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씨(安氏)성(姓)의 유래(由來)
한국인의 족보 편찬위원회가 편찬한 한국인의 족보에 보면 안씨(安氏)는 문헌상에 10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6본(本)을 제외한 나머지 103본은 미고(未考)이다.
안씨(安氏)의 본성은 이씨(李氏)로서 서기 806년(신라 애장왕 7년)에 당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개성의 송악산밑에 정착한 이원(李瑗)의 아들 3형제가 서기 864년(신라 경문왕 4년)에 왜구를 평정한 공으로 안씨(安氏)를 사성(賜姓) 받았고 큰아들 지춘(枝春)은 방준(邦俊)으로 둘째아들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셋째아들 화춘은 방협(邦俠)으로 각각 개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방준은 죽산군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들은 죽산안씨(竹山安氏)가 되었고 방걸은 광주군에 봉해짐으로써 광주안씨廣州安氏)가 되었다.고 한다.
오류 내용 - 그러나 이원(李瑗)이라는 사람이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허구의 이름이다. - 그러나 경문왕 4년에 왜구와 싸운 역사적 사실이 없다. - 그러나 죽산군(竹山君). 광주군(廣州君).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하였다는데 신라 경문왕 당시에 죽산. 광주. 죽성등의 지명(地名)이 없었고. 신라 당시 일반백성에게 봉군하는 제도 자체가 없었으니 다 거짓이다. - 1700년대 후반에 나기 시작한 농서이씨설이라는 설을 기준으로 만든 안씨성의 유래는 고증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안씨 성(姓)씨의 역사가 아니다. 일반 사회에 유포되었던 설을 성씨의 유래로 표기한 자체가 문제이다. |
순흥안씨는 자미(子美)를 시조로 하였고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와 탐진안씨(耽津安氏)는 순흥안씨에서 분관(分貫)되었다.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와 탐진안씨(耽津安氏)는 순흥안씨와 전혀 관련이 없다. |
또한 위의 안씨들과 세계(세계)를 달리한 태원안씨(太原安氏)가 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순흥안씨는 당나라에서 오신 이씨(李氏)하고는 관련이 없이 시조는 자미(子美)이다 이렇게 쓰여져 있다.
그리고 우리 순흥안씨 족보보다는 198년후인 서기1744년에 발간된 죽산(竹山)안씨 동원보(同源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당(唐)나라의 헌종황제(憲宗皇帝) 원화(元和) 2년인 신라(新羅) 40대 애장왕(哀莊王) 7년에 중국(中國) 농서(籠西) 사람 이경(李瓊) 혹은(원:瑗), 이황(李璜) 형제분이 조선(朝鮮)에 나와서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밑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광주(廣州) 사람들이 성주(城主)를 죽이고 난(亂)을 일으켜 나라가 위태로워 졌을 때 이씨(李氏) 형제가 그 난리를 평정시켰다 한다.
이에 국왕(國王)이 이들을 불러서 나라를 평안(平安)하게 한 공(功)으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치하(致賀)하고 형(兄)인 경(瓊)에게는 안씨(安氏)성을 사성(賜姓)하고 죽산군(竹山君)을 봉(封)함으로서 우리나라에 안씨 성이 있게된 유래이며 동생에게는 이씨(李氏) 성(姓)을 그대로 둔체 고성군(固城君)을 봉(封)하셔서 고성 이씨(固城李氏)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안경(安瓊)은 아드님 셋을 두셨는데 첫째는 지춘(枝春)이요 둘째는 엽춘(葉春), 셋째는 화춘(花春)이었으며 모두 덕(德)과 재주와 용맹(勇猛)이 뛰어났었다 한다.
신라 48년 경문왕(景文王) 3년인 갑신년(甲申年:864년)에 왜구(倭寇)가 난(亂)을 일으켰을 때 이 3형제가 난을 평정하여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공을 높이 사 국왕이 3형제에게 사명(賜名:왕이 이름을 내려주시는일)을 하여 주셨으니 맏분 “지춘”에게는 방준(邦俊)이 라하고 죽산군(竹山君)을 봉(封)했고 둘째분“엽춘”에게는 방걸(邦傑)이라 하고 광주군(廣州君)을 봉(封)했으며 셋째 분에게는 방협(邦俠)이 라하고 죽성군(竹城君)을 봉(封)하셨다고 한다.
조작한 내용 - 그러나 경문왕 3년은 갑신년이 아니라 계미년(癸未年)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 그러나 왜구(倭寇)가 난(亂)을 일의켰다는 역사적 사실이 없다. - 그러나 임금이 안씨성을 사명(賜名)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없다. |
이로써 “방준” 죽산군은 죽산안씨의 시조가 되셨고 “방걸” 광주군은 광주 안씨의 시조가 되셨는데 “방협” 죽산군은 후손이 절세(絶世)되었는지 후손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864년에 죽산안씨가 창성되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1144년동안 인구가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17,357가구 총 56,051명뿐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 순흥안씨의 공식적인 역사가 830여년밖에 안되는데 인구가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14만 5254가구 총 46만 8827명으로 안씨의 73.5%를 차지한다. - 순흥안씨가 압도적으로 많다는것은 순흥안씨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오래된다는 얘기일것이다.(경주김씨 영분공파 9대손 김후덕의 배가 순흥안씨이다. 김의진의 자부. 경순왕 년보를 보면 서기 914년에 별빈 순흥안씨가 子 덕지(德摯)를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흥안씨 시조공(자미)보다 연대가 앞선다. - 순흥안씨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역사적 사실에 의한 시조를 모시고 있다. - 그러나 우리 순흥안씨가 1546년 족보를 만들때 나타나지 않았던 안씨 성의 유래가 1744년 죽산안씨에서 족보를 만들면서 위와 같은 설이 나왔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궁금하다! |
이상의 기록을 볼 때 제일 처음 발간한 우리 순흥안씨의 족보(族譜)에는 안씨의 기원(起源)과 나라에서 성을 내렸다는 사성(賜姓)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우리 순흥안씨가 족보를 간행한지 198년후에 와서 간행된 죽산안씨의 족보에 처음으로 사성(賜姓)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여기에서도 순흥안씨도 사성(賜姓)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믿을만한 기록물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한 우리 순흥안씨는 사성(賜姓) 안씨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2. 순흥안씨의 기원
우리순흥안씨는 고려 신종(神宗)때에 흥위형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군대벼슬) 정7품(正七品)을 지내시고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으로 추봉(追封) 받으신 시조 자미(子美)께서 순흥(順興)에 옮겨 사시게 되어 계속 후손들이 그곳에 정주(定住)하게 됨에 이곳이 관향(貫鄕)으로 정하게 되었고 이분이 곧 우리 순흥안씨의 시조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순흥안씨 후손들은 시조(1세)를 자(子)자 미(美)자 할아버지라고 칭하며 모시고 있다.
그러나 시조께서 언제부터 순흥에 거주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가 없으며 시조(자미. 子美) 이전에도 우리 선대(先代)가 계셨을 터인데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3. 순흥의 연혁 순흥을 고구려때는 급벌산군(及伐山郡),신라 경덕왕때는 급산군(及山郡) 고려초에는 흥주(興州),고려 성종 때는 순정(順政)이라 일컬었고 고려 현종 때는 안동부(安東府)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순안현에 소속되었으며 고려 명종은 이곳에 감무사(監務事)를 두었었다.
고려 충렬왕의 태(胎)가 묻힌 후(1236)년에는 흥녕(興寧)이라 고쳤고 충숙왕의 태(胎)가 묻힌 후(1294년)에는 흥주로 승격하였으며 충목왕의 태가 묻힌 후(1337년)에야 지금의 이름인 순흥(順興)으로 고쳐지고 부(府)로 승격하였다.
근세조선 태종은 이곳에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있었는데 세조 정축년(1457년)에 금성군(錦城君) 유(瑜)가 이곳에 살면서 부사(副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端宗) 복위운동(復位運動)을 꾀하든 일이 사전에 발각된 사건 때문에 부(府)를 폐부(廢府)하여 풍기군(豊基郡)에 예속(隸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계해년(1683년)에 비로소 순흥부로 다시 복원되었다.
죽계(竹溪) 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순흥의 별호(別號)이었다.
4. 순흥안씨의 계파
순흥안씨는 자(子)자 미(美)자 시조 할아버지께서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3형제를 두셨는데 첫째 아드님(永儒) 집이 제1파이고 둘째 아드님(永麟) 집이 제2파이며 셋째 아드님(永和) 집이 제3파이다. 그러므로 순흥안씨라면 누구나 이 3개파중 어느 파에 속해 있는 것인데 우리 집은 제1파 에 속한다.
위의 3계파가 각기 훌륭한 어른이 나타나셔서 몇 개의 계파로 나뉘어졌는데 이를 1, 2, 3파별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나뉘어 볼 수 있다.
1) 제1파의 계파
ㄱ. 파조(派祖) - 시조의 첫째 아드님이신 영유(永儒)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 정2품
ㄴ. 묘소(墓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순흥안씨 선조 묘소중 가장 오래된 묘소임)
ㄷ. 제실(齋室) - 영모암(永慕庵) 묘소를 관리하는 곳
ㄹ. 계파 - 아래와 같이 12개파(個派)가 있다.
계파명 | 파조명 (派祖名) |
세 (世) |
참 고 사 항 |
참찬공파 (參贊公派) |
구(玖) | 10세 | ㅇ.판서공(안종약)의 장남 ㅇ.문과합격 ㅇ.예문관대제학 증직 |
찬성공파 (贊成公派) |
경(璟) | 10세 | ㅇ.판서공(안종약)의 차남 ㅇ.아든님 5명 모두 문과합격 ㅇ.예문관대제학 증직 |
직장공파 (直長公派) |
수(琇) | 10세 | ㅇ.판서공(안종약)의 3남 ㅇ.군자감직장 ㅇ.학행이 당세의 명유(名儒) |
서파공파 (西派公派) |
리(理) | 10세 | ㅇ.판서공(안종약)의 4남 ㅇ.예천군수 ㅇ.두문독서(杜門讀書) |
감찰공파 (監察公派) |
종례(從禮) | 9세 | ㅇ.경질공(안원)의 차남 ㅇ.양주목사 |
첨추공파 (僉樞公派) |
종의(從義) | 9세 | ㅇ.경질공(안원)의 3남 ㅇ.첨지 중추부사 |
도정공파 (都正公派) |
종렴(從廉) | 9세 | ㅇ.경질공(안원)의 4남 ㅇ.도정 |
참판공파 (參判公派) |
종신(從信) | 9세 | ㅇ.경질공(안원)의 5남 ㅇ.가선대부 병조참판 추증 |
참의공파 (參議公派) |
종검(從儉) | 9세 | ㅇ.경질공(안원)의 6남 ㅇ.통정공참의 |
부제학공파 (副提學公派) |
조동(祖同) | 8세 | ㅇ.문혜공(안원숭)의 차남 ㅇ.문과급제 ㅇ.예문관 부제학 ㅇ.도덕과 학문이 회헌선조와 같다하여 왕이 조동이라 사명(사명) ㅇ.시호 양공공(良恭公) |
한림공파 (翰林公派) |
수(垂) | 8세 | ㅇ.문혜공(안원숭)의 3남 ㅇ.문과급제 ㅇ.한림지제고 |
판관공파 (判官公派) |
신(愼) | 6세 | ㅇ.문순공(안우기)의 차남 ㅇ.우사의대부노부 도감판관 |
2) 제2파의 계파
ㄱ. 파조 - 시조의 둘째 아드님이신 영린(永麟) 신기(神騎) 별장 - 정7품
ㄴ. 묘소 - 찾을 수 없음
ㄷ. 제실 - 순흥의 순흥안씨 추원단(追遠壇)에 모시고 있음
(추원단이란 묘대신 석물로 시설하여 놓은 것)
ㄹ. 계파 - 아래와 같이 4개파(個派)가 있다.
계파명 | 파조명 (派祖名) |
세 (世) |
참 고 사 항 |
안원공파 (安原公派) |
처 (處) |
8세 | ㅇ.안원기(안원기)의 아드님 ㅇ.이조판서 ㅇ.봉군, 안원군 ㅇ.청백록에 기록됨 |
충청공파 (忠靖公派) |
준 (俊) |
8세 | ㅇ.경혜공(안손주)의 차남 ㅇ.경상, 충청, 전라도 제찰사 ㅇ.시호 충정공 |
의랑공파 (議郞公派) |
천봉 (天鳳) |
7세 | ㅇ.양정공(안천선)의 차남 ㅇ.예부의랑 |
소의공파 (昭懿公派) |
천보 (天保) |
7세 | ㅇ.양정공(안천선)의 3남 ㅇ.광록대부 및 좌의정 ㅇ.자제인 휘 수산(壽山)이 영의정에 오름 |
3) 제3파의 계파
ㄱ. 파조 - 시조의 셋째 아드님이신 영화(永和) 교서랑(校書郞)
ㄴ. 묘소 - 찾을수 없음
ㄷ. 제실 - 제2파와 마찬가지로 추원단에 모시고 있음
ㄹ. 계파 - 아래와 같이 4개파이며 문정공파는 손자인 양도공(안경공:安景恭)파 종회로
내려오고 있다.
계파명 | 파조명 (派祖名) |
세 (世) |
참 고 사 항 |
문정공파 (文貞公派) |
축 (軸) |
6세 | ㅇ.문경공(안석:安碩)의 차남 ㅇ.문과. 원조문과(文科)합격 ㅇ.정당문학영춘추 관사 ㅇ.우문관 대제학 ㅇ.흥녕 부원군 ㅇ.소수서원 배향(配享) |
좨주공파 (祭酒公派) |
집 (輯) |
6세 | ㅇ.문경공의 4남 ㅇ.보문관 대제학 ㅇ.성균관 좨주(祭酒) ㅇ.봉군. 순흥군(順興君) |
중랑장공파 (中郞將公派) |
을수 (乙壽) |
6세 | ㅇ.문경공의 5남 ㅇ.중랑장(장군의 다음벼슬) |
검교공파 (檢校公派) |
득인 (得仁) |
3세 | ㅇ.교서랑 신기별장의 차남 ㅇ.검교 대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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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안씨성의 유래
삼국시대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姓이 안(安)씨로 세거하는 사람이 있었고, 금석문과 《고려사》 등에 나타나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 기록들을 보면, 명확한 최초의 안씨들은 800년대 후반 신라 말, 고려 초에 경주부(慶州府)의 안강현(安康縣)에 살았던 안강(安康) 안씨, 900년을 전후한 중원부(中原府)에 살았던 충주(忠州) 안씨, 918년 고려개국을 전후한 황해도 동주(洞州,지금의 서흥)를 본관으로 한 동주(洞州) 안씨 등이 있었다.
순흥안씨는 고려 1100년대 중기에 가서야 기록이 나오고 있고, 광주, 죽산 안씨들은 고려 후기에 가서야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설사 고려 초부터 기록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기록이 한동안 지방 세력으로 머물러 찾지 못하고, 중앙 관계로의 진출은 위의 신라 말, 고려 초 안씨들에 비해 상당히 늦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죽산안씨 동원보(竹山安氏同源譜)』라는 것에 이경(李瓊) 일명 완(琬)은 중국 농서(隴西) 사람으로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2년 서기 807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7년 정해년에, 그 아우 황(璜)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개성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살고 있었는데, 이 때 광주(廣州) 사람들이 임금을 죽이고 배반하자, 이경(李瓊) 형제가 분발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다 한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은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공로로, 형 경(瓊)은 안(安「편안안자」)씨 성을 사성(賜姓)하시어 죽산군(竹山君)에 봉 하시었고, 아우 황(璜)은 그대로 본성(本姓) 이 씨를 갖고 고성군(固城君)에 옮겨 봉 해졌다 고한다.
그 후 안경(安瓊)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고, 차자는 엽춘(葉春)이오,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서기 864 신라 경문왕(景文王) 4년 갑신년에 외란(外亂)이 있었는데, 이때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나라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하여 왕은, 그대 어른들은 이미 사성(賜姓)하였으니, 그대들에게 나라를 편안히 하는 신하라 사명(賜名)을 하겠노라 하시고, 이름을 고쳐, 지춘은 방준(邦俊)이라 하여 죽산군(竹山君)에 봉하고,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여 광주군(廣州君)에 봉해 졌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여, 이때부터 안씨 성이 시작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동원보에 의한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논픽션에 의한 짜깁기의 허구라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없던 사실들을 어떻게 고증하고 찾아냈는지를 명확히 밝혀야 하는데 그런 사실이 전혀 없이 가상의 소설속에 전개된 상황극이란 것이다.
순흥안씨 을유보(乙酉譜) 1765년 간행 전의록(傳疑錄)
을유보(乙酉譜)에 전하는 기록에,
중국 농서(隴西) 사람 이경(李瓊)의 아들 3형제 중 차남 엽춘(葉春)이 사성을 받아 광주군에 봉하여 안씨라 하였으니, 광주안씨(廣州安氏)는 신보 별편에 이를 시조(始祖) 대장군(大將軍) 방걸(邦傑)로, 2세 문하시중 국신(國信), 3세 문하시랑 여중(礪中), 4세 내사시랑 보평(輔平), 5세 첨의중찬 헌사(憲思), 6세 평장사 무성(武成), 7세 참지의사 경립(慶立), 8세 중서령 석창(石昌), 9세 내사령 필몽(弼夢), 10세 문하시중 홍미(弘美)를 계속하여 기록하였고, 우리 시조(始祖) 상호군공(上護軍公)을 홍미의 아우 항렬에 기록하여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始祖)라 주기(註記)하고, 이것을 순흥안씨가 판각(板刻)한 구보(舊譜)에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광주안씨는 큰집이고 순흥안씨는 작은 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만일 이들이 말하는 구보에 이러한 기록이 있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우리 순흥안씨는 1546년에 병오보를 창간하였고, 우리 순흥안씨 보다 193년 뒤 1739년에 기미보를 처음 창간한 광주안씨 이였으며, 광주안씨는 또 별편으로 간행한 경인 밀양보 별록 등을 종합하여 1790년에 경술보를 간행하였고, 죽산안씨는 1744년에 초보를 발간하였다.
이렇게 우리 순흥안씨 보다 늦게 수보한 광주안씨 사람들의 말을 믿기 어려운 것은, 어찌 우리 순흥안씨(順興安氏)는 193년이나 먼저 수보(修譜)할 때에 구보(舊譜)나 이러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의 시조(始祖) 호군공 휘 자미(子美) 선조님도 웃 선대(先代)가 계셨음은 틀림이 없으니, 시조 이전의 가첩(家牒)이 전하여 내려온 기록이 전혀 없어 한탄 할 노릇인데, 그 광주안씨(廣州安氏) 사람들의 말은 황당무계한 말로 그 기록 또한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규례(規例)에 불과하다.
이미 광주안씨가 발간한 문자가 간행되어 있으니, 백세에 의심되는 두려움이 있어 혼란을 일으키게 될까 염려되어, 이에 분별하여 전의록을 똑똑히 기록해서 밝히는 바이다. 하였다.
그러나 주의 할 일은
우리 안씨가 중국 당나라에서 온 이 씨 성 이라든가, 또 우리나라에서 성을 사성 받은 안 씨라든가, 광주안씨 에서 분파 되었다든가, 하는 말 등 기록한 일 들을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 될 줄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환부역조(換父易祖)로써 우리 조상(祖上)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시조공(始祖公)의 탄생과 국내 시대상황
시조 호군공 휘 자미(子美)선조님의 탄생 연대에 대하여, 회헌실기 일부 문헌에 남송(南宋) 순희(淳熙) 9년, 1182년 고려 명종 12 임인년에 탄생하신 기록이 있고, 우리 순흥안씨 후손들은 1170~1180년대에 시조공의 탄생 추정을 (근거는 우리 문중에 전해오는 회헌실기에 큰아들인 2세 추밀원부사 휘 영유(永儒)께서 1201년 신종 4년 신유 생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태사공 휘 부(孚)는 1220년 경진 생에, 4세 문성공 휘 향(珦)께서는 1243년 계묘 생으로, 5세 문순공 휘 우기(于器) 선조님은 1265년 을축 생으로 기록이 되어 있음으로 추정한다.) 하고 있다.
1188년 명종 19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김보당의 난, 민란과 반란이 거듭되어 국왕이 실권 없는 혼란의 시기이었으며, 1198년 신종 원년에 시조공이 등사(登仕)하시자 만적(최충헌의 사노비)의 난이 일어났으나 바로 실패하여 끝이 났으며, 1201년 고려 신종 4 신유년에 아들 추밀공 휘 영유(永儒)님이 탄생하시고, 연이어 아들 형제를 탄생시킨 이후에 시조공은 1205년대 희종 조에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하시고 졸 하시자, 후에 증손자 문성공 휘 향(珦)의 귀현(貴顯)으로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追封)되시었다.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창관(創貫) 유래
순흥안씨는 11세기 말엽부터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호군공 휘 자미(子美) 선조님이 최초로 흥주(지금의 순흥)에 정착하시어 아들 3형제를 탄생하시니 장남 추밀공 휘 영유(永儒)는 1파이고, 차남 별장공 휘 영린(永麟)은 2파이며 계자 교서공 영화(永和)는 3파로 형성되어 자미(子美)선조님을 시조(始祖)로 자손이 대대로 세거하시면서 호장(戶長)을 세습하고, 향리에서 사대부 가문으로 발전하고 번창 하여, 그 이후 후손들이 흥주인(興州人 • 安珦,⌈1파 후손 4세⌋), 순정군부인안씨(順政郡夫人安氏 • ⌈2파 후손 4세 成哲의 配⌋), 흥녕인(興寧人 • 安軸, ⌈3파 후손 6세⌋)이라고 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아, 한 자손이 흥주안씨, 순정안씨, 흥녕안씨, 등으로 호칭이 되었다고 있으며, 이에 근거로 고려초에는 순흥을 흥주로 개명하였고, 981년 성종 때에는 순정이라 불렀으며, 1009년대 현종은 안동부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순안현으로 이속시키고, 1171년대 명종은 감무를 두었다.
1275년대 충열왕의 태(胎)를 안치하여 흥녕 현령으로 고치고, 1314년대 충숙왕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흥주사로 승격시켰으며, 1344년대 충목왕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금의 순흥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시키었다.
이렇게 지명 변천으로 보아 순흥에 세거한 후손들이 1348년 이후부터 본관(本貫)을 순흥(順興)으로 개칭 창관(創貫)하여 순흥안씨(順興安氏)가 되였다. 고 한다.
[출처] 안씨(安氏)성(姓)의 유래(由來) (순흥안씨문숙공파) |작성자 치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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