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가문을 빛낸 선조(1)
우리선조 가운데 6세 문정공 안축(安軸), 7세 문간공 안종원(安宗源), 8세 양도공 안경공(安景恭) 등 3대가 부원군(府院君)이셨고,
6세 문정공 안축, 7세 문간공 안종원, 8세 양도공 안경공, 9세 정숙공 안순(安純), 10세 문숙공 안숭선(安崇善) 등 5대가 대제학(大提學)이셨다.
이것을 줄여서 삼수훈봉(三受勳封)과 오전문형(五典文衡)의 명문가(名文家)라 한다.
또한 택주(宅主)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보다 윗자리인 부인(夫人)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의 호칭(呼稱)으로 7세 문간공의 부인이 경혜택주(慶惠宅主)이며 8세 양도공의 부인이 의정택주(懿靜宅主)로서 2대가 연속하여 택주셨다.
우리 순흥안씨가 이조때에는 6대성(六大姓-이씨, 김씨, 최씨, 안씨, 정씨, 박씨)으로 불리어 왔었는데 이는 수(數)가 많아서가 아니라 고려(高麗)때부터 기라성(綺羅星) 같은 훌륭하신 선조들이 많이 계셔서 거성(巨姓)의 가문(家門)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유가(儒家)의 종가(宗家)로서 학자와 선비의 가문으로서 충효절의와 애국과 그리고 애민정신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으로서 민족개화(民族開化)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모범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Ⅰ. 문자(文字)시호(諡號)를 받은 선조
시호란 주로 공신(功臣), 중신(重臣), 유현(儒賢) 등 이들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임금)에서 내려준 호를 말한다.
이조 때에는 원칙적으로 정 2품(正二品)이상의 공신과 중신에게 시호를 내리게 된 것이며 사시(賜諡)는 최대의 명예의 표창으로서 그 시호 밑에 공(公)자를 붙여 호칭한다.
그런데 이 시호중에서도 앞에 문(文)자가 붙는 시호를 제1로 친다.
시호(諡號) |
휘(諱) |
세(世) 파(派) | |
1 |
문성공(文成公) |
향(珦) |
4세 1파 |
2 |
문순공(文順公) |
우기(于器) |
5세 1파 |
3 |
문의공(文懿公) |
문개(文凱) |
5세 2파 |
4 |
문경공(文敬公) |
석(碩) |
5세 3파 |
5 |
문숙공(文淑公) |
목(牧) |
6세 1파 |
6 |
문정공(文貞公) |
축(軸) |
6세 3파 |
7 |
문경공(文敬公) |
보(輔) |
6세 3파 |
8 |
문혜공(文惠公) |
원숭(元崇) |
7세 1파 |
9 |
문혜공(文惠公) |
원형(元衡) |
7세 1파 |
10 |
문렬공(文烈公) |
원린(元璘) |
7세 1파 |
11 |
문간공(文簡公) |
종원(宗源) |
7세 3파 |
12 |
문정공(文靖公) |
면(勉) |
8세 1파 |
13 |
문충공(文忠公) |
우(祐) |
8세 1파 |
14 |
문숙공(文潚公) |
숭선(崇善) |
10세 3파 |
15 |
문정공(文靖公) |
지(止) |
12세 1파 |
16 |
문간공(文簡公) |
위(瑋) |
14세 1파 |
17 |
문희공(文僖公) |
현(玹) |
14세 1파 |
18 |
문강공(文康公) |
방준(邦俊) |
17세 1파 |
1. 문성공 안향(安珦)
안자미(安子美)시조의 4세되시는 우리 순흥안씨를 명문의 가문으로 일으키신 가장 훌륭하신 선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추앙 받고 벼슬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내각수반격)이며 문묘 에 동방 18현인의 1인으로 배향되었으며 소수서원등 14개 서원과 전국의 361개 향교에 배향 되었다.
2. 문순공 안우기(安于器)
문성공 안향의 아들로서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상호군(上護軍)에 이르고 1만 8천권의 경적(經籍)을 검열한 도학의 승계자이다.
3. 문의공 안문개(安文凱)
예문관대제학감춘추관사(藝文舘大提學監春秋館事), 영효사관사(領孝思舘事), 순흥부원군(順興 府院君), 삼중대광좌정승(三重大匡左政丞), 우문관대제학(右文舘大提學)으로 충절의 공신 일대유종(一代儒宗)이라 불린다.
4. 문경공 안석(安碩)
관에 나가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사현정의 신화를 낳게하시고 삼수훈봉 오전문형의 가문을 일 으키신 은덕불사의 선조이며 밀직제학봉익대부로 추봉되셨으며 우리 순흥안씨가 명문가로 일 어 나는데 초석이 되신분이다.
아들 다섯분중 둘째아들(安軸-文貞公), 셋째아들(安輔-文敬公), 넷째아들(安輯-祭酒公), 이 세분이 모두 문과에 급제했고 그 중 둘째아들(安軸)은 원나라 제과(制科-과거)에서 장원급제 (壯元及第)하였고 삼남(安輔)도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이들 모두 한집에서 한 우물을 마시 고 모두 등과 했다해서 그 우물을 사현정(四賢井)이라 불렀다.
2남인 문정공과 3남인 문경공은 소수서원에 배향되었고 문정공으로부터 3대에 걸쳐 부원군(府 院君-안축, 안종원, 안경공)으로 봉해졌고 5대에 걸쳐 대제학(大提學-안축, 안종원, 안경공, 안순, 안숭선)이 됨으로써 삼수훈봉(三受勳封) 5전문형(五典文衡)의 가문이 되었다.
5. 문숙공 안목(安牧)
문성공 안향의 손자로서 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進賢舘大提學)을 엮임 하였으며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자 시호를 받았으니 문혜공 원승, 문헤공 원형, 문렬공 원린이 시다.
4대에 걸쳐 문자 시호를 받은 분이 여섯분이나 되니 정말 문벌의 집안이라는 말을 들을만도 하다. 순흥 용연사에 배향되었다.
6. 문정공 안축(安軸)
근재(謹齋) 안축은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 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 근재 집(謹齋集)등의 저서가 있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당문학(政堂文學), 영춘추관사(領春秋舘 事) 엮임 하셨고 대중대광도첨의찬성사(大重大匡都僉議贊成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피봉(皮封)되셨다.
소수서원 및 음성 도통사 등과 유명사원(祠院)에 배향되고 있다.
7. 문경공 안보(安輔)
문정공 안축의 동생으로 왕실의 미신까지 배척한 청렴한 효자로 알려져 있다.
전법판서(典法判書),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내셨다.
소수서원 및 음성 도통사에 배향되고 있다.
8. 문혜공 안원숭(安元崇)
문숙공 안목의 장남으로 광정대부 정당문학(匡靖大夫 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을 지내셨다.
순흥 용연사에 배향되었다.
9. 문혜공 안원형(安元衡)
문숙공 안목의 차남으로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을 지내신 공신이며 신 죽산안씨의 시조(始祖)가 되셧다.
장흥 만수사에 배향되었다.
◈ 신 죽산안씨의 시조인 안원형(安元衡)은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
10. 문렬공 안원린(安元璘)
문숙공 안목의 삼남으로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檢校中樞府事)로 탐진안씨의 시조가 되셨다.
◈ 탐진안씨의 시조인 안원린(安元璘)은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
11. 문간공 안종원(安宗源)
문정공 안축의 아들로서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중대광(三重大匡), 흥녕부원군, 대사헌,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補國崇錄大夫), 영삼사사(領三司事), 진현관태학사(進賢舘太學士) 등을 엮임하셨다.
12. 문정공 안면(安勉)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 대승상(大丞相)을 엮임 하셨고 , 흥녕군으로 피봉되셨다.
◈ 신 죽산안씨의 시조가 순흥안씨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
13. 문충공 안우(安祐)
문렬공 안원린의 장남으로 홍건적과 싸워 평정하였고 문무겸전의 구국충신(救國忠臣)이다.
◈ 탐진안씨의 시조인 안원린(安元璘)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부자지간의 출생 년대가 맞지 않는다.)
14. 문숙공 안숭선(安崇善)
고조부는 고려 말기의 학자로서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한 축(軸), 증조부는 판문하부사를 역임한 종원(宗源), 할아버지는 선의 개국공신에 오른 경공(景恭), 아버지는 판중추원사를 지낸 순(純)이다. 부인은 송씨(宋氏)로 판전농시사 천우(千祐)의 딸이다.
그는 1411년(태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5년에 음보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으며, 1418년에는 사헌감찰에 이르렀다.
1420년(세종 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조전랑으로 전보되었으며, 1426년 장령이 되었다.이때 사헌부에서 예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수차에 걸쳐 탄핵하였는데 그가 앞장을 섰다.
이 일로 세종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으며 곧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고, 1429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
1433년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 이로 인하여 세종의 신임을 크게 얻었으며 세종대왕이 하사한 토지를 받지 않으신 청렴함을 가지셨다.
1443년에 형조판서, 1444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집현전대제학, 1445년에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에는 병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근재집 謹齋集》에 부록으로 유고가 전한다.
15. 문정공 안지(安止)
시와 문장이 뛰어나서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하시고, 집현전, 예문관대제학을 엮임 하셨다.
경산의 조곡서원에 배향되었다.
◈ 탐진안씨의 시조가 순흥안씨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
16. 문간공 안위(安瑋)
군사전략가로 동서벽관(東西壁官),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總管)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을 엮임하셨다.
순흥안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간행하셨다.
17. 문희공 안현(安玹)
1521년(중종 16)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승정원주서·병조정랑을 거쳐, 1533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이로부터 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민정을 순행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의 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면서 사필(史筆)을 공정히 할 것과 사료보관의 신중성을 주장하였고, 또한 당시의 사치풍조를 엄히 단속하고 경비의 절감을 꾀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하였다.
1541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승지가 되고 중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고생할 때, 승지로서 의약에 밝아 항상 시종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항시 검약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아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났다.
그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을사사화 때는 윤원형(尹元衡) 등에 협조하여 그의 추천으로 1548년(명종 3)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곧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어 의정부우참찬·호조판서를 거쳐 1553년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였는데, 인사청탁을 들어주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계속 승진하여 다음해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로서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이어 좌찬성·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윤원형의 추천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판중추부사를 거쳐 1558년에 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하여 형[문간공 안위(安瑋)]을 마치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여러 차례 당상문신정시(堂上文臣庭試)에서 문명을 떨쳤고, 경연(經筵)에서의 강설은 세밀하고도 분명하였다.
중후하고 단정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일을 맡으면 성심껏 수행하였다.
특히, 의술에 정통하여 내외 의국(醫局)을 관리하였다.
중종, 인종, 명종대에 걸쳐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셨다.
18. 문간공 안방준(安邦俊)
벼슬에는 뜻을 두지않고 오직 후진교육에 전념하신 우산(牛山)선생으로 널리 알려졌다.
승주 동북면에 우암 송시열선생이 쓴 신도비가 있다.
◈ 신 죽산안씨의 시조가 순흥안씨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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