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순흥안씨 자료

순흥안씨 가문을 빛낸 선조(2)

무량청정1 2014. 11. 29. 11:14

순흥안씨 가문을 빛낸 선조(2)

 

Ⅱ. 문(文)외(外) 시호를 받으신 선조

시호(諡號)

휘(諱)

세(世) 파(派)

1

양정공(良定公)

천선(千善)

6세 2파(순성군)

2

경혜공(景惠公)

손주(孫柱)

7세 2파(순성군)

3

소의공(昭懿公)

천보(天保)

7세 2파(소의공파파조)

4

경질공(景質公)

원(瑗)

8세 1파

5

양공공(良恭公)

조동(祖同)

8세1파(부제학공파파조)

6

충정공(忠靖公)

준(俊)

8세 2파(충정공파파조)

7

소간공(昭簡公)

수산(壽山)

8세 2파

8

양도공(良度公)

경공(景恭)

8세 3파

9

정숙공(靖肅公)

순(純)

9세 3파

10

탁경공(卓景公)

승(勝)

11세 1파

11

공평공(恭平公)

침(琛)

12세 1파

12

정민공(貞愍公)

당(塘)

12세 1파

13

소절공(昭節公)

치화(致和)

14세 1파

14

충현공(忠顯共)

홍국(弘國)

14세 2파

15

충익공(忠翼公)

몽상(夢詳)

22세 1파

 

 

1. 양정공 안천선(安千善)

정당문학 보문각대제학을 지내시고 순성군(順城君)으로 봉해졌다.

 

2. 경혜공 안손주(安孫柱)

양정공 안천선의 장남으로서 찬성(贊成)을 엮임하고 순성군으로 봉해졌다.

 

3. 소의공 안천보(安天保)

할아버지는 대제학 문개(文凱)이고, 아버지는 순흥군(順興君) 천선(天善)이다.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가 된다. 소헌왕후는 어려서부터 외가인 그의 집에서 자라 왕비가 되었다.

그는 1362년(공민왕 11년)에 별장에 이어 전객부령(典客副令)·군기윤(軍器尹)·판사복시사·의덕부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사(判宗簿事)를 역임하였다.

그뒤 공부전서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면직당하고 가야금과 책을 벗삼아 16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1408년(태종 8년)검교한성윤에 등용되었다.

1409년 검교참찬(檢校參贊)이 되고 곧이어 검교찬성(檢校贊成)에 올랐다.

세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치사하고, 뒤에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그는 마음이 충직하였으며 의친(懿親: 소헌왕후의 외조부)이 되어서는 더욱 행실을 삼가고 신중히 하여 교만함이 없었다 한다.

세종이 예관(禮官)을 보내 제문과 제전 20결을 하사하였다.

 

4. 경질공 안원(安瑗)

정당문학 원숭(元崇)의 아들로서 1374년(공민왕 23)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몸소 찾아가 간청하여 벼슬에 나아가니,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 大學衍義》·《통감집람 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뒤 1404년 경상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개성유후를 역임하고 병사하였다.

위인이 근면성실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

 

5. 양공공 안조동(安祖同)

예문관부제학으로 고려 우왕으로부터 도덕과 학문 인품이 회헌 안향과 동일하다 하여 조동(祖同)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부제학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6. 충정공 안준(安俊)

고려 공민왕때 경상, 충청, 전라 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를 겸하셨다.

임종시 지석도 묻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을 실천하신 선조이시다.

세종대왕이 그 높은 뜻과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겨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리셨다.

 

7. 소간공 안수산(安壽山)

시조공의 8세(世)로서 세종원년인 1419년에 지평(持平-정오품)이 되셨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등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셨고 이듬해에 형조참판 승록대부에 올랐으며 1434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종일품)가 되었으나 그해 돌아 가시니 원종삼등공신(原從三等功臣)으로 추록되었으며 시호는 소간공(昭簡公)이다. 공은 궁중(宮中)의 외숙(外叔)으로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었으며 공이 돌아가시자 2일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관청에서 장사를 치르게 하는 등 후한치조(致弔)와 치부(致賻)를 행하였다. 

 

8. 양도공 안경공(安景恭)

할아버지는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축(軸)이고, 아버지는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오른 종원(宗源)이다.

1365년(공민왕 14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산원(散員)·낭장 겸 사헌규정(郎將兼司憲糾正)을 거친 뒤 1376년(우왕 2년)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속해서 전리좌랑(典理佐郎)·전법좌랑(典法佐郎)·사헌지평(司憲持平)·예의정랑(禮儀正郎)을 역임하였으며, 1382년에는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있으면서 합주 (陜州)에서 사노(私奴)들이 검대장군(劍大將軍)·초군장군(抄軍將軍)·산군장군(散軍將軍) 등을 칭하고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판통례문사 진현관제학(判通禮門事進賢館提學)·판전교시사 지제교 예의판서 (判典校寺事知制敎禮儀判書)를 거쳐 전법판서가 되었고, 1390년(공양왕 2년) 정몽주 (鄭夢周) 가 윤이(尹이)·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하였다 하여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제학에 보임되고, 1392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좌대언에 올랐다. 이해에 조선건국에 참여하였으며, 곧 중추원도승지에 제수되고 개국공신이 책봉될 때 3등공신이 되었다.

1393년(태조 2)에는 사헌부대사헌 겸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 (司憲府大司憲兼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에 올랐고, 같은해에 전라도관찰출척사 (全羅道觀察黜陟使)로 나아갔으며, 이듬해에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1406년(태종 6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임명되었다가 곧 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로 옮겼으며, 1410년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정탁(鄭擢)·유창(劉敞)·조견(趙狷)·한상경(韓尙敬)·조온(趙溫) 등 개국공신들과 더불어 1398년(태조 7년)의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의 죄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416년 보국숭록대부 집현전대제학(輔國崇祿大夫集賢殿大提學)에 특수(特授)되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진작(進爵)되었다.

임금이 내려 준 논밭으로 사패지지(賜牌之地)인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양도공묘역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으며 순흥안씨 제3파의 종중 사무실이 있다.

 

9. 정숙공 안순(安純)

증조부는 고려 말기의 학자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한 축(軸), 할아버지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역임한 종원(宗源), 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경공(景恭)이며, 어머니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의 딸이고, 부인은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딸이다.

1380년(우왕 6)에 10세의 나이로 행랑도감판관(行廊都監判官)에 음보되었으며, 1383년 진사시에, 138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성균학유가 되었으며, 1392년(태조 1)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사재주부(司宰注簿)로 발탁되었다.

1393년에 사헌감찰, 이듬해에는 좌습유 겸지제교(左拾遺兼知製敎)로 승진하였다.

1396년에 김해판관으로 좌천된 적도 있으나 1397년에 예조좌랑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으로서 중앙관에 복귀되었다.

1398년 여름에 강원도도사가 되었다가 이해 가을에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다시 중앙에 복귀되었다. 그가 사헌잡단으로 재직하던 때에 궁녀 한명이 죄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태조는 당시 대사헌이던 조박(趙璞)에게 그 궁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조박은 안순에게 곧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사헌부는 형관이 아니며, 더구나 그 사람의 죄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처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박은 명령대로 할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으나,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니 우선 유사(有司)에 명하여 먼저 심문부터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으니, 이러한 일화가 암시하듯이 그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1401년(태종 1)병조정랑 겸형조도관, 1403년 겸사평부경력(兼司平府經歷)·사헌부장령을 거쳐, 1407년 승정원우부대언에 발탁되고, 1409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경상도관찰사, 1411년 좌군총제(左軍摠制)·집현전제학, 1414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19년(세종 1)호조참판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1420년에는 공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423년 함길도도관찰사에 이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호조판서가 되었고, 1432년에 판중추원사 겸판호조사(判中樞院事兼判戶曹事), 1435년에 의정부찬성사, 1437년에는 충청도지방의 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로 임명되어 그 임무를 잘 수습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호조판서 또는 판호조사를 겸하면서 국가의 전곡(錢穀)을 관장하였는데, 그 경비출납의 제 문제가 추호도 틀림없이 정확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수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특히 국가의 재정을 책임 맡은 직에서 가장 공로를 쌓았던 것이다.

이조실록 세종조에 202건이나 공에 관련된 기록이 있으니 얼마나 유능하고 훌륭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10. 탁경공 안승(安勝)

참의 벼슬을 지내시었다.

 

11. 공평공 안침(安琛)

전라도관찰사, 한성부우윤, 대사헌, 경상도병마절도사, 예문관제학,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엮임했다.

 

12. 정민공 안당(安塘)

1481년(성종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성을 거쳐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년(연산군 2)에 사헌부장령, 1506년(중종 1)에 연산군이 폐지하였던 사간원이 부활되면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507년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년 12월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작되었다.이듬해에 대사헌을 거쳐 형조·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14년 11월에 호조판서, 151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구폐를 혁신하고 분경(奔競)을 금지시켰으며, 관리의 등용에 있어 순자법(循資法)에 따르지 말고 어진 인재를 발탁해서 쓸 것을 주장하여,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김식(金湜)·조광조(趙光祖)·박훈(朴薰)·김대유(金大有)·반석평(藩碩枰)·송흠(宋欽) 등을 탁용하거나 천거하였다.

같은해 8월 박상(朴詳)·김정(金淨) 등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구언(求言)을 하여놓고, 죄를 주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극구 변호하였다. 이 일로 그 자신도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사림으로부터는 높이 추앙받게 되었다.

1516년에 직을 바꾸어줄 것을 청하여 윤허 받았으나 다시 다음해에 호조판서로 기용되고, 1518년에 우찬성이 되었다가 그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 우의정 임명은 김전(金詮)과 경합이 되었으나 사림계열의 지지로 그가 제수받게 되었다.

이때 소격서의 혁파 등을 계청(啓請)하였고, 1519년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삭훈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극구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조광조 등을 변호하여 구원하고자 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같은해 11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계속 탄핵받았으며, 더욱 현량과(賢良科) 설치를 처음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천거되게 하였다는 허물까지 쓰고 기묘당인의 우익으로 배척당하였다.

이해 12월에 파직당하였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시 대간으로부터 고신(告身)을 환수시킬 것을 요청하는 등의 탄핵을 받았다.

1521년 아들 처경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詩山副正) 정숙(正叔), 권전(權磌) 등과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비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눈 것이 송사련(宋祀連)에 의하여 고변당하여,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하였다는 혐의로 처형됨에, 그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연좌되어 교사형(絞死刑)에 처해졌다.이 사건은 심정 등이 집의 윤지형(尹止衡)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것이라 하며 신사무옥이라 이른다.명종 때 손자인 윤(玧)의 상소에 의하여 누명이 벗겨지고 복관되었다.

행동이 신중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공정한 성품으로 옳은 일에 용감하였다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 사림을 정계에 등용시키고 그들을 옹호함으로써 사림에게 중망이 컸다.

 

13. 소절공 안치화(安致和)

아산, 정산, 석산현감을 지냈고 임진왜란때 순절하셨으며 병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14. 충현공 안홍국(安弘國)

찬성사 문개(文凱)의 9대손으로 1583년(선조 16)에 두 형과 더불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으며 왕명을 받들어 각 진(鎭)을 다니며 왕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이해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 등으로 전공을 세웠다.

1597년 보성군수로 3도 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의 휘하에 중군(中軍)으로 참전, 군무에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선〔舟師〕 30여척을 이끌고 안골포(安骨浦)·가덕도(加德島)의 적주둔지를 공격하다가 안골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보성의 정충사(旌忠祠)에 제향되었다.

 

15. 충익공 안몽상(安夢詳)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강화도에서 순절하셨으며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