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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안경(安璟)-贊成公(찬성공)

무량청정1 2014. 11. 25. 11:04

10世-안경(安璟)-贊成公(찬성공)

  • 글쓴이 : 교장 안광신 편집

10世-璟경 (字)기지(器之)-贊成公(찬성공)

 

璟경[자] (字)는 기지(器之)이다
고려 우왕무진년一三八八년에 출생하고 벼슬은 가선대부 검교한성부윤(嘉善大夫 檢校漢城府尹)에이르다

조선 세조정죽년一四五七년에 별세하니 향년은七○세다
처음에 다섯아들이 과거에오르므로써 가정대부 호조참판(嘉靖大夫 戶曹叅判)에증직되고

뒤에 손자인 당(瑭)이 귀하게됨으로써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춘추관성균관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이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崇政大夫 議政府左賛成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貳師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에높혀추증되다
[배] 정경부인(貞敬夫人)백천조(白川趙씨로 부친은 부흥군(復興君)숙위공(肅魏公)반(胖)이고

조부는 보승호군(保勝護軍)세경(世卿)이며 증조는 이부상서(吏部尙書)은천군(銀川君)하(何)이다
외조는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계림(雞林)이양오(李養吾)이다
[묘] 백천(白川)의발산방호산(鉢山坊虎山)안쪽 용수동(龍鬚洞)해좌로합폄하고 묘비가있다
세사는 음력一○월一五일이다
대사헌(大司憲)윤헌(尹瀗)이 신도비명을찬한바 총록에실리다

 

 

(고전번역서)

 

 

 (조선왕조실록) 世宗實錄

世宗 44卷, 11年(1429 己酉 / 명 선덕(宣德) 4年) 6月 27日(壬寅) 2번째기사
고산 현감 안경이 사조하다

고산 현감(高山縣監) 안경(安璟)이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듣건대 금년에는 벼가 조금 무성하다고 하나, 근일에 비가 오지 않으니 벼농사를 해칠까 염려스럽다. 그대는 작은 가뭄이라 소홀히 하지 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힘써 다하라.”
하였다.

高山縣監安璟辭, 上引見曰: “聞今年禾穀稍盛, 近日不雨, 恐傷禾稼。 爾勿謂小旱, 務盡人事。”

 

 

(조선왕조실록)世祖實錄

世祖 22卷, 6年(1460 庚辰 / 명 천순(天順) 4年) 閏11月 29日(辛未) 2번째기사
검참판 안경의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니 그 어미에게 상을 내리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검참판(檢參判) 안경(安璟)의 아들 안관후(安寬厚)·안중후(安重厚)·안돈후(安敦厚)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니, 청컨대 예(例)에 의하여 어미에게 쌀을 내려 주고, 아비에게 치제(致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檢參判安璟寬厚仁厚重厚謹厚敦厚五子登科, 請依例賜母米, 致祭於父。” 從之。

 

 

 

10世-안경(安璟)-贊成公(찬성공)

10世-璟경 (字)기지(器之)-贊成公(찬성공)

 

璟경[자] (字)는 기지(器之)이다
고려 우왕무진년一三八八년에 출생하고 벼슬은 가선대부 검교한성부윤(嘉善大夫 檢校漢城府尹)에이르다

조선 세조정죽년一四五七년에 별세하니 향년은七○세다
처음에 다섯아들이 과거에오르므로써 가정대부 호조참판(嘉靖大夫 戶曹叅判)에증직되고

뒤에 손자인 당(瑭)이 귀하게됨으로써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춘추관성균관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이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崇政大夫 議政府左賛成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貳師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에높혀추증되다
[배] 정경부인(貞敬夫人)백천조(白川趙씨로 부친은 부흥군(復興君)숙위공(肅魏公)반(胖)이고

조부는 보승호군(保勝護軍)세경(世卿)이며 증조는 이부상서(吏部尙書)은천군(銀川君)하(何)이다
외조는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계림(雞林)이양오(李養吾)이다
[묘] 백천(白川)의발산방호산(鉢山坊虎山)안쪽 용수동(龍鬚洞)해좌로합폄하고 묘비가있다
세사는 음력一○월一五일이다
대사헌(大司憲)윤헌(尹瀗)이 신도비명을찬한바 총록에실리다

 

 

(고전번역서)

 

 

 (조선왕조실록) 世宗實錄

世宗 44卷, 11年(1429 己酉 / 명 선덕(宣德) 4年) 6月 27日(壬寅) 2번째기사
고산 현감 안경이 사조하다

고산 현감(高山縣監) 안경(安璟)이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듣건대 금년에는 벼가 조금 무성하다고 하나, 근일에 비가 오지 않으니 벼농사를 해칠까 염려스럽다. 그대는 작은 가뭄이라 소홀히 하지 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힘써 다하라.”
하였다.

高山縣監安璟辭, 上引見曰: “聞今年禾穀稍盛, 近日不雨, 恐傷禾稼。 爾勿謂小旱, 務盡人事。”

 

 

(조선왕조실록)世祖實錄

世祖 22卷, 6年(1460 庚辰 / 명 천순(天順) 4年) 閏11月 29日(辛未) 2번째기사
검참판 안경의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니 그 어미에게 상을 내리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검참판(檢參判) 안경(安璟)의 아들 안관후(安寬厚)·안중후(安重厚)·안돈후(安敦厚)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니, 청컨대 예(例)에 의하여 어미에게 쌀을 내려 주고, 아비에게 치제(致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 “檢參判安璟寬厚仁厚重厚謹厚敦厚五子登科, 請依例賜母米, 致祭於父。” 從之。

 

 

1
조선왕조실록
세종 11년 기유(1429)
6월
27일(임인)
  고산 현감(高山縣監) 안경(安璟)이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듣건대 금년에는 벼가 조금 무성
2
조선왕조실록
세조 6년 경진(1460)
윤 11월
29일(신미)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검참판(檢參判) 안경(安璟)의 아들 안관후(安寬厚)·안중후(安重厚)·안돈후(安
3
조선왕조실록
중종 21년 병술(1526)
3월
19일(임인)
  ...謹思)의 선래 통사(先來通事) 안경(安璟)이 서장(書狀)을 가지고 왔다. 그 대략에,“신이 북경(北京)에...
 
  
 

 

음력10월15일 전국으로 흩어져 있는 순흥안씨 찬성공파 자손들이 북녁땅이 보이는 강화도에 모여 시제를 지냅니다.

판서공 휘 종약선조의 네 아드님 중 둘째 아드님인 찬성공 휘 경 선조와 그의 다섯 아드님의 묘소는

황해도 팔대 명산인 배천군 발산방 호산에 묘소가 있는데 백천(白川)의발산방호산(鉢山坊虎山)안쪽용수동(龍鬚洞)해좌로합폄하고묘비가있다. 북한이라 왕래가 안 되어 강화도에 단소를 설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세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찬성공의 다섯 아드님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조에서도 아들 다섯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없어 문중을 빛내고 있는 선조이십니다.

찬성공 할아버지는 시조 자미의 9대손이고 향 문성공 안 자의 6대손입니다.

 

 

1. 왼쪽은 찬성공할아버지, 오른쪽은 다섯분의 아드님의 망배단입니다.

 

 

2. 찬성공 할아버지의 망배단


 

3. 찬성공할아버지의 다섯아드님의 망배단


 

4. 망배단 건립기념비


 

5. 망배단 언덕너머에서 보이는 곳은 한강과 북녁입니다.

그곳에 찬성공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을 겁니다.


 


6. 시제 전경

 

 

7.시제 의례


 

8. 다섯 아드님의 시제상


 

 

9. 시제를 마친 후 맛있는 점심



가시리에 사시는 모든 안씨성을 가진 분들은 찬성공할아버지의 자손들입니다.

가보지는 못하여도 우리 집안에 이런곳이 있다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는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조상을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경(安璟)의 아들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관후(安寬厚)ㆍ안돈후(安敦厚)ㆍ안인후(安仁厚) 5형제 다섯 아들

安重厚, 安謹厚, 安寬厚, 安敦厚, 仁厚

  

                       자손(아들)

安重厚--->

安謹厚--->안림(安琳),안규(安珪)

安寬厚--->

敦厚--->안장(安璋),안총(安璁),안인(安璘),안당(安瑭)

仁厚--->

 

용재총화(慵齋叢話)-

우리 나라에서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이는 많았으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이는 적었다.

그러므로 부모가 죽은 사람은 뒤에 증직(贈職)을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해에 쌀 20석을 하사하였다.

조(前朝)에 있어서는 홍우수(洪禹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성장(李誠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 5형제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관후(安寬厚)ㆍ안돈후(安敦厚)ㆍ안인후(安仁厚)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이 항상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형제가 세 사람뿐이어서 다섯에 미치지 못하나, 내가 초시(初試)ㆍ중시(重試)ㆍ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화중(和仲:성간)이 또한 급제하고, 너도 초시ㆍ발영시ㆍ중시에 급제하였으니, 또한 다섯을 넘는다. 수로 견주어보면 우리 부모가 마땅히 그 영화를 누릴 일인데 국법에 있지 않은 것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견한잡록1(遣閑雜錄1)-심수경(沈守慶)

安重厚謹厚敦厚文科(안중후근후돈후문과) :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寬厚仁厚武科(관후인후무과) :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安重厚(안중후)1

▲조선조

안중후(安重厚) (연안부사(延安府使))

 <국조 문과 방목>

안중후(安重厚)   

       세종(世宗)29년(1447년), 친시(親試) 정과3(丁科3)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순흥(順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부(父)   안경(安璟)

  조부(祖父)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조반(趙반)

  처부(妻父)    

  제(弟)   안관후(安寬厚)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38(무오)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사용(司勇)

  품계(品階)    

  관직(官職)   지평&(持平)

 

 《문종실록》의 말미(末尾)에 수찬(修纂)에 관여한 관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영관사(領館事): 정인지(鄭麟趾) 지관사(知館事): 정창손(鄭昌孫), 이계전(李季甸), 김조(金조) 동지관사(同知館事): 최항(崔恒), 하위지(河緯地) 편수관(編修官) 어효첨(魚孝瞻), 송처관(宋處寬) 기주관(記注官): 권지(權枝), 이석형(李石亨), 김덕례(金德禮), 이비, 안지귀(安知歸), 이예(李芮), 유성원(柳誠源), 양성지(梁誠之), 김지경(金之慶), 장계증(張繼曾), 강노(姜老) 이승소(李承召), 조근(趙瑾), 홍응(洪應), 성희(成熺), 김명중(金命中), 이극감(李克堪), 이함장, 서강(徐岡), 김필, 김덕원(金德源) 기사관(記事官): 이계전(李季專), 이익(李翊), 강미수(姜眉壽), 유자문(柳子文), 이유의(李由義), 안중후(安重厚), 박찬조(朴纘祖), 윤자영(尹子濚), 이제림(李悌林), 최한보(崔漢輔), 민정(閔貞), 권이경(權以經), 이문환(李文煥), 유지, 김겸광(金謙光), 안신손(安信孫), 김이용(金利用), 김영견(金永堅), 윤민(尹)
세조 2권, 1년( 1455 을해 / 명 경태 (景泰) 6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기사

의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행 상호군 신자수(申自守)·부교리(副校理) 홍약치(洪若治)·교수관(敎授官) 유자문(柳子文)·도사(都事) 이유의(李由義)·지평(持平) 안중후(安重厚)·감찰(監察) 전효우(全孝宇)·좌랑(佐郞) 박찬조(朴纘祖)·정랑(正郞) 한서봉(韓瑞鳳)·부사직(副司直) 김상진(金尙珍)·주부(注簿) 윤자영(尹子濚)·봉례(奉禮) 이제림(李悌林)·감찰 최한보(崔漢輔), 봉교(奉敎) 권이경(權以經)·김겸광(金謙光), 대교(待敎) 민정(閔貞), 검열(檢閱) 안신손(安信孫)·김이용(金利用)

 

 

謹厚(안근후)2

▲조선조

안근후(安謹厚)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국조 문과 방목>

안근후(安謹厚)   

       세조(世祖)6년(1460년), 평양별시(平壤別試) 3(3)  

>>> 인적사항  

   본관(本貫)   순흥(順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안경(安璟)

  생부(生父)    

  조부(祖父)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조반(趙<반0x61C8>)

  처부(妻父)    

  자(子)   안림(安琳)

  형(兄)   안중후(安重厚)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전적&(典籍)

배(配)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이십칠(二十七)

● 규행(閨行)

원씨(元氏) 본(本) 원주(原州)

  순흥(順興) 안근후(安瑾厚)의 처(妻) 명정(命旌)

자(子)

<국조 문과 방목>

안림(安琳)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3(乙科3)  

>>> 인적사항    

  본관(本貫)   순흥(順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안근후(安謹厚)

  생부(生父)    

  조부(祖父)   안경(安璟)

  증조부(曾祖父)   안종약(安從約)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승사랑(承仕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예조/좌랑&(禮曹/佐郞&)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을 통한 문회서원

  열녀】 본조 원씨(元氏) 송화 현감 안근후(安謹厚)의 아내다. 근후가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이 3년을 하고, 그대로 무덤 곁에서 살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효자】 안규(安珪) 열녀 원씨(元氏)의 아들이다. 일찍이 집에 불이 났는데, 원씨가 남편의 신주를 안고, 미처 나오지 못하고 엎어지니, 안규가 불 속으로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신주를 안고 나왔는데 머리와 얼굴이 모두 데어 문드러졌다.

  - 신동국여지승람 43권 황해도 백천군 문회서원 역사 -
 

 

安寬厚(안관우)3

1417 ~ ?

▲조선조

안관후(安寬厚)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

<국조 문과 방목>

안관후(安寬厚)   

세종(世宗)29년(1447년), 식년시(式年試) 정과21(丁科2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17년, 정유

  자(字)   율보(栗甫)     

  본관(本貫)   순흥(順興)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안경(安璟)     

  조부(祖父)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조반(趙<반0x61C8>)

  처부(妻父)   김숙정(金淑貞)

  형(兄)   안근후(安謹厚)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41(신유)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官職)   감사(監司), 직학(直學)

 

    율보(栗甫)
 생년   정유(丁酉)1417
 합격연령   31

    전력 : 진사(進士)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 감사(監司)
    관직 : 직학(直學)
    타과 : 세종(世宗) 23년(1441) 신유(辛酉) 진사시(進士試)

  

成宗 八年(丁酉 : 1477年)

윤 2월 23일(신유)

강원도(江原道)의 순찰사(巡察使) 이극증(李克增)과 관찰사(觀察使) 안관후(安寬厚)가 치계(馳啓)하기를, “신등이 함께 삼척부(三陟府)의 토성(土城) 안을 살펴보았더니, 샘이 없어서 관방(關防)으로 적합하지 않으나, 성(城) 동문(東門) 밖의 낮은 땅에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으니, 성을 물려서 쌓을 만합니다.” 하였는데, 병조에서 이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청컨대, 가을에 그 고을 백성둘로 하여금 접차 수축(修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0일(갑인)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양경(金良■)과 경기 겸병마절도사(京畿兼兵馬節度使) 박중선(朴仲善)․충청도 병마절도사 안인후(安仁厚)․황해도 겸병마절도사 정괄(鄭眸)․전라도 병마절도사 이숙기(李淑琦)․강원도 겸병마절도사 안관후(安寬厚)․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신주(辛鑄)․우도 병마절도사 권경(權黛)에게 전교하기를,

“열병(閱兵)과 사냥(敆狩)은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아울로 폐할 수 없다. 오는 10월 초3일에 교외(郊外)에서 친열(親閱)하고, 이어서 광주(廣州)에서 사냥하려고 하니, 이제 보내는 발병부(發兵符)를 합(合)해서 증험해 보고, 도내(道內)에서 유방(留防;머물로서 방수(防戍)함)하고 있는 군사 이외에 번휴(番休)하고 있는 모든 고을의 군사는 모두 조발(調發)해서, 왕복[往返]을 따지지 말고 12일간의 양미(糧米)를 싸 가지고 오는 9월 28일에 정금원평(定金院坪)에서 모여 기다리게 하라. 이달 8월에 교대(敆番)한 군사(軍士)는 내려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았고, 오는 11월에 당번(當番)할 충순위(忠順衛)의 정병(正兵) 등은 번상(番上)할 시기가 박두해서,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고, 재해(災害)을 입은 여러 고을의 군사는 모두 징집해 모으지 말라.” 하였다.

8월 26일(경신)

강원도 관찰사 안관후(安寬厚)에게 유시하기를,

“군려(軍旅)의 동정(動靜)은 오로지 병부(兵符)에 달려 있어서,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아니하다. 비단 합하여 증험할 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고받을 때에도 역시 신중하게 해야 마땅하다. 지금 도내(道內)의 병부를 주고받는 데에 잘못하여서 좌우(左右)가 바뀌는데에 이르렀으니, 병부(兵符)를 설치한 본의(本意)가 아니다. 장차 추국(推■)을 행하여서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강무(講武)하는 날이 박두하여서 군사를 징집하는 것을 늦출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우부(右符)를 선전관(宣傳官) 이영분(李永■)에게 주어서 내려 보내니, 경은 그것을 받아 합하여 징험해본 뒤에, 전에 있었던 좌부(左符)를 즉시 속히 올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成宗 九年(戊戌 : 1478年)

5월 28일(기축)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강원도 영동(嶺東대관령 동쪽)의 군현(郡縣)에 읍(邑城)을 쌓지 아니한 곳이 많고, 울진(蔚珍)․평해(平海) 같은 데에는 비록 있기는 하나 원장(垣墻)과 다름이 없으니, 한 해 동안에 비록 다 쌓지는 못할지라도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명년에 한 성을 쌓으면 거의 가(可)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려움이 없지 않겠는가?” 하였다. 안관후가 아뢰기를,

“백성을 반드시 농한기에 부리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兵曹)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안관후가 또 아뢰기를,

“낙산사(洛山寺)는 예전 길은 평탄한데, 새 길은 험하므로, 다니는 사람이 매우 괴로와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옛 길은 절에서 멀고, 절 앞에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여서 다니는 사람이 절을 볼 수가 없으니, 청컨대, 옛 길을 회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길이 절에서 멀다면, 다니는 사람이 그 절을 볼지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감사(監司)로 하여금 친히

 

살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안관후가 또 아뢰기를,

“낙산사 앞 20여 리(里)는 절의 중들이 남이 고기잡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에 가서 취하니,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지사(知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세조조(世祖朝) 때에 중 학열(學悅)이 금하기를 청한 것입니다.”'하고, 안관후가 아뢰기를,

“한 절을 위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이(利)를 보지 못하게 함이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승지 박숙진(朴叔■)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감사(監司)로 하여금 금지하는지의 여부를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3일(임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신이 전날 낙산사(洛山寺)에 구로(舊路)를 열어 금표(禁標)를 치우도록 청하였었는데, 지금까지 하명(下命)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낙산사의 금표는 1백보(步)에 불과하고 해수(海水)는 지극히 넓은데, 하필 1백보 안에서 고기를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구로(舊路)는 절에서 거리가 멀지 아니한데, 대개 양양(襄陽)을 왕래하는 사자(使者)들이 기생을 탐하여 오래 머물면서 간혹 횃불을 들고 밤길을 다니다가 불을 내어 연소(延燒)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만일 구로를 다시 연다면 내가 기생을 없애버리겠다.”

라고 하였다. 안관후가 말하기를,

“기생이야 있고 없고 관계가 없으나, 양양에 기생이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데, 이제 만일 기생을 없애 버린다면 후세에 반드시 절을 위해서 없애었다고 할 것입니다. 옛날 제왕도 택량(澤梁;못에 설치한 어량(魚梁))

은 금하지 아니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하였는데, 이제 만일 금하신다면 후세에 반드시 `절을 위해서 금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신자(臣子)로서 선왕(先王)때의 일을 다 고치자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안관후가 말하기를, ”만일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고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고, 좌참찬(左參贊)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선왕 때의 일로 헌장(憲章)에 관계된는 것은 경솔히 고칠 수 없겠지만, 이와  같은 일은 마땅히 빨리 고쳐야 합니다.” 하였다. 안관후가 말하기를, “만일 농사가 흉년이 되어서 백성들이 주리게 되면 반드시 해물(海物)을 취하여 먹어야 할 것인데,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굳이 가까운 데를 버리고 먼 데에서 구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그 금표(禁標)의 안에 민가가 얼마나 되기에 꼭 해물(海物)에 의뢰해서 살려면 창해(蒼海)가 굉장히 넓은데 어찌 반드시 금하는 곳에서 해야 되겠는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손순효(孫舜孝)가 아뢰기를,

“다른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위해서 금표를 설치하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고, 지평(持平) 안선(安璿)이 아뢰기를, “신 등이 자주 불가(佛家)의 일을 아뢰었으나, 한번도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여 결망(缺望)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선왕 때의 일을 다 고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원각사(圓覺寺)를 헐어버리고, 중[沙門]들을 모두 죽여버린 뒤에야 마음이 쾌하겠느냐?”

하니, 안관후가 말하기를, “큰 일은 비록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작은 일은 고쳐버리는 것이 매우 옳습니다.” 하고, 안선이 말하기를, “비록 원각사를 헐어버리고 중들을 다 죽인다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위(魏)나라 임금이 천하의 중들을 다 죽여버렸는데, 이는 너무 심한 일이었다.” 하였다.

 9월 3일(신유)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岸寬厚)․집의(執義) 김춘경(金春卿) 등이 낙산사(洛山寺)의 길을 막은 것과, 해산물 채취를 금지한 것 등의 일을 논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安敦厚(안돈후)4

[조선조 급제자 정록]

안돈후(安敦厚) (세종(世宗) 6년 · 평양별시(平壤別試) · 을과삼(乙科三))

 

안돈후(安敦厚) - - - 평양별시(平壤別試) 삼등(三等) 11위

 

 敦厚돈후 字可化  一四二一年世祖辛丑生 庚辰以生員同仲氏聯璧 文科官 成均舘司藝

 

 癸卯卒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配 贈貞敬夫人 密陽朴氏 父修撰融祖賛成翊 曾祖判圖判書永均

 

○墓 虎山先塋左崗子坐上下 墳歲祀十月十五日有神道碑晩鎔撰 十六代孫柄眞立碑追記錄

墓在白川虎山先塋局內로久闕省墓러니十五代孫宇鎬十六代孫承佑承千十七代孫春模宰栳等諸孫이敬慕之義로서輸材互出財力而江華先考祭祀壇側에永爲合設祭祀壇하고陰十月十五日享祀

 

왕/년도 : 세조(世祖) 6년
과거시험연도 : 1460 경진
시험명 : 평양별시(平壤別試)
등위 : 3(3)

성명(姓名) : 안돈후(安敦厚)
본관(本貫) : 순흥(順興)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사예(司藝)-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음악을 지도한 정4품 관직

봉산 군수(鳳山郡守)

형(兄) : 안중후(安重厚)
부(父) : 안경(安璟)
조부(祖父) :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 조반(趙胖)
처부(妻父) : 박융(朴融)

 

 

 安仁厚(안인후)5

 

  成宗 八年(丁酉 : 1477年)

8월 20일(갑인)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양경(金良■)과 경기 겸병마절도사(京畿兼兵馬節度使) 박중선(朴仲善)․충청도 병마절도사 안인후(安仁厚)․황해도 겸병마절도사 정괄(鄭眸)․전라도 병마절도사 이숙기(李淑琦)․강원도 겸병마절도사 안관후(安寬厚)․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신주(辛鑄)․우도 병마절도사 권경(權黛)에게 전교하기를,

“열병(閱兵)과 사냥(敆狩)은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아울로 폐할 수 없다. 오는 10월 초3일에 교외(郊外)에서 친열(親閱)하고, 이어서 광주(廣州)에서 사냥하려고 하니, 이제 보내는 발병부(發兵符)를 합(合)해서 증험해 보고, 도내(道內)에서 유방(留防;머물로서 방수(防戍)함)하고 있는 군사 이외에 번휴(番休)하고 있는 모든 고을의 군사는 모두 조발(調發)해서, 왕복[往返]을 따지지 말고 12일간의 양미(糧米)를 싸 가지고 오는 9월 28일에 정금원평(定金院坪)에서 모여 기다리게 하라. 이달 8월에 교대(敆番)한 군사(軍士)는 내려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았고, 오는 11월에 당번(當番)할 충순위(忠順衛)의 정병(正兵) 등은 번상(番上)할 시기가 박두해서,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고, 재해(災害)을 입은 여러 고을의 군사는 모두 징집해 모으지 말라.” 하였다.

 

 

 

 

 

 

[묘] 백천(白川)의발산방 호산(鉢山坊 虎山) 안쪽 용수동(龍鬚洞)

 

황해도 연백군 [延白郡]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운산면 雲山面=발산방(鉢山坊)

 

유적으로는 주암리의 천등산에 등암사(燈巖寺)가 있으며 산기슭에 천등암(天登巖)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이 바위 아래에서 탄생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절터에 큰 미륵상만이 남아 있다. 강서리 백마산(白馬山) 남록에는 고려시대 시인·문객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았던 강서사(江西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호산(虎山)·강서(江西)·우포(牛浦)·파릉(巴陵)·석산(石山)·대야(大也)·도태(都台)·주암(舟巖) 등 8개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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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부는 일제시대의 대남면과 소남면을 제외한 장단군에 해당한다. 지금은 휴전선이 가운데를 가르고 있어 일부는 남한에 들어와 있고, 북한쪽은 장풍군에 속한다. 임진강이 고을의 동남쪽을 감싸며 서남쪽으로 빠져나간다. 북쪽에서 흘러온 동쪽의 사미천과 서쪽의 사천이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지도에서는 두 하천의 경계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 望海山 부근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 장단부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의 바로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명종의 무덤인 智陵을 비롯한 많은 陵과 신하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지도에는 세종 때 옮기기 이전의 읍치를 古邑으로 나타냈으며, 이미 이 고을에 소속된 松林(古松縣), 臨江폐현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 오른쪽의 臨江書院안향(1243-1306), 이색(1328-1396) 등을 배향하여 1694년(숙종 20)에 賜額받은 서원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 있는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강 건너편의 古南面은 지금의 적성면 장좌리 일대이다. 지도 아래쪽의 임진강변에 있는 德津壇은 나라에서 봄가을로 香과 祝을 내려 제사지내던 곳으로서 中祀에 해당되었다. 그 맞은 편의 臨津別將所가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유명한 임진나루가 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