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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順興安氏)
본관명 : 순흥(順興)
본관소재지 :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榮州)
시조 : 안자미(安子美)
본관 연혁
순흥(順興)은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에 속해 있는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신라 경덕왕 때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가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태(胎)를 봉안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되었으며,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順興府)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바뀌었다가, 1457년(세조 3)에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풍기(豊基), 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시켰다.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순흥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로 이관하였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 편입시켜 영주시에 속한 순흥면으로 남아 있다. 1980년 영주시가 생기면서 영풍군의 관할이 되었다가, 1995년에 영풍군이 영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시대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되었다. 따라서 시조 이전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으나, 그 후대로 순흥현(順興縣)에 세거했기 때문에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안자미의 아들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를 기준으로 1,2,3파로 구분된다.
분적종 및 분파
순흥안씨는 관향을 순흥(順興)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상촌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면 신음리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 중소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 석천리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호산리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
황해도 황주군 수풍면 영풍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순흥안씨는 145,254가구 총 468,827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문헌]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성씨정보(http://www.surname.info)
안향(安珦)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5COc_A1243_1_0006963
안우기(安于器)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5COc_A1265_1_0006876
안목(安牧)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5COc_A9999_1_0006808
안원(安瑗)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346_1_0006878
안돈후(安敦厚)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460_001223
안당(安瑭)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61_1_0006794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481_001735
안처겸(安處謙)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86_1_0006942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519_002577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SA_6JOa_1513_002266
안현(安玹)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501_1_0006965
안종원(安宗源)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5COc_A1325_1_0006917
안경량(安景良)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5COc_A9999_1_0006761
안진(安震)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5COc_A9999_1_0006932
안천보(安天保)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339_1_0006948
안경공(安景恭)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347_1_0006759
안순(安純)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371_1_0006853
안숭선(安崇善)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392_1_0006855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420_000414
안의(安誼)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23_1_0016273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SA_6JOa_1447_000160
안호(安瑚)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37_1_0006968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466_001325
안선(安璿)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40_1_0006838
안우삼(安友參)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41_1_0016271
안침(安琛)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45_1_0006955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466_001329
안기(安璣)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51_1_0006784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495_001988
안처성(安處誠)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a_A1477_1_0006944
http://people.aks.ac.kr/view.jsp?id=EXM_MN_6JOa_1504_002197
드러난 선조
안향의 아들로 1282년(충렬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안우기(安于器)는 우부승지(右副承旨)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지밀직(知密直)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8백 권을 검열했으며,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등을 지낸 후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벼슬에서 물러났던 안원(安瑗)(정당문학 안원숭의 아들)은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으나 태조(太祖)가 구도(舊都)인 개성(開城)의 유수(留守)로 있게 하고 그의 충절을 극찬하여 후에 시호(諡號)를 경질(景質)로 하사(下賜)했다.
호상한 성품으로 구김이 없었던 그는 항상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서 이 첨(李詹)이 찾아가 보니 원이 나무에 기대어 왼 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 손으로 주자(朱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鋼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고 한다.
호부 낭중(戶部郎中)에 추증된 안득재(得財:문경공 영화의 아들)의 후손에서는 밀직제학(密直提學) 안석(碩)의 아들 5형제가 뛰어났다.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안축(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릉도(江陵道)를 존무(存撫)했으며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저술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민 지(閔 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개찬, 충렬, 충선, 충숙왕 3조(朝)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특히 그는 경기체가(景幾體歌)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이 높았고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안보(輔)는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恭愍王) 때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동경 유수(東京留守)를 역임했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宗源)은 우왕(禑王) 때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시정하는데 앞장섰으며, 대사성(大司成)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어 순성보조공신(純誠輔祚功臣)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고, 청렴으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발탁 된 후 공양왕(恭讓王) 때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진봉되었다.
안종원의 아들 3형제 중 막내인 경공(景恭)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흥년군에 봉해졌다가 태종(太宗) 때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시호가 양도(良度)이다. 경기도 시흥에 불천위 사당이 있다. 양도공의 아들 안순(純)이 세종(世宗) 때 명신(名臣)으로 유명했다. 순이 사헌부 잡단(司憲府雜端)에게 명하여 당장 죽이라고 하자, 순이 죄를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상주하여 왕이 그의 말을 좇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안숭선(崇善)은 1420년(세종 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동부대언(同副代言)에 올라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정벌을 주장했다. 특히 그는 준수하고 호걸스럽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 재주와 학문을 인정 받아 황보인(皇甫仁) 후임으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 안문개(文凱)의 손자 안천보(天保:순흥군 안천선의 아들)는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조부로서 세종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부윤(府尹) 안지귀(知歸)의 아들 안침(琛)은 성종(成宗) 때 이조 참판을 거쳐 연산군 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사예(司藝) 안돈후(敦厚)의 아들로 성종 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했던 안당(安瑭)은 장중(莊重)하여 말과 웃음이 적고, 청백하고 검소하여 바른 것을 지켜 직무를 행했으며, 의(義)를 행함에 과단성이 있어서 임금에게 아뢰어 시행한 것이 많았다고 「당적보」에 적고 있다. 연산군이 사간원(司諫院)의 벼슬을 없앴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대사간에 등용되어 무너지는 기강을 바로 세우고 원통한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었으며, 이조 판서가 되어 선비를 뽑아 인재 등용에 힘썼다. 강직한 성품으로 오직 나라 일에 전념했으나 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화를 입었다.
그가 일찍이 호서 안찰사(湖西按察使)로 나갈 때 시(詩)를 짓기를 <말고삐 잡으면서 천하를 맑게 하겠다던 옛 사람의 일을 내가 어찌 감당하랴 다만 충의를 가지고 내 한 몸을 꾀하지 않겠다> 하였다. 당의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자 그는 집안이 너무 성(盛)한 것을 염려하여 벼슬에서 사직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녹으로 받은 것 외에는 모아 둔 재산이 없어 부인이 갑자기 죽자 장사를 치루지 못하여 남에게 빌려서 치르니 사람들이 그의 청백에 감복했다고 한다.
명종조에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찬수했던 안위(瑋)의 아우 안현(玹)이 명종 때 현상(賢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청강사재록(淸江思齋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충성스럽고 청렴하여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며, 등에 종기(腫氣)가 나자 의원이 말하기를 "지렁이 즙을 내어서 발라야 한다"고 하니, 그가 이르기를 "한창 봄에 만물이 생생한데 지렁이가 비록 미물이지만 어찌 내 병을 위하여 생명 있는 것을 죽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전적(典籍) 안기(璣)의 아들 안처순(處順)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안침(琛)에게 의탁하여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은퇴, 다시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을 지냈다. 조광조(趙光祖)가 능성(綾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와 아는 체만 해도 잡혀 간다 하여 모두 조광조를 소외했는데, 처순은 멀리 구례로부터 올라와 조광조를 만나고 기묘사화로 남쪽에 유배되어 온 현량(賢良)들의 생활을 동분서주하며 구재했다.
그 밖에 순흥 안씨를 빛낸 인물로는, 양성 현감(陽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와 그림으로 유명했던 안정(珽:병조 좌랑 안처선의 아들)과 선조(宣祖) 때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했고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안자유(自裕)가 대표적이며, 위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이 되어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벽파진(碧波鎭)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선조(宣祖)로부터 「무경칠서(武經七書)」를 하사받아,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싸움에서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순절한 안영(瑛:안처순의 증손), 역시 임란 때 남원(南原)에서 순절한 대중(大重), 사오(嗣吳)의 부자와 더불어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했던 안병찬(秉瓚)과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안승우(承禹)가 뛰어났으며, 도산(島山) 안창호(昌浩)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 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진사 안태훈(泰勳)의 아들 안중근(重根)은 만주 하르빈역에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하고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이 쇠와 같고, 의사는 위대로움에 임할지라도 기운이 구름 같도다>라는 유시(遺詩)를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益泰)와 함께 의절(義節)의 가문(家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99,937가구, 417,5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호를 받은 선조
4세 |
향(珦) 문성(文成) = 道德博聞曰文 安民立政曰成 |
5세 |
우기(于器) 문순(文順) = 勤學好問曰文 慈和 服曰順 |
5세 |
문개(文凱) 문의(文懿) = 勤學好問曰文 溫柔賢善曰懿 |
6세 |
목(牧) 문숙(文淑) = 勤學好問曰文 道德純一曰淑 |
6세 |
축(軸) 문정(文貞) |
6세 |
보(輔) 문경(文敬) |
7세 |
원숭(元崇) 문혜(文惠) = 勤學好問曰文 柔質慈民曰惠 |
7세 |
원형(元衡) 문혜(文惠) = 勤學好問曰文 柔質慈民曰惠 |
7세 |
원린(元璘) 문렬(文烈) = 勤學好問曰文 忠君慈民曰烈 |
7세 |
종원(宗源) 문간(文簡) |
8세 |
면(勉) 문정(文靖) |
8세 |
우(佑) 문충(文忠) |
10세 |
숭선(崇善) 문숙(文淑) |
12세 |
지(止) 문정(文靖) |
14세 |
위(瑋) 문희(文僖) |
14세 |
현(玹) 문간(文簡) |
17세 |
방준(邦俊) 문강(文康) |
6세 |
천선(千善) 양정(良定) |
7세 |
손주(孫柱) 경혜(景惠) |
7세 |
천보(天保) 소의(昭懿) |
8세 |
원(瑗) 경질(景質) = 由義而濟曰景 名實不爽曰質 |
8세 |
조동(祖同) 양공(良恭) = 溫良好樂曰良 敬事奉上曰恭 |
8세 |
준(俊) 충정(忠靖) |
8세 |
수산(壽山) 소간(昭簡) |
8세 |
경공(景恭) 양도(良度) |
9세 |
순(純) 정숙(靖肅) |
11세 |
승(勝) 탁경(卓景) |
12세 |
침(琛) 공평(恭平) |
12세 |
당(瑭) 정민(貞愍) |
14세 |
치화(致和) 소절(昭節) |
14세 |
홍국(弘國) 충현(忠顯) |
22세 |
몽상(夢詳) 충익(忠翼) |
<순흥안씨(順興安氏) 안향(安珦)의 후손에 관하여>
고려 신종조(神宗朝)에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고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追封)된 안자미(安子美)를 시조로 하는 순흥안씨는 그의 첫째아들 안영유(安永儒), 둘째아들 안영린(安永麟), 셋째아들 안영화(安永和)를 파조로 하는 3파로 크게 대별됩니다. 안영유의 후손을 보통 일파(一派), 안영린의 후손을 이파(二派), 안영화의 후손을 삼파(三派)라고 칭합니다. 또 현재도 족보를 삼파가 각각 달리 간행하고 있습니다.
안향(安珦)은 이중 안영유의 후손으로 일파(一派)에 해당합니다. 안향(安珦)은 순흥안씨 4세손이며 안우기(安于器)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안우기는 안목(安牧)과 안신(安愼) 두아들을 두었고 안목은 안원숭(安元崇), 안원형(安元衡), 안원린(安元璘)을 두었으며 안신은 안훈(安勳), 안정(安貞), 안익(安益)을 두었습니다.
순흥안씨 7세손인 안원숭(安元崇)은 안원(安瑗), 안조동(安祖同), 안수(安垂)라는 아들을 두었고 안원형(安元衡)은 안면(安勉)이라는 아들을, 안원린(安元璘)은 안우(安祐), 안예(安禮), 안도(安堵)라는 세아들을 두었습니다.
안신의 첫째아들인 안훈(安勳)은 후손이 없으며, 둘째아들인 안정(安貞)은 안익(安益), 안우세(安遇世)라는 아들을 두었고, 셋째아들인 안경(安璟)은 안주(安輳), 안후(安후)라는 두아들을 두었습니다.
안원숭의 첫째아들인 안원은 안종약(安從約), 안종례(安從禮), 안종의(安從義), 안종염(安從廉), 안종신(安從信), 안종검(安從儉)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안조동(安祖同)은 안금강(安金剛), 안인강(安仁剛), 안의강(安義剛), 안종강(安從剛)을, 안수(安垂)는 아들 안미로(安彌老)를 두었습니다. 안면(安勉)은 안노생(安魯生), 안정생(安挺生)을 두었고, 안우(安祐)는 안현(安顯)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며 안예(安禮)는 안홍기(安鴻起)를, 안도(安堵)는 안경(安經), 안건(安乾), 안곤(安坤)을 두었습니다.
안정의 첫째아들 안익(安益)은 후손이 없으며, 둘째아들인 안우세는 안보해(安保海)를, 안경의 첫째아들 안주(安輳)는 후손이 없고, 둘째아들인 안후(安후)는 안지(安祉)를 두었습니다.
특히 순흥안씨 9세손인 안종약(安從約)은 안구(安玖), 안경(安璟) 안수(安琇), 안리(安理) 라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에서도 안구(安玖), 안경(安璟) 후손에서 두드러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상기(上記)한 내용은 안향(安珦) 후손들의 간략한 계보였습니다.
순흥안씨 일파(一派)에서 역사속의 인물들은 7세손이었던 안원숭(安元崇), 그리고 그의 손자인 안종약(安從約)의 후손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안원숭의 증손자인 안경(安璟)은 다섯아들을 두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 5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영광을 지녔는데 그 이름은 안중후(安重厚)/안근후(安槿厚)/안관후(安寬厚)/안돈후(安敦厚)/안인후(安仁厚)였다. 그러나 안인후가 무과로 급제하였기 때문에 순수하게 문과급제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조선시대 들어서 전의이씨(全義李氏)와 광주이씨(廣州李氏)에 이어 세 번째로 다섯명의 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안돈후의 아들인 안당(安瑭)은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였고, 안당의 세아들 안처겸(安處謙)/안처함(安處함)/안처근(安處謹)은 1519년 현량과시(賢良科試)에 동시에 올랐다. 비록 천거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3형제가 동시에 급제하는 진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이는 후에 영천이씨(永川李氏)의 이덕홍(李德弘)의 세아들인 이강(李강), 이립(李립), 이모(李慕) 형제에 의해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천거(薦擧)형식이 아닌 문과시험이었던 1615년(광해군 07)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서 이들 세형제가 나란히 동방급제하는 대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안종약(安從約)의 손자인 안지귀(安知歸)는 대사성(大司成), 안지귀의 아들인 안침(安琛)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안인후(安仁厚)의 증손자 안위(安瑋)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안위의 동생인 안현(安玹)은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안향(安珦)의 계보>
안자미(安子美: 순흥안씨시조)▶ 안영유(安永儒)▶ 안부(安孚)▶ 안향(安珦)
<우의정을 지낸 순흥안씨 12세손 안당(安瑭)의 계보>
안자미(安子美: 순흥안씨시조)▶ 안영유(安永儒)▶ 안부(安孚)▶ 안향(安珦)▶ 안우기(安于器)▶ 안목(安牧)▶ 안원숭(安元崇)▶ 안원(安瑗)▶ 안종약(安從約)▶ 안경(安璟)▶ 안돈후(安敦厚)▶ 안당(安瑭:右議政)▶ 안처겸(安處謙)/안처함(安處함)/안처근(安處謹)
가문을 빛낸 선조
안 향(安珦)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고려의 명신, 학자. 초명은 유, 자는 사온, 호는 회헌 주자학의 태두인 향은 영유의 손자인데, 고려 원종때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올라 도첨의중찬에 이르렸으며, 교육발전을 위해 섬학전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등 유학진흥에 힘써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 우탁 등의 석학이 배출되어 이제현, 이색 등에 계성되었으며 다시 권근,
변계량 등으로 유학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 내려왔다. 특히, 안향을 제
향하는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알려졌으며 이어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이 세워져 사림의 근거지로 발전되어 왔다. 시호는 문성
안우기(安于器)
?-1329(충숙왕 16) 고려의 문신. 향의 아들 문과에 급제후 국학좨주 우
부승지. 밀직부사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을 거쳐 검교찬성사, 판전의사
사, 상호군에 오르고 순평군에 봉해졌다.
안 축(安軸)
1287(충렬왕 13)-1348(충목왕 4) 고려의 문신. 자는 당지, 호는 근재 문
과에 급제, 금주사록, 사헌규정, 단양부 주부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그곳 요양로 개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
임하지 않고 고려에 돌아와 첨의찬성사로서 판정치도감사, 감춘추관사
등을 지내셨으며, 민지의 편년강목을 개찬하고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
안 원(安瑗)
1346(충목왕 2)-1411(태종 11) 고려. 조선의 문신으로 공민왕23년 문과
에 급제하여 공조전서, 형조판서, 좌부대언, 지신사를 지냈으며, 조선개
국 초 우군 동지총제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고명, 인장
를 받아왔으며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판한성부사와 개성유후사 유후로
서 동서강등처 병마절도사를 지내셨다. 시호는 경질
안창호(安昌浩)
1878(고종 15)-1938 독립운동가. 교육가 호는 도산 1899년 강서에 점진
학교 설립, 1902년 도미, 재미교포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공립협회 창설,
1907년 귀국 평양 대성학교 정주 오산학교 설립, 1909년 박중화 최남
선 김좌진 이동녕 등과 청년학우회 결성, 1912년 미국에서 해외동포를
총망라한 대한인 국민총회 조직, 또한 LA에 청년학우회의 후신으로 흥
사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셨으며. 3.1운동후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무총리서리, 노동총판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여
안중근(安重根)
1879(고종 16)-1910 조선의 의사(義士), 독립운동가 1908년 대한의군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군사령의 직책으로 의병군을 이
끄셨으며, 1909년 만주 하르빈 역에서 일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
문(이또 히로부미)를 살해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셨으며 1910년 여순감
옥에서 사형되셨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여
안창남(安昌男)
1900(광무 4)-1930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익태(安益泰)
1905(광무9)-1965 작곡가. 지휘자 1936년 애국가 작곡하셨으며 생전에
영국의 로이얼 필하모니, 이탈리아의 로마 교향악단을 비롯 각국의 유
명한 2백여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세계적 명성을 떨쳤다. 1957년 문화
포상과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셨다.
순흥안씨 정열(貞烈) 및 열녀(烈女)...충효절의 여인들
우리 순흥안씨는 800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가문을 빛낸 선조가 많았고 근세에 와서도 독립운동과 나라의 건국에 빛나는 행적을 남긴 인물이 많았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뿌리가 있는 훌륭한 선조님들이 우리 가문의 종규와 가훈을 잘 지키면서 그 정신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문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순흥안씨의 여인들은 출가하여서도 유가(儒家)의 가문에서의 기풍(氣風)을 잃지 않고 실천한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전형적인 모범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세태와는 동떨어진것 같지만 가문을 일으키고 모범을 보인 널리 알려진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우리 순흥안씨의 여인들을 살펴보자
1. 진양강씨 강희맹(姜希孟)의 순흥안씨 부인
대사헌공(大司憲公)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은 문장의 대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강희맹의 부인이다.
성종(成宗)은 호가 사숙재(私叔齎)인 공의 글을 모아 문집으로 발간하도록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였는데 그 문집에 여인으로서 처음으로 여사(女師)로 불리었던 정경부인의 행장이 실려있다.
원자(元子) 연산군(燕山君)이 어렸을때 심한 중병을 앓자, 왕실에서는 법도 있는 집에 옮겨 낫게 한다는 관례에 따라 후덕한 안씨 부인이 있는 이 대부송(大夫松)의 집에 원자를 보내도록 하였다. 안씨 부인은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고 잘 돌보아서 어린 연산군을 쾌유시켰고, 이후 여러 차례 개구쟁이 연산군의 위기를 슬기와 지혜로써 구해 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노비가 울면서 달려와 연산군이 실꾸리를 삼켜 기도(氣道)가 막혀 숨을 못 쉰다고 했다.
이에 “아기를 눕히면 삼킨 실꾸리가 더 깊이 들어 갈 것이니 아이를 일으키라”하고서 연산군의 발을 잡고 거꾸로 세워 어린이의 궁둥이를 힘껏 갈겼다.
어린아이는 너무도 아파 “으악”하고 울면서 실꾸리를 토해 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지(機智)는 솔로몬왕의 지혜(知慧)보다 더 훌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슬하에는 6남5녀를 두었는데 우의정(右議政) 강귀손(姜龜孫) 같은 큰 인물을 길러 내기도 했으며 지금도 강씨 집안에서는 가장 우러러 받드는 할머니라 추앙(推仰)받고 있다 한다.
강희맹도 인품과 학식이 출중했지만, 그의 내자인 안씨 부인 또한 명성이 남다른 바가 있었다고 전한다.
2. 효열부 안씨실록
부인의 성은 안씨요 본관은 순흥이니 회헌선생의 후손 홍련(洪蓮)의 딸이다.
을축년 4월23일에 출생하였는데 품성이 단정하고 동지가 안상하여 부가(婦家)에 있을때 부터 효우(孝友)가 지극하고 음식과 바느질을 부지런히 배워 현숙(賢淑)의 칭(稱)이 일찍부터 향리(鄕里)에 저명(著名)하더니 나이 16세에 흥성(興城) 장교현(張敎鉉)의 홍수(홍수)에게 시집왔다. 장(張)씨 또한 고려 명상(名相) 충숙공 연우(延祐)의 후인(後人)으로 조선 문과로 중흔대부 영광군수 휘 헌(諱軒)의 후예(後裔)이다.
부인의 시집은 빈한하였으나 효로써 섬기기를 다하고 항상 조용하고 온화하여 시끄러움이 없고 사람들이 형제간의 말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나이 26세에 부군이 불의에 해를 당하자 낮에는 노동으로 밤에는 바느질하여 호구(糊口)를 마련하고 아들은 의방(義方)으로 가르치고 딸은 정열로 가르치어 가정을 보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의 아들 평식(平植)이 극초하여 어미의 명을 어긴적이 없으며 안면(顔面)의 표정만 보아 말씀이 없어도 알아듣고 형용하지 않아도 이를 볼지 아는지라. 가난하여 능히 삼생의 봉양은 하지 못하나 어머님 마음을 평안(平安)케 애쓰니 몸과 마음을 바쳐 모시는 자라 할 것이라.
<흥성장씨 효자 효열부>
3. 안씨(安氏)
열녀안씨(烈女安氏):1666(현종 7, 병오)~1694(숙종 18, 갑술).
본관 순흥(順興). 류(柳)?의 증손부. 류하시(柳夏時)의 자부. 류석정(柳錫井)의 처(妻).
27세에 상부(喪夫)를 하여 3년 상이 끝난 뒤, 식사를 끊고 부군(夫君)의 뒤를 따라 순절(殉節)함.
그 후 이 사실이 조정(朝廷)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내려짐.
▣참고:류씨 문중자료
4. 순흥안씨(順興安氏)
장성(長城) 서문봉(徐文鳳) 임난시 남편과 동시 순절, 명정, 증(贈) 정부인(貞夫人)
영광군지(靈光郡誌(1923年행)
5.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 1444)
조선 제4대 세종의 비(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모친으로 영의정을 지낸 안효공(安孝公) 심온(沈溫, ? - 1418)의 배위(配位)이다.
청송심씨(靑松沈氏)인 안효공(安孝公)에게 출가하여 장녀 소헌왕후를 비롯한 6명의 딸과 아들 3형제의 모두 9남매를 출산했고, 세종대왕의 부부인(府夫人)으로서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교육에 헌신했다.
부인이 세종 26년(1444) 11월 24일에 별세하자 사위인 세종의 주선으로 용인시 수지면 이의리에 예장(禮葬)했다가, 세조 13년(1467) 5월 3일 왕명으로 이곳에 천장(遷葬)되었다.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6. 안씨(安氏)
적(籍)은 순흥(順興)으로 안고의(安高義)의 딸이며 담양(潭陽) 전병호(田炳昊)의 처다.
남편 병에 항상 목욕재계하고 하느님께 빌었으나 구하지 못하고 상(喪)을 당함에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장사를 치루고 예를 한 다음 1개월 후에 남자아기를 낳아 대를 이어놓고 순절(殉節)한 열여(烈女)이다.
<울진군지>
7. 안씨(安氏)
본관은 순흥(順興), 영양 천씨(英陽千氏) 천문천(千門天)의 처인데 남편(男便)이 병을 심하게 앓을 때, 고사리 나물을 먹고 싶다고 하니 때는 이미 눈이 온 겨울이요 물도 얼었건만 얼음을 밟고 수십리를 가더니 홀연히 바위틈에 고사리 나물이 있어서 손으로 뜯어다가 반찬을 해드렸으며 남편의 상을 당하여 함께 죽고자 하다가 의지할 곳 없는 뒷일을 생각하고 마음을 돌려 부지런히 길쌈하며 자손들을 잘 교도하여 마침내 가정(家庭)을 일으켰다.
표창(表彰)을 받았다.
삼척의 인물 『三陟郡誌(1985, 삼척군)
8. 안씨(安氏)
효부안씨(孝婦安氏):생몰년 미상.
본관 순흥(順興). 최진구(崔鎭九)의 처. 시부가 안질로 고생하자 매번 입으로 눈을 빨았음.
친정 제사(祭祀)를 마치고 돌아오다 범이 꿩을 던져주자 병으로 기력이 쇠한 시부(媤父)에게 공양(供養)하자 기력이 회복됨. 정표가 내려짐.
참고:嶠南誌(교남지)
9. 안씨(安氏)
적(籍)은 순흥으로 유현(儒賢) 유(裕)의 후(後)요, 근석(瑾錫)의 딸이니, 효자 절강 팽기홍(彭淇洪)의 처(妻)다.
남편이 병들어 백약이 무효하니, 하늘에 빌어 나로 대신케 해 달라고 하였고, 지성으로 치성하니 꿈에 양약을 얻어 효과를 보았다.
조선환여승람(창원) ■貞烈
10. 순흥안씨
음성읍에서 괴산군 불정면으로 가는 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평곡리 약물재마을에 맛배 지붕목조기와집이며 정문에는 현판이 아니라 비석이 있다.
이 약현 부락에는 선조 30년(1607) 이경립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순흥안씨 가문에서 부인을 맞아들여 단란하게 살며, 학문에도 정진하여 성균관 진사의 벼슬을 하였으나 유행하던 천연두에 걸려 병석에 눞게 되었다. 정성껏 수발하였으나 남편은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윈 과부가 되었으나 태기가 있어 남편을 따라 가지 못하고 5개월만에 유복자를 낳게 되었다.
시부모를 섬기며 남편의 탈상 3년을 마치자 아기에게 "어미는 죄가 많아 아버지를 여위었으니 네 아버지를 따라가겠다. 부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한다.
그후 숙종대(肅宗代)에 이 사실이 알려져 왕명에 의해 열녀정려가 세워졌다.
묘소는 충주시 산척 면 송강리에 있으며, 유복자 이상현은 후에 공조참의가 되어 널리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지금의 비각은 1903년 3월 개축하여 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碑文> 성균진사경주이경립처순흥안씨열녀지문
11. 안씨(安氏)
순흥인 노명광(盧明光)의 아내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남편이 죽자 종상(終祥)한 저녁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정려(旌閭)되었다.
창녕군지(인물)
12. 효부 안씨 선행장(孝婦 安氏 善行狀)
효부의 성은 안씨요, 본관은 순흥이니 고려말 문성공 회헌선생 유(안향)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성품이 정숙하였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 뜻을 거스름이 없었다.
성인이 되어 동래 정상현(아버님의 옛 이름)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미 시아버님은 돌아가셧고, 시어머님만 홀로 계셨다.
시댁은 대대로 문한과 덕행을 지키고, 규방의 법도가 엄숙한 집안이었다.
안씨는 부군의 뜻을 받들어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으며 시어머님이 말씀하신 바는 일이 어렵고 쉬움을 가리지 않고 다만 받들어 순종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았다.
신묘년(1951년)에 시어머님이 우연히 눈이 흐릿해지는 병환이 들어 밝고 어두움을 구분하지 못하여 일년 남짓만에 고질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설사병까지 겹쳐 가을 겨울의 밤에는 더욱 심하여졌다.
효부가 업고 안아 뒷간에 인도한 것이 하룻밤에도 때로는 수십번이 넘었지만 조금도 싫어하거나 게을리 하는 모양이 없었다. 씻고 닦아 더러움없이 해드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혔으며, 온화한 안색으로 시어머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으로 늘 하늘에 기도하기를 "바라건대 우리 시어머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요" 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논 고동 달인 즙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때는 찬바람 부는 겨울이라, 논 고동을 구하러 집을 나섰으나 시냇물이 얼어붙어 손을 담글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이에 효부는 소매를 걷고 맨발로 얼음을 깨어 진흙을 퍼내었는데, 열손가락이 얼어 터져 피가 나왔지만 몇 움큼의 고동은 구할 수가 있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화롯불에 달여 즙을 내어서 눈에 넣어 드렸다. 이렇게 하기를 몇 개월이 지나 시어머님의 눈이 다시 밝아지고 설사 또한 따라 멈추었다.
뒷날 시어머님이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자 슬피 울며 삼년간 빈소에 아침저녁으로 진지 올리는 상식예절을 생시에 모시던 것과 다름없이 하였다.
이때 부군이 어버이를 위하여 좋은 묘 자리를 구하기를 늘 바랐지만,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효부가 신명께 자나 깨나 축원하니, 어느날 꿈에 시어머님이 현몽하여 말씀하시길, "네 정성이 가상하구나! 00봉 아래는 정남방으로 봉우리가 둥글게 둘러져있다. 가까운 바위 밑은 조금 평탄하여 나뭇꾼과 나물캐는 아낙이 휴식처로 삼는 곳인데 그곳이 바로 해당되는 혈이다" 라고 하였다.
깨어나 생각해 보니 눈에 선하여 이른 아침에 부군께 고하고 곧바로 가르킨 그곳으로 가보았더니 정녕 똑같았던 바, 조금의 의심함도 없이 마침내 안장할 곳을 정하게 되었다. 효성이 하늘에 타고나고 신명을 감동시킨 사람이 아니고는 어찌 이처럼 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시숙부가 연로하여 앞을 못보게 되었는데 의원이 이르기를, "미꾸라지 피를 눈에 넣는것이 아주 좋다"고 했다. 그때도 마침 추운 엄동이었지만 효부는 미꾸라지를 구하고자 전에 시어머님을 위해 고동을 구할때와 똑같이 하였고, 날마다 눈에 넣어 드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시숙부 모시는 정성에 이웃사람들이 감탄하여 누차에 걸쳐 상을 주려고 하였으나, 효부가 이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오호라! 이제 삼강오륜이 썩어 없어지고 사람이 짐승처럼 편하여 모두가 효도할 줄을 모른다.
안씨와 같은 특별한 효성과 아름다운 행실은 지금 세상에서는 듣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또한 옛날에도 많이 없었다.
나는 가까이 살며 익히 들어왔으니, 털끝만큼의 속임도 없이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여 뒷날 풍속과 교화를 두터이 하고자 하는 사람이 선행의 자료를 모을 때를 대비하고자 한다.
* 동미문집(東湄文集)에 실린 어머님(효부 순흥 안씨)의 선행장
13. 순흥안씨(順興安氏)
순흥안씨(順興安氏)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의 후손 안학묵(安學默)의 딸이고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봉하(金鳳河)의 처다.
10대가 종가 며느리로 들어와서 시부모를 모실 때에는 효로하고 남편을 공경할 때는 예로써 하였다.
시모는 돌아가고 시부는 살아서 78세때에 며느리 안씨는 75세에도 조석으로 상식과 초하루 보름의 차례를 친히 참여하니 모두가 그들의 효행을 극찬했다.
부모없는 조카 남매를 자기 소생처럼 키운 공도 있다.
<서천군지>
14. 최규민 처 순흥안씨 효열비(崔圭敏 妻 順興安氏 孝烈碑)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운천리에 있는 순흥안씨의 효행과 열행을 기린 효열비(孝烈碑)는
효열부 순흥안씨를 기리는 비로 1898년(무술년)에 지방의 유림과 최찬호·최종락 등 집안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운천리 운천부락 포실 소류지 길 옆 언덕에 남향으로 서있는 비의 제목은 ‘유인순흥안씨효열표창비(孺人順興安氏孝烈表彰碑)’로, 비문은 유춘형(柳春馨)이 짓고, 안정원(安鼎元)이 썼으며 새긴 사람은 알 수 없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주최씨 집안으로 시집온 순흥안씨는 30세가 되기 전에 남편인 최규민과 사별하였다.
그 후 시어머니 김씨 부인이 중풍으로 몸져눕자 순흥안씨는 약 8년간 시어머니 김씨의 손발이 되어 정성껏 모셨다. 이러한 순흥안씨의 효성에 감복하였던지 집에서 키우던 늙은 고양이가 시어머니께 봉양할 생선과 고기를 항상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순흥안씨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지방의 사림(士林)들이 모두 한뜻으로 효열실행록(孝行實行錄)을 상부에 올려 덕행표창명령장(德行表彰命令狀)을 받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주위에 붉은 벽돌로 담을 쌓아 비를 보호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중풍이 든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순흥안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은 운천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참고문헌]
• 『진주지명사』(진주문화원, 1996)
15. 남정소의 처 안씨(南廷召의 妻 安氏)
조선시대의 열여(烈女)로 선무랑(宣武郞, 조선시대 종6품의 문관 품계) 남정소(南廷召)의 부인이다.
진주 원당촌에 살았다.
지조가 뛰어나 마을에는 정문(旌門)을 내려주었으며, 『진양지(晋陽誌)』 권3 「열녀조(烈女條) 」에 이름이 실렸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열부(烈婦)로 사인(士人) 남상검(南尙儉)의 아내요, 학생 안계호(安季琥)의 딸이다.
나이 19세에 지아비의 상을 당하자 머리를 베고 귀를 끊어서 관 속에 드리고서 뒤를 이을 자식이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결국은 음식을 끊고 따라 죽었다.
순흥안씨 과거(문과) 합격자 명단(조선시대)
조선시대에서는 804회의 문과가 실시되었고, 총 926개의 본관성씨 15,147명의 합격자를 냈다.
시험의 종류는 개시(改試), 고성춘시(高城春試), 구현과(求賢科), 기로응제시(耆老應製試), 기로정시(耆老庭試), 등준시(登俊試), 명경별시(明經別試), 발영시(拔英試), 별시(別試), 별시2(別試), 별시3(別試), 별시4(別試), 비천당문과(丕闡堂文科), 식년시(式年試), 알성시(謁聖試), 여주별시(驪州別試), 전시(殿試), 정시(庭試), 정시2(庭試), 정시3(庭試), 중시(重試), 증광시(增廣試), 진현시(進賢試), 추장시(秋場試), 춘당대시(春塘臺試), 춘당대시응제시(春塘臺試應製試), 춘시(春試), 충량과(忠良科), 친시(親試), 탁영시(擢英試), 탕평정시(蕩平庭試), 평안도도과(平安道道科), 평안도문과(平安道文科), 평안도영의과(平安道永義科), 평양별시(平壤別試), 함경도도과(咸鏡道道科), 함경도별시(咸鏡道別試), 현량과(賢良科), 희희과(餙喜科) 등이 있다.
◆ 문과에서 순흥(順興) 안(安)씨는 120명의 합격자를 냈다.
순흥안씨는 4형제의 문과급제자가 있는데 세종조때 시조로부터 11세이신 안관후(安寬厚), 안중후(安重厚), 안근후(安謹厚), 안돈후(安敦厚) 형제 이며 3형제 문과급제자로는 시조로부터 13세이신 안처겸(安處謙) 안처함(安處諴) 안처근(安處謹) 형제가 있다.
또한 5명의 장원급제자가 있다.
안구(安玖) - - -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위
안수기(安脩己) - - -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9위
안숭선(安崇善) - - 1392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장원(壯元)]위
안질(安質) - - -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9위
안지귀(安知歸) - - -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16위
안관후(安寬厚) - - 1417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1위
안중후(安重厚) - - - 친시(親試) 정과(丁科) 3위
안근후(安謹厚) - - - 평양별시(平壤別試) 삼등(三等) 9위
안돈후(安敦厚) - - - 평양별시(平壤別試) 삼등(三等) 11위
안호(安瑚) - - 1437 고성춘시(高城春試) 일등(一等) 2위
안침(安琛) - - 1445 고성춘시(高城春試) 이등(二等) 3위
안임(安琳) - - -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乙科) 3위
안당(安瑭) - - 1461 친시(親試) 병과(丙科) 2위
안만철(安萬哲) - - -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
안기(安璣) - - 1451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
안처선(安處善) - - - 별시(別試) 을과(乙科) 1위
안처성(安處誠) - - 147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안수량(安秀良) - - -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
안처순(安處順) - - 1492 별시(別試) 병과(丙科) 16위
안처근(安處謹) - - 1490 현량과(賢良科) 병과(丙科) 2위
안정(安珽) - - 1494 현량과(賢良科) 병과(丙科) 4위
안처겸(安處謙) - - 1486 현량과(賢良科) 병과(丙科) 5위
안처함(安處諴) - - 1488 현량과(賢良科) 병과(丙科) 10위
안현(安玹) - - 1501 별시(別試) 을과(乙科) 2위
안위(安瑋) - - 1491 별시(別試) 병과(丙科) 14위
안수(安琇) - - -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
안수량(安秀良) - - - 중시(重試) 을과(乙科) 1위
안여지(安汝止) - - -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4위
안공신(安公信) - - -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
안함(安馠) - - 1504 별시(別試) 병과(丙科) 5위
안명세(安名世) - - 1518 별시(別試) 병과(丙科) 12위
안수(安璲) - - 1521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6위
안해(安海) - - -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6위
안종도(安宗道) - - 1522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
안자유(安自裕) - - 1516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
안공신(安公信) - - - 중시(重試) 병과(丙科) 1위
안관(安寬) - - 153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
안경빈(安敬賓) - - 1528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0위
안지(安祉) - - 1522 정시(庭試) 병과(丙科) 3위
안전(安佺) - - 153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위
안제(安霽) - - 1538 별시(別試) 병과(丙科) 17위
안희(安熹) - - 1551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
안담수(安聃壽) - - 1552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4위
안경(安璥) - - 156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
안욱(安頊) - - 1581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
안헌민(安獻民) - - 1597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
안명로(安命老) - - 1620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2위
안숙(安塾) - - 1624 정시(庭試) 병과(丙科) 1위
안한규(安漢珪) - - 1626 별시(別試) 병과(丙科) 9위
안식(安烒) - - 163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위
안후(安垕) - - 1636 정시(庭試) 병과(丙科) 3위
안규(安圭) - - 163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위
안여악(安如岳) - - 164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3위
안건지(安健之) - - 1646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
안시상(安時相) - - 1657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1위
안연석(安鍊石) - - 1662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3위
안성(安晟) - - 168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
안중필(安重弼) - - 1659 정시(庭試) 병과(丙科) 3위
안세갑(安世甲) - - 1693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7위
안성시(安聖時) - - 168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0위
안경운(安慶運) - - 1683 정시2(庭試) 병과(丙科) 10위
안명학(安鳴鶴) - - 1698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
안복준(安復駿) - - 1698 별시2(別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안정인(安正仁) - - 170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위
안도겸(安道謙) - - 169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7위
안택중(安宅重) - - 1695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30위
안집(安?) - - 1703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
안극효(安克孝) - - 1699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안정택(安正宅) - - 171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안관제(安寬濟) - - 171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
안이권(安以權) - - 1739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위
안성빈(安聖彬) - - 1732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34위
안정현(安廷玹) - - 173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
안중권(安中權) - - 173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5위
안대제(安大濟) - - 1722 정시2(庭試) 을과(乙科) 2위
안석윤(安錫胤) - - 1720 정시2(庭試) 병과(丙科) 4위
안임권(安任權) - - 1749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2위
안집(安?) - - - 등준시(登俊試) 을과(乙科) 3위
안제원(安濟元) - - 1749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위
안매권(安邁權) - - 175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
안봉래(安鳳來) - - 172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
안경심(安經心) - - 174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
안중묵(安重默) - - 1741 별시(別試) 병과(丙科) 4위
안정선(安廷善) - - 1766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2위
안경묵(安敬默) - - 1756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6위
안익겸(安益謙) - - 1766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
안유(安裕) - - 177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
안이정(安以鼎) - - 1766 별시(別試) 병과(丙科) 36위
안상묵(安尙默) - - 1763 별시(別試) 병과(丙科) 4위
안형진(安亨鎭) - - 1784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
안급인(安?仁) - - 1772 별시(別試) 을과(乙科) 1위
안윤경(安允璟) - - 1783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4위
안국태(安國泰) - - 1765 정시(庭試) 병과(丙科) 6위
안윤항(安允沆) - - 1798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1위
안윤중(安允中) - - 1805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8위
안정순(安正淳) - - 1810 정시(庭試) 병과(丙科) 2위
안윤시(安潤蓍) - - 1788 정시(庭試) 병과(丙科) 18위
안영풍(安永豊) - - 1808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0위
안국진(安國鎭) - - 1802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4위
안염진(安念鎭) - - 182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5위
안치묵(安致默) - - 1826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3위
안재린(安在麟) - - 1820 별시2(別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안시협(安時協) - - 1811 별시2(別試) 병과(丙科) 9위
안교희(安敎喜) - - 1824 정시(庭試) 병과(丙科) 13위
안익희(安益熙) - - 1798 별시(別試) 병과(丙科) 14위
안윤정(安允錠) - - 180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
안기영(安驥泳) - - 1819 정시(庭試) 병과(丙科) 13위
안익풍(安翊豊) - - 1830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33위
안익량(安翊良) - - 1836 정시(庭試) 병과(丙科) 5위
안병탁(安秉鐸) - - 1838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
안종원(安鍾元) - - 1848 별시(別試) 병과(丙科) 4위
안염신(安念信) - - 1842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위
안창범(安昌範) - - 1836 별시(別試) 병과(丙科) 5위
안종면(安鍾冕) - - 1846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5위
안병건(安炳乾) - - 1869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4위
안규식(安圭植) - - 1871 함경도도과(咸鏡道道科) 병과(丙科) 9위
안기원(安基元) - - 1877 별시3(別試) 병과(丙科) 12위
안형진(安衡鎭) - - 1859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위
안정간(安廷侃) - - 1846 별시3(別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안필호(安弼鎬) - - 1869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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