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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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숭(安元崇) 순흥인
7世 안원숭(安元崇) *으뜸 원, 높을 숭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순성군(順城君) 문혜공(文惠公) 7世 (1파)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문혜공 휘 원숭의 初諱(처음의 이름)는 정(靖)이다. 1309년(고려 충선왕1년,기유년)에 출생하였다. 문숙공 목(牧)의 아들이고, 문순공 우기(于器)의 손자이며, 회헌 문성공 향(向)의 증손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년,신사년)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언(代言)을 역임했다. 판서(判書)로 있다가 전주(全州)로 부임했었다. 전주에 나가 있을 때에는 학교(유교)의 육성발전에 크게 진흥했다. 그 후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을 제수 받았다. 순성군(順城君)이란 봉호를 받고 얼마 후에 병으로 별세했다. 묘소는 회헌선조의 묘소아래 자좌(子坐)이다.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초하루이다. 조정에서는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1822년(임오년,순조22)에 순흥의 용연사(順興 龍淵祠)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辰韓國大夫人 原州元氏)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원선지(元善之)의 딸이다.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 바 장남은 형조전서를 지낸 경질공 원(瑗)이며, 둘째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휘 조동(祖同: 양공공파조)이고, 셋째아들은 한림지제고(翰林知製誥)를 지낸 휘 수(垂: 한림공파조)이다. 장녀는 우사간(右司간) 김사렴(金士廉)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상시(右常侍)를 지낸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전룡(奇田龍)에게 출가, 셋째딸은 창녕부원군 독곡 성석린(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에게, 다음은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추(金錘)에게 출가했고, 다섯째딸은 좌랑(佐郞) 김수(金垂)에게 출가했고, 막내딸은 판중추(判中樞) 유원지(柳元之: 좌의정 柳曼殊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
부(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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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安牧)
6世 안목(安牧) *기를 목, (다스릴 목)
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高麗) 25대 충열왕 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 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忠誠)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신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餘生)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純祖) 임오(壬午)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
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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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安瑗)
8世 안원(安瑗) *도리옥 원
호(號)가 서암(瑞巖)이시다. 1332년 즉 고려(高麗) 28대 충숙왕 복위(復位)원년 임신생(壬申生)이시다. 1353년 공민왕(恭愍王) 2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한원(翰苑)에 보직(補職)되셨다. 그후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하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오르셨는 바 당시 고려는 명(明)나라의 끈질긴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왜구(倭寇)의 준동(蠢動)등등 주변국의 극성(極盛)으로 국정(國政)이 불안정한 난국에 조정의 고위요직을 맡아 국난극복(國難克服)에 진충보국하셨다. 이때 왕(王)이 공은 가히 이 나라의 충신(忠臣)이오 라고 공로(功勞)를 높이 찬양 치사했다고 한다. 1390년 공민왕2년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함이 옳다고 상소(上疏)를 올린일이 있는데 그 상소문(上疏文)의 첫구절을 보면 “위국지본(爲國之本)은 재호득인심(在乎得人心)하고 득인지요(得人之要)는 재호찰사정(在乎察事情)이니 차왕정지소 당선야(此王政之所當先也)라” [以下略] 이렇게 시작해서 우선 국정쇄신(國政刷新)과 위기국난 타개(危機國難 打開)가 당면(當面)한 구국과제(救國課題)인즉 이 이시점에서 천도는 상책이 아님을 강조 설파하였던 것이다.
1392년 고려(高麗)가 망하고 이조(李朝)가 개국(開國)되자 포은당(圃隱黨)관게로 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이 일시 유배(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고관(高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의지를 굳히시고 모든 공직을 사양(辭讓)하셨는 바 한성천도(漢城遷都)후에 왕의 특명(特命)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명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는데 끝내 사양(辭讓)하시고 취임(就任)을 아니하셨다.
말년(末年)에는 서원 농서(瑞原 農墅)에서 시문(詩文)을 즐기시며 조용히 여생(餘生)을 지내셨다. 1411년 신묘 11월13일 향수(享壽) 80세에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경질(景質)공 이란 시호(諡號)를 받었다.
배(配) 부인은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시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신 남휘주(南輝珠)공의 따님이시다. 묘는 공조와 합폄이시다.
배(配) 후부인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이시고 선친(先親)이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공이시다. 묘는 공조 우록 신좌이시다. |
형제(兄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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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弟) 안원형(安元衡)
차자(次子)인 원형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신죽산 안씨(新竹山 安氏)로 분관(分貫)했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
형제(兄弟) |
제(弟) 안원린(安元璘) 강진군(康津君)으로 봉군을 받았으므로 탐진 안씨(耽津*舊康津*安氏)로 분관을 하였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