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순흥안씨 자료

순흥안씨 전의록(傳疑錄)||

무량청정1 2014. 11. 29. 11:01
근래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는 대개 총록에 전의록(傳疑錄)을 싣고 있다. 이것이 처음 정형화 되어 실린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내용은 대부분 이전 족보나 다른 문헌에서 인용한 것이며,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순흥 을유보(1765)의 범례를 인용한 것으로, 내용은 광주안씨 무오보(1738) 별록에 실린 광주안씨 12대 결세계보(광주-순흥 분관계보)를 전재한 것이다.  다음은 순흥 경인보(1830)를 인용한 것으로, 광주 처대공이 충주에서 광주-순흥 분관계보를 등사해온 전말을 간단히 적고, 순흥안씨 중에도 충주에서 유사한 내용이 실린 족보를 보고 등사해 온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죽산안씨동원보로 부터의 인용이라면서 농서이씨설을 적고 있다.
 
순흥안씨들은 시조 자미공 이전의 선대 기록은 아무 것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전의록에 이런 기록을 계속 싣고 있다는 것은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좀더 고증이 필요하다는 정도의 의미이고, 내용 자체를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공식적인 입장이 그 내용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라면 전의록에 실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 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명기하고, 그렇게 보는 이유도 함께 밝히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의록에 대한 순흥 문중의 명확한 입장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전의록의 원문과,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傳疑錄 : 순흥안씨 찬성공파보(1993년)
 
[1] 乙酉譜曰 廣州安氏鼻祖 大將軍邦傑下 舊有缺世 今考其新譜別編 始於大將軍下 繼以 子門下侍中 國信 子門下侍郞 礪仲 子內史侍郞 輔平 子僉議中贊 憲思 子平章事 武成 子參知議事 慶立 子中書令 石昌 子內史令 弼夢 子門下侍中 弘美 以吾始祖 護軍公 書於弘美弟行 而註以順興安氏始祖 以爲得於順興刊板舊譜云 此所謂舊譜迺吾安之所不知者也 若有此舊譜 則何不出於 前後修譜時耶 其言固無稽 其所錄 亦傳疑之例 而旣有刊行文字 恐爲百世之疑 故玆以卞明云
 
[2] 庚寅譜曰 廣州安氏 新譜 密陽板 別錄註卽 安順菴鼎福所著 有曰 廣州安氏自大將軍以下 典農寺尹 以上有缺世 原州宗人處大 往忠州順興安氏外孫金姓人家 見順興安氏刊版舊譜 則亦以廣州君爲始祖 其下系以十二代 屬之于典農寺尹 處大遂謄 送于宗中 宗中諸人 但見其所謄 不敢遽以專信 送宗人信亨 往見處大與之偕 往忠州金姓人家 則順興舊譜 已入於回祿中 其家亦移居 無處更問 今姑別錄 以俟後日云
族祖唐津公羽濟氏世乘亦曰 此舊譜似是丙午前本也 而第吾宗人亦有於忠州吾安氏外孫柳姓士人家得見 其板本所謄 護軍公以上九世而謄來者則此也 忠鄕之有此本審矣 豈前時 譜學不博 未能闡發故耶 廣州安氏之所不敢信者 亦未敢遽信 而姑錄之云 今姑竝記之
 
[3] 竹山安氏同源譜云 有諱李瓊(一諱琬) 中國隴西人 唐憲宗元和二年(新羅哀莊王七年) 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嶽山下 時有廣州人 殺其主以叛 安瓊兄弟 挺身安國 瓊安國 故賜姓安氏 弟璜 以本姓移封固城 安瓊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季花春 新羅景文王三年 甲申外亂 兄弟三人俱有平亂功 王以爲安國之臣 因更名曰 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封竹城君 東方有安氏 自此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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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전의록(傳疑錄)의 번역문은 순흥안씨세보 번역판 (1992)에 실려 있다.
 
전의록 (傳疑錄)

[1] 을유보(乙酉譜, 1765)에, 
“광주 안씨 시조인 대장군 방걸(邦傑)의 아래에 빠져 있는 세대가 있었는데, 이제 그 신보(新譜)의 별편을 상고해보니, 대장군의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인 문하시중 국신(國信)과 아들인 문하시랑 여중(礪中)과 아들인 내사시랑 보평(輔平)과 아들인 첨의중찬 헌사(憲思)와 아들인 평장사 무성(武成)과 아들인 참의지사 경립(慶立)과 아들인 중서령 석창(石昌)과 아들인 내사령 필몽(弼夢)과 아들인 문하시중 홍미(弘美)를 계속 썼으며, 우리 시조인 호군(護軍)공을 홍미의 아우 항렬에 써 놓고는 순흥 안씨의 시조라 주기(註記)하고, 이것을 순흥 안씨의 판각한 구보(舊譜)에서 얻었다 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구보는 우리 안씨는 일찍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구보가 있었다면 어찌 전후에 수보(修譜)할 때 나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 말은 진실로 황당무계하며 그 기록 또한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준례에 불과한데, 이미 간행한 문자가 있으면 백세(百世)에 의심할까 염려되므로 이에 분별하여 밝히는 바이다.”
하였다.
 
[2] 경인(庚寅, 1830)보에 이르기를,
“광주 안씨 신보(新譜)인 밀양판(密陽版) 별록의 주(註)는 바로 안순암정복(安順庵鼎福)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광주 안씨는 시조인 대장군 이하 전농시윤 이상에 빠진 세대가 있었는데, 원주의 종인인 처대(處大)가 충주의 위류면에 사는 순흥 안씨의 외손인 김씨 집안에 가서 순흥 안씨가 간행한 구보(舊譜)를 보니, 또한 광주군(廣州君)을 시조라 하였고, 그 아래에 12 대를 이어 전농시윤에게 소속시켰었다. 처대는 마침내 이것을 등사하여 종중에 보내왔는데, 종중의 여러 사람들은 다만 그 등사한 것만을 보고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여, 종인인 신형(信亨)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처대는 그와 함께 충주에 사는 김씨 집에 가보니, 순흥의 구보는 이미 화재에 불타 없어졌고, 그 집도 이사해 가서 다시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선 별도로 기록해서 후일을 기다리는 바이다.’ 하였으며, 족조(族祖)인 당진공 우제(羽濟)씨의 세보에도 또한 이르기를,  ‘이 구보는 병오보 이전의 본(本)인 듯하다. 다만 우리 종인 중에도 충주에 사는 우리 안씨의 외손인 유씨 집안에서 그 판본에 등사된 호군공 이상 9 세(世)를 얻어 보고는 등사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하였으니, 그렇다면 충주 지방에 이러한 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예전에는 보학이 밝지 못하여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보다.
  광주 안씨들이 감히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것을 우리 또한 그대로 믿을 수 없으므로 우선 기록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아울러 기록하는 바이다.

註) 唐津公(羽濟:21世, 1720-1784) : 初諱德濟字公輔號晩菴肅宗庚子(1720)生甲午聯壁進士乙未叅奉止唐津縣監甲辰卒壽六十五配淑夫人昌寧成氏父說書道亨祖通德郞必升曾祖縣監虎烈外祖文化柳穰○墓白川郡東白楊谷國師峯下癸坐雙墳再從姪僉樞業撰墓誌. 순흥 을유보(1765) 간행을 주관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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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죽산안씨 동원보에 이르기를,
  “휘(諱) 이경(李瓊 一諱는 琬)은 중국 농서 사람이다. 당 헌종 원화 2 년(신라 애장왕 7) 정해년에 그 아우 황(璜)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송악산 아래에 거주하였다. 이때 광주 사람이 그 임금을 죽이고 배반하자, 이경 형제는 분발하여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형 경은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 하여 안씨 성을 하사하였으며, 아우 황은 그대로 본성을 갖고 고성(固城)에 옮겨 봉해졌다. 안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요, 차자는 엽춘(葉春)이요,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신라 경문왕 3 년인 갑신년에 외란이 있었는데,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왕은 나라를 편안히 한 신하라 하여 이름을 고쳐 방준(邦俊)이라 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했으며,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으로 봉하였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였는바, 우리나라에 안씨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였다.
 
순흥안씨 홈페이지의 관련 사안에 대한 언급(http://www.shahn.co.kr/02/02-index-c.htm)
 
속설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이씨(농西李氏)였는데, 서기807년(당나라,헌종2, 신라,애장왕8)에 신라(新羅)로 건너와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定着)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景文王) 때 와서 갑신란(甲申亂)이 일어나자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安자로 (賜姓)하였다. 맏이 지춘( 枝春)은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命)되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둘째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며, 세째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순흥안씨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어 현재 순흥안씨대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