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씨 삼강정려(邊氏 三綱旌閭)
장성읍 장안리에는 황주 변씨 삼강정려가 세워져 있다. 삼강이란 옛날 유교의 도덕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세가지 도리로써,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며, 삼강 정려란 위와 같은 도리를 잘 지킨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그 뜻을 기리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충신으로 모셔진 변윤중은 호가 휘암인데 임진왜란때 화차를 만들어 왜적을 물리친 망암 변이중 선생의 사촌 동생으로 학문이 뛰어나 선조때는 상의원직장이란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이 평안도 용만까지 피난 길에 오를 때 종형 변이중과 함께 임금을 모시기도 하였다.
또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평소 거느린 종들과 장정 200여명을 모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장안리에서 싸웠으나, 적의 수효가 워낙 많아 10여일 동안 수십명을 사살하면서도 결국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장정들을 다 잃은 변윤중이 피를 흘리면서 마을에 돌아오자, 마을 노인들은 빨리 몸을 피하도록 권하였으나, 도망간다는 것은 의롭지 않다하여 마지막 싸움터였던 부엉 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변윤중의 부인 성(成)씨도 남편의 뒤를 따라 가겠다면서 마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이 몸을 던진 바로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역시 순사하였다.
변윤중의 아들 현윤과 며느리 서(徐)씨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부엉 바위로 가서 보니 부모님의 시신이 나란히 떠 있었다.
이르 보고 형윤이 죽으려 하자 서씨 부인이 남편의 소매자락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이 이 집안의 외아들이므로 만일 죽는다면 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당신대신 목숨을 바치겠소." 하더니 이윽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변씨 삼강정려란 변윤중과 그 부인, 며느리 세분을 위한 것이므로, 그후 고종때 당시 전라 감사(도지사) 조종필이 변윤중을 충신으로, 성씨 부인을 열녀로, 그리고 서씨 부인을 효부로 함께 조정에 올려 변윤중을 이조 참의로 증직하고 삼강 정려의 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