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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家門)인 이유!

무량청정1 2014. 11. 29. 11:02

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家門)인 이유!

우리나라에는 2000년도 기준으로 총 727개의 성씨(姓氏)가 있다고 한다.

이중에는 토착성씨(土着姓氏)가 285개이고 귀화하면서 새로 만들어진 외국인의 성(姓)이 토착 한국인 성씨보다 1.5배 많은 442개이다.

한국인 5명 가운데 1명은 김(金)씨이고 이(李) 박(朴) 최(崔)씨 등 상위 10대 성(姓)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64.1%나 된다.

우리 안씨는 17번째인 638.000명으로 그중 순흥안씨가 468,827명이며 이중에서 괴산군 감물면 175명, 경남 합천군 청덕면 168명이 집단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순흥안씨는 고려(高麗) 신종(神宗)때에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시고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으로 추봉 받으신 안자미(安子美) 시조(始祖)께서 당시 흥녕(興寧-오늘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거주(1170년-1180년)하게 된 후, 그 후손들이 그곳에 살게 되어 관향(貫鄕)으로 정함으로써 본관(本貫)이 순흥(順興)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순흥안씨는 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순흥안씨는 1546년 처음으로 족보(族譜)를 문희공(文僖公) 안현(安玹) 선조께서 만들었는데 그 서문(序文)에서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시조(始祖) 이전의 가첩(家牒)이 전해 내려온 것이 없어서 기록을 다 하지 못하니 이런 점이 오늘날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지금 수보(修譜)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할 것인가.....]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역사는 기록과 유물에 의하여 논(論) 하는 것인데 시조 이전에도 선조가 계셨을 터인데 이를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안자미 시조께서는 삼형제(영유 永儒, 영린 永麟, 영화 永和)를 두셨는데 그 자손들이 800여년의 긴 세월동안 조상을 잘 섬기고 친족끼리 화목하게 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에도 각계 각층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우리 순흥안씨가 이조시대(李朝時代)에서는 6대성(六大姓 - 이.김.최.안.정.박)으로 불리어 왔는데 이는 수(數)가 많아서가 아니라 안향(安向-문성공 文成公), 안문개(安文凱-문의공 文懿公), 안축(安軸-문정공 文貞公), 안보(安輔-문경공 文敬公) 선조와 같은 훌륭하신 선조님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유가(儒家)의 종가(宗家)로써 학자와 선비의 가문으로서 충효절의와 애국과 애민정신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으로서 민족개화(民族開化)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숭조목족(崇祖睦族)하는 모범된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유가(儒家)의 종가(宗家)

순흥안씨 4세인 안향 선조께서는 1243년 순흥에서 태어나서 1260년 고려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상주판관(尙州判官-郡守)를 거쳐 좌승지(左承旨) 삼사좌사(三司左事)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 계림부윤(鷄林府尹) 첨의시량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지내신 분인데 유학제거사(儒學堤擧司)로 있을 때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가셨을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껴가지고 오심으로써 주자학(朱子學)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 하셨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고 장학제도(獎學制度)를 마련하는 등 유학의 중흥을 도모하여 백성을 교화(敎化)하는데 심혈을 기우리심으로써 도학지조(道學之祖)라 불리우게 되었다.

따라서 안향 선조께서는 동방성현(東方聖賢) 18인중의 한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되셨고 지금의 모든 향교에 모셔져 있으며 공자 및 주자와 안자(安文成公)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고 하여 현인(賢人)으로 칭송하고 있으며 전국 각지의 많은 사당(祠堂)에서도 배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안향선조에 대하여 평한 내용을 보면 중국 곡부의 공자 후손 직할 관청인 공부(孔府)에서 공식적으로 안자(安子)로 의결해 높였으며 이는 중국의 성현(聖賢)들인 공자, 주자와 같이 자자(子字)가 붙여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안향선조만이 자자(子字)가붙여진 유일한 인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공자 종손이 직접 안자사당에 안자묘(安子廟)라고 쓴 현판을 보냈으며 또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총독이 직접 안자묘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통치 수단의 한 방법이었겠으나, 그 대표적 인물로 안향을 선정해 황해도 종가까지 방문했던 것으로 현재 종손의 선친이 갓을 쓰고 안자묘를 참배한 사이토 총독 일행과 기념촬영을 한 사진도 남아 있다.


또한 퇴계 이황은 소수서원에 제사하면서, ‘안향 선생은 그 공이 학교에 있어 길이 유종(儒宗)이 되었다’고 기렸으며, 나라에 청원하여 왕(王)의 친필 액자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청음 김상헌은 ‘우리 유도(儒道)에 길이 공을 끼쳤다’고 했고, 택당 이식은 ‘해동유종(海東儒宗)’이라고 하였으며, 도암 이재는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추앙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역대 국왕은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태종(太宗)은 안향이 학문을 일으키고 학교를 설립한 것은 백대(百代)의 왕이 본받을 만한 것이라 했고, 영조는 사제문(賜祭文)에서 ‘백세종사(百世宗師)요 해동부자(海東夫子)’라고 했고 고종(高宗)은 학문과 도덕이 백세의 유종(儒宗)이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선조 안향을 유학의 조종(祖宗)이며 후진양성에 지대한 공을 끼친 인물로 인정하는 데에 이견이 없었던 사실이다.


조선조(朝鮮朝)가 개국되자 안향선조가 들여 온 성리학을 국가이념(國家理念)으로 삼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학지조(理學之祖)이며 문묘(文廟)에 배향되신 안향선생의 안문(安門)을 윗 자리에 올려 놓았다.


이조 태종(太宗)이 성균관(成均館)에 가서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말씀하시기를 “---안향의 후손들을 대대로 등용하고 비록 서자라 할지라도 천역(賤役)에 속하게 하지 말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라(교왈안향흥학설교백왕가범보공지전당급묘예기자손수얼영물속천역적손즉세세견복록용동서반(敎曰安珦興學設敎百王可範報功之典當及苗裔其子孫雖孼永勿屬賤役嫡孫則世世復錄用東西班)”고 하였으며 여러 임금들의 어록(語錄)에서도 이를 고증(考證)하고 있다.


이와같은 선조를 모신 우리 순흥안씨는 무릇 유가(儒家)의 종가(宗家)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仁)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 도덕의 실천을 주장한 공자로부터 주자에 이르는 유학의 정통을 동방에 있게 한 가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려조(高麗朝)가 불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면 이조(李朝)는 유교(儒敎)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조가 유교를 정치의 이념으로 삼게 된 것은 안향(安向)선조를 비롯한 선조들이 유학을 크게 진흥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유가의 종가 자손답게 일상생활에서는 인륜(人倫)과 도덕(道德)을 생각하면서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며 예의바른 생활로 가정을 다스리고 믿음으로서 친구를 사귀며 참되게 살아야 할 것이다.


2. 학자(학자)와 선비의 가문

예로부터 세분의 왕비(王妃)가 나온 가문은 한분의 정승(政丞)이 나온 가문만 못하고 세분의 정승이 나온 가문은 한분의 선생(先生)이 나온 가문만 못하다 라는 말이 전해왔다.



우리 순흥안씨야 말로 안향선조이래 계속하여 대를 이어 문자(文字)시호를 받은 선조들이 줄을 이어 모두 심오한 학문과 높은 도덕으로 우리 가문을 6대성의 하나로 올려놓은 것이다.



또한 10대(代)이상을 계속해서한대(代)도 거르지 않고 당상관(堂上官)이상의 벼슬을 하는가 하면 3대를 내려 부원군(府院君), 그리고 5대를 내려 대제학을 함으로써 삼수훈봉(三受勳封) 오전문형(五典文衡)의 보기 드문 명문가(名文家)로 고려조와 이조조를 통하여 유가의 대표적인 가문이 되었다.



특히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선조의 학풍을 이은 선조는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선조이며 특히 안축선조는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대가로 보배적인 글을 남긴 아름다운 시상(詩想)의 시인이기도 하다.

안지(安止)선조는 대제학으로 그 유명한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 하셨고 안방준(安邦俊-文康公)선조는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셨고 함안의 안관(安灌-聚友亭)선조도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학자와 선비를 배출하였고 안종원(安宗源-7세 文簡公)선조께서 남겨주신 가훈(家訓) 10조를 우리 가문에게 전해 주셨다.

우리는 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스스로가 배워야하고 자손들을 가르키는데 힘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유가(儒家)의 유자(儒字)는 선비유자이다. 유가의 종가집에서 태어난 우리는 당연히 선비가문에서 태어난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선비의 기풍이 확립된 것은 안향선조께서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들여온 후에 유학(儒學)이 진흥되고 많은 학자가 배출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안향선조의 교육사상은 흥학양현(興學養賢)의 교육이념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으로 요약된다.

교육목표의 특징은 신념을 체계화한 일용윤리(日用倫理)에 있었으며 충(忠), 효(孝), 예(禮), 신(信), 성(誠)의 기본 실천 윤리가 생활덕목이었다.


그리고 주자는 선지후행(先知後行) 사상인데 반하여 안향선조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사상으로서 이(理). 기(氣)를 탐구하는 존양궁리(存養窮理)의 성리학의 유풍을 새롭게 진작시켜, 조선시대의 민족사상과 유교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조선유학사의 전개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안향선조는 주자학의 이념속에서 민족생존의 이념을 확립하고, [재상의 직분은 인재교육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宰相之職 莫先於敎育人才)]의 교육정책과 그 사상은 후일에 조선 서원교육의 시발점으로 발전하였고 국가최고 사학기관인 소수의 교육정신으로 계승됨으로써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백운동 서원이 소수사원으로 사액(賜額)이 되면서 관학보다 서원 중심의 사학이 발전함으로써 조선의 성리학은 그 진리가 크게 고양되고 꽃을 피우게 하여 오히려 중국을 능가하는 학문에 이르렀다.


조선 중엽인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원 중심의 사학 융성으로 성리학의 사상 및 철학적 논리가 최고 절정을 이룩하였다.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의 유묵(遺墨)중에 견위수명견이사의(見危授命見利思義)라는 글이 있다. 즉 선비는 나라의 위급함을 당하면 목숨을 바치며 눈앞의 이(利)를 보면 의(義)를 먼저 생각하라 하는 것이다.

안의사가 옥중에서 일본인들의 끈질긴 유혹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선비정신의 발로(發露)였다고 본다.


충북 괴산의 계담서원(桂潭書院)에 배향된 안명세(14세 安明世-한림공 翰林公) 선조는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왕에 대한 바른 기록을 썼는데 이를 반대파가 모함해서 문초를 받게 되었는데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었고 당시 31세의 안명세 사관은 사형장에 끌려 나가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는 것은 역시 불의에 항거하면서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선비정신에 의한 것이라 본다.


또한 같은 계담서원에 배향된 안술(17세 安述-세마공 洗馬公)선조는 병자호란때 성균관장의(成均館長의)로 있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청(靑)과의 화친 반대의 상소를 올렸고 낙향후에는 후진교육에 전념했다.

낙향후 진사(進士)로 후진을 가르키고 있을 때 세자비(世子妃)의 간택이 있어 공(公)의 따님이 물망에 올랐다.

그때 시골의 진사밖에 안되는 내가 어찌 임금과 감히 사돈을 맺을 수 있겠는가?하고 따님에게 궁중에 가면 왼손으로 식사를 하라고 비밀히 일러 보냈고 따님은 그 뜻을 따랐다.

궁중에서는 모든 점이 세자비로 충분한데 다만 한가지 왼손잡이가 되어 할 수 없이 간택에서 제외 되었으니 우리 선조님들은 자기 분수를 바로 알고 행동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훌륭하신 선조님들을 모신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어찌 자기 몸을 바르게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기 집안을 잘 다스리고 학자와 선비의 가문으로서 유가의 종가집 자손다운 처세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안향선조는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문하에는 이름난 여섯 학자가 있어 육군자라고 해 후손들이 추앙해 마지않고 있다. 육군자는 국재 권보(菊齋 權溥), 역동 우탁(易東 禹卓), 동암 이진(東庵 李瑱),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 매운당 이조년(梅雲堂 李兆年), 덕재 신천(德齋 辛蕆) 등을 일컫는데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이 국재 권보의 사위며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향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향선조를 비롯한 이들 육군자는 음성 도통사에 배향되고 있다.

음성 도통사는 공자(孔子), 주자(朱子)의 사상과 도학을 계승 발전시킨 안문성공(安 文成公)의 정신과 유학을 충실히 실천 수범한 수제자 권국재(權菊薺)선생으로 이어져 고려 3은(3은)인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에 이어 퇴계(退溪) 율곡과 같은 대유학자(大儒學者)를 배출하였고 우리나라 유학을 발전시킨 큰 줄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공자, 주자, 안향선조등 성현을 주벽으로 안 문성공의 문인인 6군자에 노당 추적(露堂 秋適)과 근재 안축(謹齋 安軸), 경재 안보(敬齋 安輔) 두선조를 포함해서 함께 배향하고 있다.

도통사는 그 말뜻이 도학(道學)의 법통(法統) 즉 정통(正統)을 받들어 모신 사당(祠堂)으로 우리 순흥안문의 선조가 3명씩이나 한곳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우리 가문이 얼마나 훌륭한 가문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다.

 

 

순흥안씨(順興安氏)가 훌륭한 가문인 이유!(2)

주세붕(周世鵬)선생은 순흥안씨 가문을 충효우제청풍지풍(忠孝友悌淸風之豊)의 가문이라고 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해왔고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선조들이 많았으며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과 선정(善政)을 베풀어 양반이 지배하던 당시의 계급사회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으로 백성과 더불어 사는 생활태도로 일관했고 청렴하게 살아 오셨다.

또한 민족개화(民族改化)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조가 많았다. 정말 자랑스런 가문이다.

1.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애국의 가문

유교의 근본은 충(忠)과 효(孝)인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타의 가문에 못지않게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해왔고 충절(忠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선조님들이 너무나 많았다.

소수서원을 창건한 주세붕(周世鵬-당시 풍기군수)선생은 소수서원을 창건한 2년후인 1546년 우리 선조들이 사시던 마을을 찾아 그 마을의 한 우물옆에 사현정비(四賢井碑)를 세웠다.

그 우물은 안석(安碩-문경공) 선조와 그의 아들 안축(安軸-문정공), 안보(安輔-문경공), 안집(安輯-제주공)의 4부자가 잡수시던 우물로서 이우물물을 드시고 4부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인(賢人)이 되셨다는 말을 들은 주세붕 군수는 이를 확인하고 그곳에 비석을 세웠는데(현재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그 비문에 우리 순흥안씨가문을 충효우제청풍지풍(忠孝友悌淸風之豊)의 가문이라고 썼다.

우리가문에서는 고려조와 이조를 통하여 충신 55분 그리고 효자효부(孝子孝婦)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배출 되었다.

▶ 고려의 충신(忠臣) 안우(8세 安祐-문충공)선조는 고려때 안주군민만호부(安州郡民萬戶府)의 도만호(都萬戶)로 있을때 4만에 달하는 홍건적이 침범했을때 서경(西京)까지 적의 손에 들어갈 위급한 상태에서 죽기로 싸워 적을 격퇴시킨 큰 공을 세움으로서 추충절의정난공신오성군(推忠節義定亂功臣 鰲城君)를 제수 받은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또 20만 대군을 몰아 쳐들어와 죽기로 싸워 이를 물리치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평소 공의 전공을 시시하던 역신 김용(金鏞)일파에게 전승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문에 들어서자마자 무참히도 피살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후에는 나라에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이조에 와서 이태조(李太祖)는 숭위전(崇位殿-고려 태종 등을 모신 사당)을 짓고 이에 고려 충신으로 복지겸(卜智謙), 안우(安祐), 정몽주(鄭夢周) 등 16인을 배향했는데 고려 500년동안의 충신 16명중 우리 안우선조가 들어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

▶ 임진왜란때도 관직에 있었거나 또는 재야에 있으면서 종군(從軍)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선조가 많았고 또한 의병(義兵)을 일으켜 목숨을 나라에 바친 선조들도 참으로 많았다.

예를 들면 안신갑(安信甲-초계군수), 안위(安衛-거제현감), 안진(安璡-절충장군), 안의손(安義孫-의령부사), 안치화(安致和-아산현감), 안황(安璜-선전관 의병) 안홍국(安弘國-보성군수)선조 등 그 외에도 많은 선조들이 왜적과 싸우면서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특히 보성군수로 있던 안홍국(安弘國-충현공)선조는 이순신장군의 발탁으로 그 휘하에서 늘 선봉장으로 전투에 참여 했고 이순신장군을 대리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임진왜란하면 이순신장군이 너무나도 유명하여 우리 선조의 이 장렬한 죽음 애국의 충절을 잘 모르고 있다.

정유재란때에 왜적과 싸우다가 전함(戰艦)위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셨으나 당시 총지휘관이었던 원균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다.

{원균은 사실대로 보고하기 싫어서 다만[온종일 싸우다 죽다]라고만 보고하였다. 이렇게 시장(諡狀-전황보고 문서)에 쓰여져 있다.}

후의 기록인 조선왕조 실록(현종 8년)에 의하면 [정유년에 보성 군수(寶城郡守)에 제수되어 통영 중군(統營中軍)이 되어 주사(舟師)를 총괄하여 다스리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앞장서서 왜적에게 대항하였다.

6월에 왜적과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워 배 한 척의 군졸을 거느리고 수십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는, 마침내 탄환에 맞아 죽으니, 당시 나이가 43세였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충열이 이순신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의 사적(事蹟)이 《황명통기(皇明通紀)-명나라 황실의 기록》 및 《종신록(從信錄)-명나라 종군기록》·《만력동정기(萬曆東征紀)-명나라 군사기록》에 실려 있다.

호남의 기사(奇士) 임준(林峻)이 안홍국을 위하여 전을 짓기를 ‘외로운 군사로 곧장 돌진하여 죽음을 맹세코 힘껏 싸워서 여러 차례 왜적의 배를 격파하였다.

적탄에 맞아서는 활에다 화살을 잰 채 뱃전에 기대어 죽었는데, 노기가 발발하여 적은 그가 죽었는지조차 몰라서 배를 보전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였다.]

오히려 명나라 기록인 《황명통기(皇明通紀)》 및 《종신록(從信錄)》·《만력동정기(萬曆東征紀)》의 기록을 보면 [왜선 수십척이 여러번 바다를 건너와 부산 가덕 안골포에 숨어 있다가 조총을 비오듯 쏘아 안홍국(安弘國)을 죽이고서야 마음 놓고 양산, 옹천 등지까지 전쟁지역을 넓혔다.]라고 했으니 6,7년동안 싸움에 우리나라 장병의 죽음을 허다히 보아온 명나라 사람들이 특별하게 죽은 안홍국장군의 전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으니 이로써 안홍국선조가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이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추증되고 숙종(肅宗) 17년에는 충현공(忠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와 보성의 정충사(旌忠祠)에 배향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훌륭하신 선조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자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 경남 함안에는 삼강비(三綱碑)가 서있다. 이 삼강비의 내용은 나라에 충성을 다한 충(忠)과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효(孝)와 그리고 정절을 지킨 렬(烈)에 대한 내용을 담은 비(碑)이다.

이 비는 안유(15세 安瑜) 선조가(家)에 대한 것으로 아버님(瑜) 상을 마치고 임란 이듬해 덕유산으로 숙부(安璜)를 찾아가다가 정진(鼎津) 나루터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님이 정절(貞節)을 위하여 자진(自盡)하였다.

몽량(夢良 15세), 몽윤(夢尹 11세), 몽구(夢丘 7세) 3형제는 덕유산에 가서 의병에 참여시켜줄 것을 숙부님에게 간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홍의(紅衣-곽재우)장군에게 가서 그들의 뜻을 고하였더니 그들의 충(忠)과 의(義)를 장하게 여기고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기록했다.

이들 3형제는 매번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정유재란때 큰형은 창녕 화왕산(火旺山)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들은 어머님의 원수를 갚았으며 왕업(王業)을 도와 중흥(中興)을 시켰으므로 충(忠), 효(孝), 열(烈)을 다했기에 삼강비(三綱碑)를 세워 후세인에게 귀감(龜鑑)을 삼았다.

2. 애민정신(애민정신)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

▶ 안향(4세 安向-문성공)선조께서 주자학을 도입하신 것은 유학을 진흥시켜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것이고 바른 정치를 하려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데 있었다.

당시 고려는 불교국가에다 미신까지 믿는 시대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많아 안향선조께서는 무교(巫敎)의 타파에 앞장서셨으며 우민상세(憂民傷世) 하면서 선정을 베푸셨다.

선조께서 상주판관(尙州判官-군수)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회는 전화(戰禍)로 인하여 생계를 잃고 불교와 무교의 신앙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유독, 상주고을은 일찍부터 무교가 성행하여 그때 합천(陜川)지방으로부터 그곳까지 돌아다니면서 신(神)을 빙자하여 주민을 괴롭히는 무당 세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어느 고을에서도 뒤탈이 있을까봐 겁이나서 이들을 다스르지 못했다.

그 무당들은 산신령의 딸이라 자칭하며 마치 사람의 길흉(길흉)을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게 하여 사람들을 현옥시켰다.

안향선조는 이것은 입술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뱃속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복화술(複話術)임을 간파하고 이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이제 상주고을은 망한다. 3년동안 한 해가 들것이다. 괴질이 번진다....]등 별별 협박 공갈을 했으나 안향선조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되었다.

어느 고을에서도 뒤탈이 무서워 해결하지 못한 것을 젊은 판관(군수) 안향선조가 해결한 것이다.

이것은 오작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무당에 현옥되는 사람이 있는데 근 750년전에 미신을 타파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안축(6세 安軸-문정공)선조는 존무사(存撫使)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었을 때 가시는 곳마다 정성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위문하고 무마 하였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이르러서 시(詩)를 남겼다.

후에 그때의 시만을 모아 발간한 것이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시집(詩集)인데 그 시에는 선조의 애민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시집의 서문(序文)은 정당문학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썼는데 그 일부를 보면 [풍월을 읖조린것과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 그린것이 진실로 옛사람에 양보할 것이 없도록 훌륭하다.....감동하고 분개하여 지은 작품들은 풍속의 마땅함과 마땅하지 아니함과 백성의 기쁨과 근심등에 관계되는 것이 열에 아홉이다. 이것을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슬프게 한다. 아! 누가 안축(安軸) 이전에 이렇게 읊어던가!....] 이렇게 쓰여있다.

▶ 안종원(7세 安宗源)선조는 고려말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고 권세를 부릴때 공을 아끼는 분이 신돈을 찾아가 인사를 하면 더 좋은 자리로 승진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신돈에게 찾아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결국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좌천이 되었다.

선조께서는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올바르게 사시는 성품이라 강릉에 계시는 동안 은혜로운 정책을 펴서 백성을 친자식 같이 사랑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러나 강릉부사 마저도 그만두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강릉의 백성들은 공의 은덕을 잊을 수 없어 살아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당(祠堂)을 짓고 화상(畵像)을 걸어 놓고 흠모했다.

이것이 만고(萬古)에 예가 드믄 생사당(生祠堂)인 것으로 공의 정성과 청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사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 안현(14세 安玹-문희공)선조는 경상감사로 계실 때 순흥안씨 족보를 처음 간행하셨으며 좌의정(左議政)까지 지내신 청백리(淸白吏)이시다.

공께서는 세왕조(三代王朝)에 걸쳐서 올바르게 나라일을 보셨고 백성을 위한 치적이 많았고 또한 청렴한 관직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셨으며 세 번이나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지금의 서울시 삼청동(三淸洞)은 세 번이나 청백리로 선출된 분이 사셔서 삼청동이라고 동명(洞名)이 생겼다는 설(說)도 있으며 국무총리 공관내의 바위(岩)에는 안씨지기(安氏之基)라고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그곳이 안현선조가 사시던 터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생사당(生祠堂), 청백리(淸白吏), 삼청동(三淸洞)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남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깨끗한 생활로 남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봉사(奉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안순(9세 安純-정숙공)선조는 이조 세종대왕때 8년간이나 호조판서(戶曹判書)를 하신 분으로써 이조실록세종조(李朝實錄世宗條)에 무려 202번이나 공의 정책건의, 행적등이 실려있다.

공의 애민(愛民)과 관련된 일화로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재직하던 때에 궁녀 한명이 죄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태조는 당시 대사헌이던 조박(趙璞)에게 그 궁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조박은 공에게 곧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공은 “사헌부는 형관이 아니며, 더구나 그 사람의 죄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처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박은 명령대로 할 것을 그에게 요구하였으나,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니 우선 유사(有司)에 명하여 먼저 심문부터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그 궁녀는 무죄(無罪)로 밝혀져 죽음을 면했다.

이러한 일화가 암시하듯이 공은 강직한 인물이었으며 하찮은 인명 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고 신중을 기한 선조의 애민의 뜻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공이 53세때(1423년)에는 함경도에 큰 흉년(凶年)이 들자 세종대왕은 판서급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구호코자 했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어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공을 특별히 기용하여 함경도에 가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셨으며 67세(1437년)때에는 충청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도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가 되어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 하였다.

공은 비록 종(奴-노예)이라도 질병이나 상사(喪事)가 나면 힘을 기울여 돕는 자비심의 소유자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이외에도 많은 선조님들이 청렴한 생활로써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다 같이 더불어 사는 데 본을 보인 선조들이 많다. 우리들은 이 선조님들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1. 순흥안씨 가문(家門)


우리나라에는  274개의  성씨(姓氏)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김씨(金氏) 이씨(李氏) 박씨

(朴氏)가 전체 인구의 거의 반(45%)을 차지하

고 있고 우리 안씨(安氏)는 숫자로는 l8번째로

대략 56만 6천명 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순흥안씨가 41만 7천,  죽산(竹山)  안씨가

5 만 3천,  광주(廣州) 안씨가  5만  3천  그리고

나머지가 기타의  안씨(安氏)들  이라고  하는데

탐진(耽律) 안씨와  신죽산 (新竹山)  안씨는  순

흥안씨에서  분파 (分派) 되었기에   순흥안씨는

43만 5천에 달한다고 할 수 있다.


순흥안씨는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에 흥위위

보송별장(興威衛保勝別將 - 正七品)을  지내시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 - 正三品)으로  추봉

(追封) 받으신  안자미(安子美) 시조(始祖)께서 당

시 흥녕( 興寧 -오늘의 慶北 榮州市 順興面)에 사

시게 (1170~1180년) 된  후  그 후손들이 그곳에

주( 定住) 하게 되어  그곳을 관향(貴獅)으로 정

함으로서  본관 (本實 -貫籍이라고도 함) 이  순흥

(順興) 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순흥안씨는 약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순흥안씨는 1546년에 처음

으로  족보 (族諸 - 丙午諸라고 함) 를 당시 경상

감사 (慶尙藍司)로 있던 안현(安珪 -文簡公) 선조

께서 간행 했다.


그 서문 (序文) 에서는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시조 (始祖 - 安子美)  이전의 가첩(家傑)이 전해

내려온 것이 없어서 기록을 다 하지 못하니 이런

점이  오늘날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지금 수보

(修諸)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할 것인가」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릇 역사(歷史)는 기록과 유물(遺物)에 의하는

것인데  시조 이전에도 선조가 계셨을  터인데

이는 알 수가 없다.


안자미 시조께서는 삼형제 장자 영유(永儒), 차자

영인(永麟), 삼자 영화(永和)를 두셨는데  그 자손

들이 면면히 흐르는 800년의  긴 세월  동안 조상

을  잘 섬기고  친족끼리 화목하게 살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에도

각계 각층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우리 순흥안씨가  이조시대(李朝時代) 에는 6대성

(六大姓 -李金崔 安鄭朴)으로 불리어 왔는데 이는

수(數)가  많아서가   아니라  안향(安珦 - 文成公)

안문개 (安文凱  - 文   (壹 +恣) 公 )  안축(安輔 文

貞公)  안보 (安輔 -文敬公)  선조와 같은 훌륭하신

기라성 같은 선조님들이 계셔서 현벌(顯關)의 거성

(巨姓)의  가문으로  부각되었고  특히 우리 안씨는

고려조나  이조조  뿐만 아니라  한말 ( 韓末 ) 에도

안창호(安昌浩 -島山) 선생이나  안중근(安重根)의

사  같은 분을 배출함요로서 더욱 자랑스려운 빛나

는 가운이 되었다.


우리  순홍안씨 가문을 개략적으로 본다면  우리

가문은  유가 (偶家)의   종가(宗家)로서   학자와

선비의  가문으로서  충효절의와 애국과 그 려고

애민정신에 투철한 청렴한가 앞으로서 민족개화

(民族開化 ) 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숭조목록

(崇祖陸族)하는 모범 된 가문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다.

숭조목족 (崇祖睦族)의

 

모범이  된   안씨  가문

 


 800년의  역사 속에서 면면이 내려오면서

우리  순흥 안씨는 어느  가문에  못지않게

조상을 잘 섬기고 친족끼리 화목하게 살아

왔다.


특히 명문가(名門家)답게 조상을 위한 위선

사업(爲先事業)도 많이 해 왔다.

 

 


1. 순흥안씨 종규 (宗規)


우리  순흥안씨  가문에는 순흥안씨 종규(順興

安氏宗規)가 있다.  종규는  명문가의  가풍(家

風)과 법도 (法度)를 지키게 하는 규칙(規則)을

말한다. 따라서 순흥 안씨라면 이 종규를 지켜

야 할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


이 종규는 7 개항으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

현실에는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다만 우리

는 그 정신만을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


그 종규의 내 용을 요약해 보면

(1) 제사를 삼가 받들라 (譯祝)

(2) 사당을 잘 수리 하라 (修宇)

(3) 친척과 화목하라 (陸族)

(4) 창고를 잘 갖추라

    (備塵-제사때 쓰는 제가, 제사용 곡물 등 창고)

(5) 선영에 나무를 심어 무성 케하라

    (養感 -묘소에 식목)

(6) 묘(墓)지기를 잘 보살펴라 (恤墓戶)

(7) 종사 일을 맡은 사람을 신중히 써라(恤任司)


 이  7개항 중 6 개항이 모두 조상을 위한 것이고

제 3항만이  목족에  관한 항목인데 이 항목은 순

흥안씨 가훈(家訓)이라고 해서 우리 일가들이 많

이 모였을 때에 낭독(期讀)을 하기로 한다.

 

 

 

친족끼리 화목하라 (睦族)


「처음에는 한사람 같던 몸이 남처럼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몹씨 통탄할 말이다.  친족이

남처럼 되었다면 그것은 서로 잊어버릴 지경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 같은 귀여운 손자

같은 것인데 어찌 소홀하게 대할 것인가?

 

갈래가 비록 다르더라도 핏줄이 서로 이어지고

사는  곳이  비록 떨어져 있더라도 소식이 서로

아서 1년에 한번이라도 와서 한 뜰에 모이게

되면 효도하고 공경 (恭敬)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니 마땅히 돈독하고 사랑하는데

쓰고 화목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만나고 정성

  대접하고  장점(長點)을  모아 단점(短點)을

보충하고 어려운 것을 밝혀주고 근심스러운 것

을  도와주고  벌어지는 것을 가엾게  생각하고

어리석은 것을 불쌍히 여기고 일가친척을 평등

하게  사랑하고  선조의  지극한 뜻을 받들도록

해서  옛날부터  안씨는  친족 간에 화목하다는

칭찬이 다시 오늘에 들리도록 힘쓰고 또 힘써라」


우리는 종규에 정해진 이 목족에 대한 글을 읽을

때 마다 친족끼리 더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

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 


 안향 (安珦 -文成公)  선조께서  고려 충렬왕  30 년

(1304 년) 대성전(大成願)에  공자상(孔子像)을 봉안

하시고 당시 국학생 (大學生) 에게 내리신 교훈은 바

로  오늘날  우리  자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지켜나가야 할 교훈이기에 이에 그 일부를 기록한다.


유국자제생문 (諭國子諸生文)


성인 (聖人)의   도리(道理)는  일상생활(日常生活)

에서  인륜 도덕의  원리를 잘 지키는데 지나지 않

는다. 아들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孝道) 하고 신

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하며 올바른 예의범절

(禮懷凡節)로  가정을 다스리고 신의(信義)로 벗을

사귀며 자신의 몸가짐을 닦는 데는 반드시 삼가하

고  온갖 일을 해 나가는 데는 반드시 성실할 따름

다.

 

(聖人之道  不過日用倫理  爲子當孝  爲臣當忠 

 禮以制家  信以交朋 修己必敬  立事必誠而己)


지금 도의(道義)가 땅에 떨어졌다고 개단들을 하고

있다.  680여 년 전에 내린 안향(安珦) 선조님의 가

르침을 우선 우리 순흥 안문에 태어난 우리들이 솔

선하여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착실히 실천하므로써 우리 안문은 유가의

종가 학자와  선비의 집안으로 충효절의의 애국

가문 그리고 애민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으로

서  민족개화와  조국독립에 앞장선 자랑스러운

가문에  태어난 자손의 도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 천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모범된

가문으로 발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고려 때의 삼은(三隱)의 한 분인 이색(李構) 선생

은 순흥 안씨의 발전이 무궁하리라

(順興安民世居竹溪之上竹溪之源發於小白山之大水之遠安氏之興其無窮乎) 하였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순흥 안씨는

중원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

(竹溪諸安(*)於玆山之下名振中原) 라고 예언

한 바 있다.

 

-<위의 (*) 속에 들어갈 한자 알림>-

 *(每 + 流 흐를류자에 왼쪽에는 삼수변이 없는 글자임)

   (*) 속의 한자는 미상(未詳)


우리는 자랑스러운 가문에 태어난 긍지를 갖고

위대한  선조님들의  유업을 받들어 그 자손 된

책임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애민정신(愛民精神)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


주세붕(周世鵬) 선생은 우리 가문을 충효우제

청풍지풍(忠孝友悌淸風之風)의 가문이라고 했

음은 전술한 바다.


우리 선조님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감내했고  또한 선정(善政)을 베

풀었다. 양반이 지배하든 당시의 계급사회에서

우리 선조들은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는 투철

한 애민정신으로 백성과 더불어 사는 생활태도

로 일관했고 청렴하게 살아 오셨다.


1. 안향(安珦) 선조와 안축(安軸) 선조의 애민사상


안향(安珦) 선조께서 주자학(朱子學)을 도입하신

것은 유학을 진흥시켜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것

이고  바른  정치를 하려 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데 있었다.


안향 선조께서 얼마나 백성을 걱정하고 사랑했느

냐 하는 것은 그 행적(行績)을 보면 잘 알 수가 있

다.


선조께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憂民未得前涂炭)고 우민상세(憂民傷世)

하면서 선정을 베푸셨다.


공이  상주판관(尙州判官 -郡守)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회는 전화(戰禍)로 인하여 생

를  잃고  불교와 무교(巫敎)의 신앙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유독이 상주 고을은 일찍부터 무교가

성행하여 그때 합천(陜川) 지방으로부터 그곳까

지 돌아다니면서 신(神)을 빙자하여 주민을 괴롭

히는 무당 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그러나 어느 고을

에서도 뒤탈이 있을까봐 겁이 나서 이들을 다스리

지 못했다.


그 무당들은 산신령의 딸이라 자칭하며 마치 사람

의 길흉(吉凶)을 하늘에서 들리는 것 같게 하여 사

들을 현혹시켰다.


안향 선조는 이것은 입술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뱃

속으로부터 소리를 내는 복화술(腹話術) 임을 간

하고 이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이제 상주 고을이 망한다.  3년 동안 한해가

들것이다. 괴질이 번진다.…」는 등 별별 협박 공갈을

했으나 안향 선조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되였다.

어느 고을에서도 뒤탈이 무서워 해결하지 못한 것을 젊

은 판관(郡守) 안향 선조가 해결을 한 것이다.


이것은  공이 오직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무당에 현혹되는 사람이 많

이 있는데  730여 년 전에 미신을 타파했다는 것은

라운 일이다.


그리고  안축 (6世 安軸 -文貞公)  선조는  존무사

(存撫使)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었을 때 이르는 곳

마다 정성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위문하고 무마하

였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이르러서 시(詩)를 지었

다.


후에 그때의 시만을 모아 발간한 것이 관동와주

(關東互注) 라는 시집(詩集)인데 그 시에는 선조

애민사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시집의 서문(序文)은 정당문학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썼는데 그 일부를 보면


    풍월을  읖조린  것과  사물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  진실로  또한 옛 사람에 양보할 것이 없도

록 훌륭하다.  감동하고 분개하여 지은 작품들은 풍

의  마땅함과  마땅하지 아니함과 백성의 기쁨과 근심

등에  관계되는  것이  열에  아홉이다. 이것을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몹시 슬프게 한다.

 

아! 누가 안축(安軸) 이전에 이렇게 읊었던가!

  이렇게 쓰여 있다.


  공의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시

  한수를  이에 소 개 한다.


도를 구해 글 읽었어도 끝내 이룰 것 없어

태평시절 이 행차 스스로 부끄럽다.

다만 우둔함 버리고 실용학문 베풀어

감히 모난 행동으로 헛된 명예 훔치랴

도탄에 빠진 민생 구하기 어렵고

깊이든 나라의 병 생각만도 놀랍네

근심어린 베켓머리 잠은 아니 오는데

누워 듣는 산중의 빗소리 밤이 깊었네


(1330년 개경(開京)을 떠나)

(白嶺驛에서 지은 시 - 原文省略)

 

 

안종원(安宗源 -文簡公) 선조의 선정과 청백리 안현(安玹) 선조


  안종원 (7世 安宗源 ) 선조는 고려말 요송(妖僧)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고 권세를 부릴 때 「지금

찾아가서 인사를  하면 승진(昇進)이 되어 요직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라고 공을 아끼는 분이

권했다.


그러나 공은 「나는 원래 등한하고 게을러서 어떤

세력에 붙고 따르는 것을 하지도 못하오」하고 찾

아가는 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신돈이 세력을 떨칠

때 이것은 대단한 용기인 것이다.


결국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좌천이 되었다.  선조께서는

원래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여 올바르게  하시는 성품이

라 강릉에 계시는 동안 은혜로운 정책을 펴서 백성을 친

자식 같이 사랑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선정(善政)을 베풀

었다.


그러나 미구(未久:오래지 않아)에 강릉(江陵) 부사마저도

그만두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강릉의 백성들은 공의 은덕을 잊을 수 없어 살아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당(祠堂)을 짓고 화상(畵像)을 걸

어 놓고 흠모했다.


이것이 바로 만고(萬古)에 예가 드믄 생사당(生祠堂)인 것

이다. 공의 정성과 청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의 사상이

어떠하였는가를 가히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안현(14世 安泫-文簡公) 선조는 경상감사로 계실 때

우리 순흥안씨 족보를 처음 간행하신 것은 기술한 있다.


 선조는  좌의정(左議政)까지  지내신 청백리(淸白吏) 이시다.

공께서는  세왕조(三代王朝)에  결처서  올바르게  나라 일을

보셨고 백성을 위한 치적이 많았고 또한 청렴한 관직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셨다.


  그래서  세  번이나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었다.

지금의 서울의 삼청동 (三淸洞)은  세 번이나  청백

리로 선출된 분이 사셔서 삼청동이라고 동명(洞名)

이 생겼다는 설(說)도 있다.


 지금  삼청동의 국무총리공관내의 바위(岩)에는

「안씨지기 (安氏之基) 」라고 새겨져 있다고 하

는데 그곳이 안현 선조가 사시던 터가 아닌가 생

각이 된다.


생사당(生祠堂) 청백리 淸白吏) 삼청동(三淸洞)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남을 사랑

할 줄 알아야 하고 깨끗한 생활로 남과 더불어 사

는 사회에서 봉사(奉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이다.

4.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 


 안향 (安珦 -文成公)  선조께서  고려 충렬왕  30 년

(1304 년) 대성전(大成願)에  공자상(孔子像)을 봉안

하시고 당시 국학생 (大學生) 에게 내리신 교훈은 바

로  오늘날  우리  자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지켜나가야 할 교훈이기에 이에 그 일부를 기록한다.


유국자제생문 (諭國子諸生文)


성인 (聖人)의   도리(道理)는  일상생활(日常生活)

에서  인륜 도덕의  원리를 잘 지키는데 지나지 않

는다. 아들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孝道) 하고 신

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충성하며 올바른 예의범절

(禮懷凡節)로  가정을 다스리고 신의(信義)로 벗을

사귀며 자신의 몸가짐을 닦는 데는 반드시 삼가하

고  온갖 일을 해 나가는 데는 반드시 성실할 따름

다.

 

(聖人之道  不過日用倫理  爲子當孝  爲臣當忠 

 禮以制家  信以交朋 修己必敬  立事必誠而己)


지금 도의(道義)가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들을 하고

있다.  680여 년 전에 내린 안향(安珦) 선조님의 가

르침을 우선 우리 순흥 안문에 태어난 우리들이 솔

선하여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착실히 실천하므로써 우리 안문은 유가의

종가 학자와  선비의 집안으로 충효절의의 애국

가문 그리고 애민에 투철한 청렴한 가문으로

서  민족개화와  조국독립에 앞장선 자랑스러운

가문에  태어난 자손의 도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 천족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모범된

가문으로 발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고려 때의 삼은(三隱)의 한 분인 이색(李構) 선생

은 순흥 안씨의 발전이 무궁하리라

(順興安民世居竹溪之上竹溪之源發於小白山之大水之遠安氏之興其無窮乎) 하였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순흥 안씨는

중원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

(竹溪諸安(*)於玆山之下名振中原) 라고 예언

한 바 있다.

 

-<위의 (*) 속에 들어갈 한자 알림>-

 *(每 + 流 흐를류자에 왼쪽에는 삼수변이 없는 글자임)

   (*) 속의 한자는 미상(未詳)


우리는 자랑스러운 가문에 태어난 긍지를 갖고

위대한  선조님들의  유업을 받들어 그 자손 된

책임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유가(孺家)의  종가(宗家 ) 선비가문

 

순흥안씨  4세 (四世)인  안향(安珦  - 文成公)

선조께서는   1243년   순흥에서   태어나셔서

1260년  고려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상주

판관 (尙州判官 -郡 )를  거쳐  좌승지(左承知)

삼사좌사(三司左事)    집현전   태학사(集賢殿

太學士)  계렴부윤(鷄林府尹)  첨의시량찬성사

(僉議 待郞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지내신 분인데  그가 유학제 거사(儒學提擧司)

로 있을 때 왕과 공주(公主)를 호종하여 원(元)

나라에 가셨을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껴가지고 오셨다.


그리하여 주자학(朱子學)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하셨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고 장학제

도(養賢庫)를 마련하는 등 유학의 중흥(中興)을 도

모하여  백성을  교화(敎化) 하는데 심혈을 기우리

심으로써 이 나라의 도학지조(道學之祖)로 불리우

게 되셨다.


따라서 안향(安珦, 文號 文成公) 선조께서는 동방

성현 ( 東方聖賢 ) l8현중의 한분으로 문묘 ( 文願 )

에 배향 ( 配享 ) 되셨고 따라서 지금 전국의 모든 향

교 ( 獅校 ) 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서원(書院) 인

소수서원(紹修書院 -順興所在)에 최초로 배향되신 분

이시다.


이 소수서원에는 후에 안축(安輔 -文貞公 ) 선조와

안보(安輔 文敬公) 선조도 추배되셨고 그후  이  서

원을 설립하신  주세붕(周世爛) 선생도 배향되었다.


그 후  퇴계(退漢)  이황(李慢) 선생이 풍기군수

(豊基郵守)로 재직 시  나라에 청원하여

서원(紹修書院) 이라는  왕 (王)의  친필 액자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

院)이 되었다.


이조의 태종(太宗)은 안문성공-안향(安文成公 -安珦) 이

학문을 일으키고 학교를 설립한 것은 백대(百代)의

왕이  본받을 만한 것(安文成公 興學設敎百王可範)

이다. 라고  말했고  영조(英祖)도 안문성공은 백세

(百世)의  종사(宗師)요 해동(海東)의 부자(夫子 )라

말했고  고종(高宗)께서는  문성공(安珦)은  학문과

도덕(道德)이  백세의  유종(儒宗)이라 하였고 퇴계

이황(李漫)  선생도  안문성공(安文成公)은  백세의

유종(儒宗 )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자리 잡고 있는

연성부(衍聖府)에서  공자(孔子)의  77대손이신

공덕성(孔德成)  선생은 「많은 성인을  모아서

대성한  이는  공자이며  현인을 모아서 대성한

이는  주자( 朱子)이고   공자와   주자를   종사

(宗師)로 하여 동방을 깨우치게 하고 밝게 열어

준  성학자는  안자(安子 -安文成公)이다」라는

찬사와  함께  자(子)라   칭호를   붙여  주셨다.


그래서 안향 선조는 중국의 성현(聖賢) 들인

공자 주자와 같은 자자(子字)가  붙여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안향  선조만이 자자

(子字)가 붙여졌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고려조(高麗朝)가 불교(佛敎)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면   이조(李朝)는   유교(儒敎)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조가

유교를  정치의  이념으로  삼게 된 것은 바로

안향(安珦) 선조를  비롯한  우리  선조님들이

유학을  크게 진흥시킨 데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가 있다.


  즉 인(仁)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 도덕의 실천을

주장한  공자(孔子)로부터  주자(朱子)에  이르는

유학(儒學)의 전통(傳統)을 동방에 있게 한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유가의 종가라고 할 수가  있다.


  여기에 유가의 종가라고 할  수 있는 순흥안씨

노비촌(奴婢村)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기로 한

다.


이태조(李大祖)는  한양(漢陽)으로 천도 하자마자

정치  이념으로  삼은 유교를 기리는 뜻에서 무엇

보다도  먼저  공자를 비롯하여 사현(四賢 - 顔子,

曾子,  子思, 孟子)과 십철(十哲) 육현(六賢 -周子,

程伯子,  程叔子,  邵子,  張子, 朱子)을 모시는 성

균관( 成均館)을 지금의 서울 종로구 명륜동(明倫

洞)에 세웠다.


그래서 그때 이 일대는 관동(館洞)이라 불리워졌다.

태조 6년의 일이다. 고려시대의 유맥(濡脈)을 이었

던 우리 순흥안씨도 한양으로 이사를 했다.


성균관이  이룩되자  제사(祭事)를  자주 올리게  되는데

제물을  장만하는  일 제사의 절차 등을 잘 모르고  있어

우리  순흥안씨 가문에서는 가문에서  거느리고 있던 백

여 명의 노비를 성균관에 받쳐 제사 일을 돌보게 하였다.


따라서 지금의 명륜동 1, 2, 3 가는 이 순흥안씨

노비들의  거주지(居住地)가   되었고   이곳에는

순흥안씨 노비문서가 없으면  들어가서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성균관의  일을  돌보면서 양반들의  자제(子弟)

들을  하숙(下宿)을  시켜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의  요직에 오름으로써 이들은 그 배경과

또  성균관의  제사  일을 도맡아 일을 했었다는 데서 그

위세가  당당했다고 하며 양반이라 할지라도 이들에게는

말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해라」를  못하고 「하게」로

했다는 것이다 .


지금의  대중음식의 하나인「설농탕」은 순흥안씨

노비들이 성균관의 제사 때 제사에 쓰기 위해 잡은

소(牛)의  뼈를 고아 그들의 농사신(農事神)인 선농

(先農)에게   풍년을  빌며  바친 「선농탕(先農湯 ) 」

이 라고 하니 (조선일보 l981. 5. 15자 l2면) 서울에

노비촌(如牌村)을  가졌던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여러면에서 유가의 종가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종가답게 충과 효를 실천함에 있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학자 (學者)의 가문


 예로부터  그 가문(家門)을 볼 때 세 분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보다는  한 분의 정승이 나온 가문을

더 쳤고 세 분의 정승을 배출한 가문보다는 한 분

의 선생 (先生)이 나온 가문을 더 쳤다

(三王妣 不如一政丞 三政丞 不如一先生)고 한다.


우리   순흥안씨는   전술한   안향(安珦)   선조를

비롯하여 안문개(安文凱 -문의공(文懿公) 左政丞

府院君)  선조  안축(安軸  - 文貞公  - 府院君 大

提學)  선조 안보(安輔 -文敬公 -大提學) 선조 등

석학(碩學)을 비롯하여 문자 시호(文字諡號)를 받

은 선조가 18분 이나 되고 문과 합격자(文科合格

者)가 l80분 사마시(司馬試) 합격자가 325분이

나 되고 대제학(大提學)  l7분을 배출했다.


또한  10대를  내려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벼슬을

하는가  하면  타  가문에 유례가 드문 삼수훈봉(三受

勳封) 오전문형(五典文衝 )   즉  3 대를  내려  부원군

(府院君 -正一品 이상 국가유공) 5대를 내려 대제학을

하는 등 학자의 가문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문외시호(文外諡號) 를 받은 선조가 15 분 또한

봉군(封君) 선조가 20분이나 된다.


특히  안향(安珦)  선조의  학풍(學風)을  이은  선조는 안축

(安輔) 선조와  안보(安輔)  선조이며  특히 안축(安軸) 선조

는  관통별곡 (關東別曲)과   죽계별곡  (竹漢別曲)을   남겨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 경기체가 (景鍵體家)의 대가(大家)로

보배적인 글을 남긴 아름다운 시상(詩想)의 시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안지(安止)  선조는   대제학으로  그  유명한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하셨고   안방준(安邦俊 

-文康公)   선조는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셨고  함안의 안권 (13世  安灌

-聚友亨) 선조도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학자와 선비를

배출하였고  또한  안종원(7世 文簡公) 선조께서  남겨

주신 가훈(家訓) l0조(十條)를 우리 가문에 전해주셨다.


우리는 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스스로가

배워야하고  또  자손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애국의 가문

 

유교(儒敎)의 근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충(충)과

효(효)인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 가문은 타의 어

느 가문에 못지 않게 부모에게도 효도하고 나라

에 충성을 다해왔고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

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선조님들이 너무나 많았다. 

 

1. 충효우제(忠孝友悌)의 가문


소수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周世鵬 -당시 豊基

郡守) 선생은  소수서원을   창건한   2년  후인

1546년 우리 선조들이 사시던 마을을 찾아  그

마을의 한 우물 (井) 옆에 사현정비(四賢井陣)를

세웠다 .


그 우물은 안석(安碩 -文敬公) 선조와 그의 아들

안축(安輔 -文貞公) 안보(安輔 -文敬公) 안집(安

輯 -察酒公) 의  4부자가  잡수시던 우물로서 이

우물물을 드시고 4부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현인( 賢人)이 되셨다는 말을 들은 주세붕 군수는

이를  확인하고  그곳에  비석을  세웠는데 (현재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그 비문에 우리 순흥안씨

가문을 충효우제 청풍지풍(忠孝友悌 淸風之風)의

가문이라고 썼다.


우리 가문에서는 고려조와 이조를 통하여 충신

( 忠臣 ) 55분 그리고 효자효부(孝子孝婦)는 헤

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배출 되었다.


그리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友悌) 또한 깨끗한

집안으로서  관직에  있어서는 청렴(淸廉)하였

고  모두가  청빈(淸負)한  생활을 한 가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 민족개화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가문


우리나라  민족개화의  선구자(先騙者)라면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제1로 칠 것

다.  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제1인자를 뽑

는다면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꼽을 것이다.


우리가  늘 부르는 애국가(愛國 歌)를 작곡한

것도 우리 순흥안씨 인 안익태 (安益泰) 선생

이다.  우리 가문은 이와 같이 고려조나 이조

조  뿐만 아니라  근세에 와서도 타 가문에서

아볼  수 없는 큰 인물들을 배출했다. 정말

자랑스러운  가문이다.  여기에서는  몇 분만

개하기로 한다.


1.  민족개화의  선구자  안창호(安昌浩) 선생

  

안창호(26世 安昌浩) 선생은 평남 강서(江西)

태어나셨다.

 

(1878년)선생은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6년  상경하여  구세학 (救世學堂)을  졸업하고

조교(助敎)로 있으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

했다.


l899년 강서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도미하여 교포들을 지도하면서 신체호(申宋浩)

선생등과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민족자결 운동

등을 전개하고 평양(平壞)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그 후 최남선(崔南善) 김좌진(金住鎭) 등과  청년

학우회(靑年 學友會)를  조직하고   북경을  거쳐

블라디보스독으로 갔다가 유럽을 경유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미국에서   대한인 국민총회(大韓人 國民總會)를

조직하는가  하면  또한  홍사단(興土團)을  결성

하고  3·l 운동  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국무총

리  서리  노동총장을 역임하고 독립신문을 창

하는데  관여하고  또한 만주 길림성에서 독립

단체의 행동 통일 을 토의하다 체포되고 1928년

에는 한국독립당을 창당 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

생을  바쳤으며  해방  전  투옥 되었다가 병으로

가석방이  되었으나 조국해방을 보지 못한 채 끝

내  병원에서 타개했다.


 l962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

이 수여되고 그 후 서울시 강남구에 도산공원(島山

公園)이 조성되고 그 공원에 묘소가 이장되어 지금

그곳에 묻혀 있다.


(1) 거짓말을 버리고 참을 사랑하며 진실과 실질       

     을 사랑한다. 무실(務實)

(2) 빈 말보다 실천에 힘쓰며 목표를 향하여 꾸       

     준히 노력한다. 역행(力行)

(3) 작은 얼이나 큰 일이나 온 정성을 다하여 대       

     인관계에 믿음을 지킨다 충의(忠義)

(4) 모든 일에 굳은 의리로 적극적이고 진취적        

     (進取的)이며 개척자적인 창의력을 발휘한        

      다. 용감(勇敢)


이상은 안창호선생이 창설한 홍사단(興士團)의

4 대 강령(網領)이다.  이  강령만  읽어  보아도

그의 인격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 순흥안씨 가문 출신

의 도산공원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개화에 앞장선 분들이 많다.  특히

민족서화가(民族書畵家)의 개척자로서 원숙한 화풍

을 이룬 대가(大家)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安昌男 일본비행사

면허증 6호) 그리고  우리가  늘 부르고 있는 우리 애

국가를 작곡한 세계적인 음악가 안익태(安益泰) 선생

등  많은 민족개화에 앞장선 분들이 참으로 많았으니

이 모두 우리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2. 안중근(安重根) 의사와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조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도히로부미(伊購博文)를 쓰러트

리고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쓴 안중근의사(30世)

에 대해서는 온 국민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여기

서는 지금  독립기념관(獨立紀念館) 정원에 세워진 의

사의  어록비(語錄健)의  비문만을 이에 기록한다.  이

비는  순흥안씨의  유지들이 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

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

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

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이  글은  19101년  2월  15일 여순 감옥에서 안병찬

(安秉讀)  변호사가  안  의사를  면회했을  때   말한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언이다.  서울  남산에

있는 안 의사 기념관 (安義士紀念館)은 일제 때 일본

인들이 세운 신사(神社)를 헐고 그 자리에 세운 기념

관이다.


순흥 안씨의 안 의사의 기념관이 서울의 남산 꼭대

기에서 언제나 서울을 내려다보고 것도 우리

안문의 자랑이 아닐 없다.


그리고 안 의사 외에도 많은 독렵운동가가 있다.

예를 들면 의병을 일으키고 대한청년단 연합회

(大韓춤年團聯合會)를 조직 총재로서 독립단원

을 훈련 시킨 안병찬(安秉讀), 무관학교(武官學

校)를 설립하 려 했던 항일투사 안명근 의사 (安

明根義土)


3.1 운동 후 독립군 사령부를 창설한 안무(安武)

임시정부의 자금책(資金責)으로 눈부신 활약 을

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안희제(安熙濟) 선생


의병장 안규홍(安圭洪) 안병찬(安秉讀 -同名異人)

여류 독립운동가 안경신(安敬信)여사


해방 후 민정장관( 民政長官)을 지낸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선생 일제 암흑기에 조국의 광복

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일한 훌륭한 분들이라고

알만하신 분들은 모두들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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