幸繼箕裘業 부디 큰 공을 세워 성명에 보답하라 / 當樹元功報聖明
送子判書出鎭全州
閫外分憂任不輕。吾家曾有兩書生。汝今幸繼箕裘業。當樹元功報聖明。
용재총화 제3권 慵齋叢話卷之三
○ 파주(坡州) 서교(西郊)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못했는데, 정당(政堂) 안목( 安牧)이 처음으로 넓게 밭을 개간하고 큰 집을 짓고 살았다. 정당이 시를 잘하여 한구(句)를 짓기를, 목동의 피리 소리 긴 포서 밖에 들리고 / 牧笛一聲長浦外 고깃배의 두어 점 등불이 낙암 앞에 보이도다 / 漁燈數點洛岩前 하였다. 그 손자 원에 이르러 지극하게 창성하였는데, 안팎으로 차지한 밭이 무려 수만 경(頃)이나 되고 노비도 백여 호나 되었다. 늙은 고목 천여 그루가 10리에 그늘을 이루고 거위와 황새가 그 사이에서 울고 떠들었다. 공은 매를 팔 위에 올려놓고 누런 개를 데리고 매일 왕래함을 낙으로 삼았다. 지금도 남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사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그 자손이다. 坡州西郊。荒廢無人。安政堂牧始墾之。廣作田畝。大搆第而居之。政堂能詩。嘗占句云。牧笛一聲長浦外。漁燈數點洛巖前。至其孫瑗極盛。內外占田無慮數萬頃。奴婢百餘戶。老樹千章。成蔭十里。鵝鸛呼噪其間。公臂蒼牽黃。日往來以爲樂。至今分占餘土而居者百許人。皆其子孫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