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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가문을 빛낸 선조(3)

무량청정1 2014. 11. 29. 11:15

순흥안씨 가문을 빛낸 선조(3)

 

Ⅲ. 봉군선조(封君宣祖)

봉군(封君)이란 옛날 임금의 아들이나 종친 또는나라의 공신들에게 내렸던 작호(爵號)로써

임금의 적자에게는 대군(大君)으로 봉하고 임금의 서자(庶子) 또는 2품(二品)이상의 종친(宗親)과 공신에게는 군(君)으로 봉했다.

임금의 장인(丈人) 또는 정 1품(正一品)의 공신에게는 부원군(府院君)이라 봉했으며 받는 사람의 본관(本貫)인 지명을 앞에 붙여 지었다.

우리 순흥안씨의 가문은 왕의 종친이 아니라 공신으로서 봉작을 받았다.

봉군(封君)

휘(諱)

시호(諡號)

세(世) 파(派)

1

순평군(順平君)

우기(于器)

문순공

5세 1파

2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문개(文凱)

문의공

5세 2파

3

순흥군(順興君)

목(牧)

6세 1파

4

순성군(順城君)

천선(千善)

양정공

6세 2파

5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축(軸)

문정군

6세 3파

6

순흥군(順興君)

집(輯)

6세 3파

7

순성군(順城君)

원숭(元崇)

문혜공

7세 1파

8

죽성군(竹城君)

원형(元衡)

문혜공

7세 1파

9

탐진군(耽津君)

원린(元璘)

문렬공

7세 1파

10

순성군(順城君)

손주(孫柱)

경혜공

7세 2파

11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종원(宗源)

문간공

7세 3파

12

오성군(鰲城君)

우(祐)

문충공

8세 1파

13

흥녕군(興寧君)

면(勉)

문정공

8세 1파

14

안원군(安原君)

처(處)

8세 1파

15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경공(景恭)

양도공

8세 3파

16

영원군(寧原君)

숭직(崇直)

10세 3파

17

안천군(安川君)

숭효(崇孝)

10세 3파

18

순계군(順溪君)

세복(世復)

16세 1파

19

순양군(順陽君)

몽윤(夢尹)

17세 1파

20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

18세 1파

 

 

1. 영원군 안숭직(安崇直)

정숙공 안순의 장남으로 판내자사의 벼슬을 지내셨다.

 

2. 안천군 안숭효(安崇孝)

정숙공 안순의 4째 아들로 대사헌, 경기, 충청, 전라 삼도의 관찰사 엮임하셨다.

 

3. 순계군 안세복(安世復)

풍저창직장을 지내셨으며 보조공신 좌찬성에 추중되셨다.

 

4. 순양군 안몽윤(安夢尹)

순계군 안세복의 2째 아들로 음보(조선 후기에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제로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등용됨)로 군직에 나가 1592년(선조 25년)임진왜란 때 왜군을 토벌하고, 선조가 8도에 내린 명에 의하여 부적행위(附敵行爲)를 하며 구날(構捏)을 일삼던 왜역관 김덕회(金德澮)·김응관(金應灌)을 목베어 행재소에 보냈다. 전주 분조(分朝)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99년에 부장(部長)으로 창덕궁을 지켰으며 그뒤 사헌부감찰을 거쳐 남포현감·옥구현감·안동판관 등의 외직을 지내면서 일을 잘 처리하여 함안군수에 승진하고, 1612년(광해군 4)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이듬해에 우림장(羽林將), 1618년 첨지중추부사, 1622년 자산군수가 되어 조방장(助防將)을 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수령들이 거의 쫓겨났으나 그만은 홀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전부우협장(前部右協將)으로 군량보급에 힘쓰고 서울 안현(鞍峴)싸움에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3등으로 순양군(順陽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숙천부사, 1626년 부총관에 이어 김해부사·중화부사·전라수사 등을 거쳐 1643년 경상우병사가 되고, 1646년 자헌계(資憲階)에 올라 도총관을 겸하였다.

1648년 포도대장, 이듬해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사후에 우의정으로 증직되고 순양부원군으로 추봉되셨다.

 

5. 순원군 안응창(安應昌)]

선산부사를 엮임했고 봉림대군의 사부였으며 우리 순흥안문의 종사(宗事)에 크게 공헌하신 선 조로 350여년전에 순흥 관향지의 향려단, 추원재의 창건, 영모암의 개수, 추밀공묘소 정화, 사현정비 건립, 참판공 묘 표석 찬지(撰誌), 서파공행장 편찬, 순흥안씨 기해보(己亥譜) 편찬 등의 순흥안씨 고양사업(高揚事業)에 공헌(貢獻) 하시었다.

 

◈ 신 죽산안씨의 시조인 안원형(安元衡)은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 가공인물이란 논란이 있다.

 

◈ 탐진안씨의 시조인 안원린(安元璘)은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 가공인물이란 논란이 있다.

 

안우(安祐)는 탐진안씨의 시조인 안원린(安元璘)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

   (부자지간의 출생 년대가 맞지 않는다.)

 

면(安勉)은 신죽산안씨로 순흥안씨와는 관련이 없다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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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가문을 빛낸 선조(4)

 

Ⅳ. 문형선조

문형이란?

조선시대에 예문관, 홍문관, 집현전에 제학, 대제학을 두어 종신직으로 되어있다.

대제학은 학문의 최고자리로서 타직을 겸임할 수가 있으며 이의 임명은 전임자가 추천을 하는데 학문과 도덕이 뛰어난데다가 그 가문에 결함이 없는 석학, 석유(碩儒)를 추천하면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좌우찬성, 좌우참찬, 육조판서, 한성부윤이 참석하여 다수결로 결정하였다.

우리 순흥안씨는 17분의 대제학이 나왔다.

문형(문형)

휘(諱)

시호(諡號)

세(世) 파(派)

1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향(向)

문성공

4세 1파

2

예문관태학사(藝文館太學士)

문개(文凱)

문의공

5세 2파

3

진현관대제학(進賢冠大提學)

목(牧)

문숙공

6세 1파

4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축(軸)

문정공

6세 3파

5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보(輔)

문경공

6세 3파

6

보문관대제학(寶文館大提學)

집(輯)

6세 3파

7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원숭(元崇)

문혜공

7세 1파

8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종원(宗源)

문간공

7세 3파

9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경공(景恭)

양도공

8세 3파

10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종약(從約)

9세 1파

11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노생(魯生)

9세 1파

12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

순(純)

정숙공

9세 3파

13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구(玖)

10세 1파

14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숭선(崇善)

문숙공

10세 3파

15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귀(知歸)

11세 1파

16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지(止)

12세 1파

17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종도(宗道)

15세 1파

 

 

1. 예문관대제학 안종약(安從約)

두문 72현의 한분으로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예문관,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셨다.

순흥 용연사, 개성 표절사, 광주 경현사에 배향되었다.

 

2. 집현전대제학 안노생(安魯生)

서북면 찰방별감(서북면 찰방별감)으로 국경지대의 기강을 바로잡고 자헌대부, 이조찬서, 홍문관, 예문관대제학 겸 경연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추증되셨다.

 

◈ 신 죽산안씨의 시조인 안원형(安元衡)의 후손으로 순흥안씨와는 관련이 없다는 논란이있다.

 

3. 예문관대제학 안지귀(安知歸)

성균관 대사성, 전주부윤을 엮임하셨고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으로 추증되고 승정대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가증되었다.

 

4. 예문관대제학 안종도(安宗道)

명종 1년(154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사관(史館)에 들어가 봉교(奉敎) 등을 지냈다. 1557년 부상(父喪)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고, 시강원 설서(說書)를 거쳐 형조 · 예조 · 병조 · 이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쳤고, 사헌부 정언(正言) ·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그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 교리(校理) ·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 사옹원 정(司饔院正) ·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지내고, 1566년 배천(白川) 군수가 되어 치적을 남겼으므로 선정비가 세워졌다. 1572년 우통례(右通禮)를 거쳐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고 1574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가 되었다. 1580년부터 1589년까지 경주 · 안동 · 양주(楊州) 등지의 수령과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고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투쟁하였다.

사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대제학을 추증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