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世 향 (珦)문성공(文成公)
약력(略歷) : (1243 ~ 1306 )
처음 휘(諱)는 유(裕)인데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전보(前譜) 에‘문종(文宗)의 어휘(御諱)를 피하여 세상에서는 다시 처음 휘 로 칭하고 있는데 이번 수보(修譜)할 때에 다시 뒤에 지은 휘인 향(珦) 으로 칭했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자(字)가 사온(士蘊)이라 한다. 고려고종(高宗) 계묘년에 출생 하였으며 고려 원종(元宗) 경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로 치사(致仕)하였다.
배위(配位)는 한남군군부인김씨(漢南郡君夫人金氏)로 부친은 우사간(右司諫)을 지낸 녹연 (綠延)이다. 후배(后配)는 서원군군부인염씨(瑞原郡君夫人廉氏)로 부친은 예빈경태자소보(禮賓卿太子少保)를 지낸 수장(守藏)이며 조고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극모(克모)이고 증조는 국자제주(國子祭酒)와 태사(太師)를 지내고 시호가 효문공(孝文公)인 신약(信若)이며 외조는 지삼사(知三司)인 의령(宜寧) 심문준(沈文濬)인데 부인은 자녀를 생육하지 못하였다. |
인적사항
배위(配位) : 한남군군부인김씨, 서원군군부인염씨
(漢南郡君夫人金氏, 瑞原郡君夫人廉氏)
부모(父母) : 부 (孚)
형제(兄弟) : 형제없음
자녀(子女) : 우기 (于器) [1] |
파(派) : 추밀공파 (樞密公:永儒:1派) |
세거지(世居地) : 순흥 |
묘소(墓所) ; 장단부 대덕산 구정리 자좌 |
시제 : 음력 10월 1일 |
관련자료
안 향 할아버지 영정
안자묘 전경과 안자기념관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425)
위패 모신 사당과 감실 신위
문성공 회헌 선조묘 (소재지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늘목리 구정동 대덕산)
안자묘 (소재지:황해도 연백군 화성군 송천리)
안향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의 모든 향교에 다 공자님가 함께 배향되었고
또 모신 사당이나 서원은 아주 많으나 대표적인 것만 올린다.
유명한 소수서원(http://www.sosu.pe.ky)은 직접 확인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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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사는 경북 진양군 왜평면 연산리에 소재하고
현액은 공자 76대손인 연성공 공영이선생의 친필임.
위의 사진은 합호서원으로 충남 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소재한다
위의 도동묘는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 소재한다
그외에도 전남 나주시 봉황면 와우리에 소재한 집성사(좌측)과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소재한 만수사가 있으며(우측)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 경내에 있는 숭보사(아래사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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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공 할아버지 설명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하여 초명인‘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흥주(興州: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郎)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 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 ·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이진(李)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1306년 9월 12일 64세로 생애를 마치자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왕래하여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보급을 위하여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유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도,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한번은 그가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문묘에 참배할 때에, 그곳의 학관(學官)이 “동국(東國)에도 성묘(聖廟:文廟)가 있소?” 하고 묻자 그는 “우리나라도 중국과 똑같은 성묘가 있소.” 하고 답하였다 하며, 또 그들과 문답하는 가운데 그가 주자학에 밝은 것을 안 그곳의 학관들이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하여진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원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그는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하였다. 그가 당시 고려의 시대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하였다면, 그는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적극적 의미에서 그를 ‘주자학 수용자’라고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조의 주세붕도〈죽계지서 竹溪志序〉에서 “고려의 사신(史臣)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도(道)라든가 이(理) 따위의 말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말할 수 있어도 그의 학문을 밝혀낼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고려사》를 읽을 때마다 안문성공전(安文成公傳)에 이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략)…… 역사는 그가 섬학전을 설치하고, 사후 문묘에 배향된 사실만을 들먹이는데, 식견의 비루함이 이와 같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
안향(安珦)
성명(姓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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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
본관(本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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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順興) |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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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3∼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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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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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온(士蘊) |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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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晦軒) |
이력(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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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晦軒 文成公(初諱: 裕) 회헌 문성공(처음의 이름: 유)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휘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이다. 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현의 칭호인 子(자)라 불리는 분은 오직 회헌(문성공) 선조 한 분 밖에 없다. 1306년 9월 12일(고려 충렬왕, 병오년 갑신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호(諡)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장지(葬地)를 장단의 대덕산에 내렸다. 조선 문종의 어휘(御諱)와 같은 이름(珦)이라서 유(裕)로 바꿔 부르다가 나중에 [향]으로 환원했다. 충숙왕 무오년(1318년), 문묘에 초상화를 봉안했다. (영정 : 국보제 111호) 충숙왕 기미년(1319년),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유상(儒像)은 여러본(本)이 있는데,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충주(忠州)의 도통(道統) 연기(燕岐)의 합강(合江) 진주(晋州)의 도통(道統) 순흥(順興)의 대룡산(大龍山) 송도(松都)의 한천(寒泉) 철원(鐵原)의 모성(慕聖) 장흥(長興)의 만수사(萬壽祠) 재령(載寧)의 문천(文泉) 백천(白川)의 송성영당(松城影堂) 시흥(始興)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나주(羅州)의 집성(集成) 곡성(谷城)의 도동(道東) 중국 공자(孔子)의 사당 등에봉안되었다.
안향(安珦) 시대 : 고려시대
국적 : 한국
생몰년 :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정의 : 고려 충렬왕 때의 유학자(儒學者)
생 애
초명은 유(裕)이고, 자는 사온(士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경북 순흥 출신이며, 안부(安孚)의 아들이다.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하고, 교서랑(校書郞)·감찰어사가 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고, 원나라에 가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유교를 정통이라 여기게 되어 그 책을 베끼는 한편, 공자(孔子)와 주희(朱熹)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그 후 문교진흥(文敎振興)과 인재 양성을 위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으며,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2현(賢)의 초상과 제기(祭器)·악기(樂器)·경서(經書)·제가서(諸家書) 등을 구해오게 하는 등 고려 말기 유교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사 상
그가 전한 주자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이끌어온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리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心性修養)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聖人)의 도(道)는 일용윤상(日用倫常) 속에서의 효(孝)·충(忠)·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적 덕목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倫理)를 경시하고 의리(義理)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하였는데, 주희는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았으며, 공자의 학문은 바로 주희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 주희의 화상을 벽에 걸어 두었으며, 주희의 호(號)인 회암(晦庵)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회헌이라 하였다.
저 서
저서에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이 있다.
기 타
그는 죽은 뒤 1318년(충숙왕 5) 왕명에 의하여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의 가장 오래된 그림이기도 하다. 또 조선 중종 때 주세붕(周世鵬)이 순흥의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소수서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晦軒先生實紀 (古上 991.1 안92큁)
安珦 (1243∼1306) ; 字 士蘊, 號 晦軒, 本貫 順興.
木板本. -[發行事項不明].
4卷3冊 : 年譜 ; 29.5x20.6cm.
四周雙邊. 半匡 ; 20x15.5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안향에 대한 사적을 모은 책이다. 안향은 1260(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75(충렬왕 1)년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충숙왕 5)년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명종 4)년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 문성(文成)이다.
안향의 실기는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제1차로 1763(영조 38)년 17세손 극권(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과 세계비지(世系碑誌) 및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하였다. 판각사업을 도통사(道通祠)에서 하였기 때문에 인자연보에서는 이것을 "도통본실기"라 부르기도 한다. 책머리에 대제학 이정보(李鼎輔)를 비롯하여 박성원(朴聖源), 송명흠(宋明欽) 등의 서문이 있으며 안향의 16세손 석근(錫謹)의 발기가 있다. 제2차로 1816(순조 16)년 안재묵(安齋默) 등이 증보하였으며 홍석주(洪奭周)의 서문이 있다.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제3차로는 안명열(安明烈) 등이 1883∼1884(고종 20∼21)년 사이에 간행하였으며 민영목(閔泳穆)의 서문이 있다. 모두 4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안자연보에서는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4차로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으로 경남진주의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연산본실기(硯山本實紀)"라고 부른다. 5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이만도(李晩燾)의 서문이 있다. 【上溪光明室文庫】수장본은 "연산본실기"이다.
안향에 대한 연구자료로는 이 실기와 안자연보 등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회헌실기》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은 그의 《윤문학사유고(尹文學史遺藁)》에서 그 역사적 가치와 신빙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김병구(金柄九)는 그의 《회헌사상연구》에서 대체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등의 기록과 일치하므로 이 실기의 자료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추정하였다.
序 ; 李鼎輔, 朴聖源, 宋明欽.
重刊序 ; 洪奭周.
三刊序 ; 蘇輝冕, 金尙鉉.
四刊序 ; 李晩燾, 鄭載圭.
目錄.
卷之 1. 遺集 ; 詩.
奏 ; 薦李?李玲等.
文 ; 諭國子諸生.
卷之 2. 附錄 ; 世系源流.
卷之 3. 附錄 ; 年譜, 列傳, 行狀, 眞像.
卷之 4. 附錄 ; 賜祭(英祖朝賜祭墓文, 正祖朝賜祭廟文, 太常朝賜祭墓文, 今上朝賜祭墓文), 祭紹修廟文, 祭墓文, 碑誌(墓誌, 墓碣銘, 神道碑銘, 松京遺基碑, 順興鄕閭碑), 祠院(紹修書院).
卷之 5. 附錄 ; 祠院(臨江書院), 道東廟, 寒泉祠, 門人, 贊述, 補遺錄, 追遠, 報本壇, 祝文, 壇記.
跋 ; 安錫儆, 鄭誾敎, 趙鎬來, 鄭泰鉉, 李商永, 金容禧.
안향(安珦)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晦軒先生實記(奎6882), 安克權(朝鮮)編.
1冊(76張) 圖 肖像 筆寫本 26.4×18.9cm.
序:閔泳穆·金尙鉉.
高麗 忠烈王 때의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鼻祖로 추앙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 등을 수록한 책으로서 後孫 克權이 1764년(英祖 40) 初刊했으며 享淳 등이 1884년(高宗 21) 3刊했다. 그러나 본 奎章閣本은 筆寫된 것으로서 筆寫경위나 연대 등은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본서는 목록과 序文 등에 의하면 4卷으로 되어 있으나 1冊2卷만이 남아있는 逸本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본관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1260년(元宗 1) 文科에 급제, 1275년(忠烈王11) 尙州判官으로 있으면서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는데 힘썼고 版圖 佐郞·殿中侍御史·國子司業 등을 지냈다. 그뒤 右司議·左承旨·征東行省員外郞 등을 거쳐 高麗儒學提擧가 되어 王과 공주를 扈從, 元나라에 들어가 《朱子全書》를 베껴썼고 孔子와 朱子의 畵像을 그려가지고 귀국해서 朱子學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각종 벼슬을 거쳐 1304년(忠烈王 30) 僉議侍郞贊成事, 判版圖司事가 되었다. 한편 文敎의 진흥을 위해 贍學錢이라는 育英財團을 설치했으며 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孔子의 초상화를 비치했고 祭器·樂器와 六經·諸子·史등의 서적을 사들였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朱子學者(東方道學之祖)로 지칭되었다. 朝鮮 中宗때 豊基郡守 周世鵬이 順興의 白雲洞에 安珦의 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드니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책머리에는 目錄에 이어 閔泳穆의 三刊序(1884), 金尙鉉의 續刊序(1883), 蘇輝冕의 序文(1882), 李鼎輔외 序文(1763), 朴聖源의 序文(1764), 宋明欽의 序文(1764), 洪奭周의 序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遺詩 5수(題學宮, 贈太守李蘊古, 題松京甘露寺, 侍從忠宣王如元時感昑, 聯句), 次韻 1수(次晦軒安相國韻·白元恒), 遺文 2편(薦李산李진等奏, 諭國子諸生文), 眞像贊詩 4수(아들 于器, 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眞像贊文 4章(金尙憲, 申翊聖, 15代孫 重觀 등), 年譜(19代孫 在默編), 長湍墓祀記, 英廟朝致祭文, 正廟朝華城聖廟告文成公文, 今上致祭文. 遺文 중 「薦李산李塡等奏」는 密直副使致仕 李산과 典法判書 李진을 經史敎授都監使 교수로 천거한 내용이며「諭國子諸生文」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倫理로서 孝, 忠, 禮, 信, 修己하면 반드시 이룬다고 지적한 후 佛敎는 蔑倫悖義한 夷狄의 敎라고 비난하면서 저간의 好讀佛書의 경향을 개탄하고 諸生들은 新書를 읽고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권2}:麗史列傳, 言行記(申翊聖), 神道碑(大司成 金世濂), 墓誌(14代孫 應昌), 順興鄕閣碑 2章(鄭斗卿 등), 松京遺墓碑 2章(應昌, 金應祖), 諸賢記述, 諸賢詩律 6수(崔瀣, 權近, 李滉 등), 紹修院題詠 6수, 長湍墓致祭日感行 3수. 그리고 目錄에 보이는 {권3}과 {권4}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3}:順興白雲洞書院院誌, 建祠時開墓祝文, 奉安眞像跋, 配祀文貞文敬兩公時告文, 與安牧使瑋安承旨玹書, 上方伯沈通源書, 賜額紹修書院誌, 紹修書院記, 與愼齋周副學書, 答黃正字俊良書, 禮判答豊基郡守張文輔書, 禮曹移文, 禮判上安右相玹書, 眞像改修誌, 祭廟院文 8章, 竹溪辭 3章, 道東曲 9章, 配祀周愼齋時告文, 院規, 白雲洞書院田畓目錄, 祭式, 白雲洞文成公廟創建識, 白雲洞秋 享後序, 鳳岑書院長請狀, 書院通太學文, 太學通諭諸校院文, 上樑文, 重修上樑文, 禮曹回啓, 谷城道東祠記, 松都寒泉祠營建時文, 桃洞祠宇營建時告家廟文, 祠壇記, 館僕報來祝文, 長湍墓閣重修上樑文. {권4}:保宥錄, 世系錄, 門人錄, 太學館儒通諭諸道校院文. 序跋. 본서는 朱子學의 傳來와 발전, 계승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계승과 발전 등의 부문을 잘 밝혀줄 수 있는 {권3}과 {권4}가 없어진 것이 아까운 일이다.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安在默, 1820년 (순조20)
4권2책. 필사본. 18. 9 30. 0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1820년에 後孫 安在默이 간행한 중간본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本官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563을 참조할 것). 安珦은 동방 유학의 鼻祖로 생각되었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문집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安在默의 중간 跋文에 의하면, 初刊本이 소략한 것을 염려하여 年譜를 만들고, 肖像과 墓圖를 附錄하여 1820년 重刊本을 간행하였다 한다. 본서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李鼎輔(1763), 朴聖源, 宋明欽(1764)등이 쓴 晦軒先生實紀序와 洪奭周, 李友信이 쓴 晦軒先生實紀重刊序 그리고 目錄이 있다. {卷一}에는 詩(題學宮) 몇 수와 〈薦李李 奏〉라는 奏文이 있는데, 李 과 李 을 經史敎授都監使 敎授로 천거한 내용이며, 〈諭國子諸生〉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윤리이므로 忠, 孝, 禮, 信, 修己하면 도를 이룰수 있다고 하면서, 불교는 虛妄한 夷狄임을 개탄한 내용이다. 그 다음에 遺像과 文成公의 墓山圖가 부기 되어 있고, 眞像에 대한 여러 사람들(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金尙憲, 申翊聖, 安重觀 등)의 贊詩가 있다. 이어서 후손인 安在默이 쓴 안향의 年譜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卷二}는 附錄으로 鄭麟趾가 쓴 〈麗史列傳〉 가운데서 안향 관련 사항을 초록하였고, 申翊聖이 쓴 안향의 言行記가 있다. 한편 神道碑(1633, 金世濂), 順興鄕閭碑(鄭斗卿), 墓誌(1656, 安應昌), 松京遺基碑(安應昌, 金應祖)등의 묘비와 함께, 諸賢記述이라 하여 여러 사람들의 시문이 부기 되었다. 가령 次李東菴追慕安文 成公韻(崔瀣), 安史官垂宅飮贈歌(權近) 등으로 이외에도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등의 시와 周世鵬이 쓴 白雲洞次白鹿洞賦가 있다. {卷三}은 御製(正宗大王)와 長湍墓謝祭文, 墓祭文(閔聖徽), 長湍墓祀記(安羽濟), 順興紹修書院開基告文등의 致祭文과 周世鵬이 쓴 奉安遺像跋, 竹溪辭三章, 道東曲九章, 配祀文貞文敬公時告文 등이 있다. 그리고 백운동 서원과 관련 周世鵬이 안향의 후손인 牧使 安瑋와 承知 安玹에 보낸 書簡文과 이외에 成世昌이 쓴 白雲洞書院記 등 수편의 書院記와 春秋享祝文, 告文, 上樑文 등이 있다. {卷四}는 後孫인 安應昌이 태종 이후 안향과 관련한 史蹟을 補錄한 〈保宥錄〉과 그 序跋(申翊聖, 洪遇森)이 있다. 그리고 世系錄과 안향의 門人錄으로 權溥, 禹倬, 白 正, 李 , 李兆年, 李晟 등 數人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安錫儆이 쓴 晦軒先生實紀跋과 安翊采가 쓴 晦軒先生實紀重刊跋이 있다. 본서는 우리 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의 實記인 만큼 朱子學의 전래와 발전, 계승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김 호)
晦軒先生實紀 {2} 〈一蓑 고819. an1h〉
安享淳, 1884년(고종21)
4권2책, 목판본, 19. 0 30. 6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安享淳이 1884년에 三刊한 것이다. (安珦에 대해서는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463을 참조할 것). 安珦의 시문집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고,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1820년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晦軒先生實紀》{1} (고4655-27B-1) 이다. 한편 본 《晦軒先生實紀》는 安享淳의 跋文에 의하면 그가 湖南을 여행하다가 宗親 安相溶을 만나, 이전의 《晦軒先生實紀》가 漏落됨이 많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시 重刊本을 편찬하기로 하고서, 안향의 文籍 三章과 시문 一首 등을 엮어 三刊한 것이라 한다. 중간본과 비교하여 볼 때, 순서 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이며 대동소이하다. 다만 三刊하면서 添加된 내용은 新增이라고 표시하였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은 먼저 蘇輝冕가 쓴 晦軒先生實紀三刊序와 目錄이 있다. 그리고 {卷一} 이하의 내용은 순서 상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와 大同小異하다. 신증된 내용은 白雲洞題 이라 하여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 吳命修 등의 시문과 李滉, 安應昌등이 쓴 謁廟院文이 있다. (이하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晦軒先生實紀{3} 〈고4655-27A-1〉
安明烈, 1884년(高宗21)
4권2책, 목판본, 19. 4 29. 7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을 엮은 시문집으로 1884년 安明烈이 三刊한 것이다. 안향의 시문집은 1764년(영조40) 安克觀의 초간본과 1820년(순조20) 安在默의 중간본, 그리고 1884년 安享淳의 三刊本이 있다. 그러나 重刊本을 다시 간행한 三刊本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본서의 跋文을 쓴 安明烈은 三刊本으로 安享淳의 것이 있지만, 누락된 것을 보충키 위해 다시 중간본들을 검토, 三刊本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기의 내용에 첨가된 것은 新增이라 표시하였으며 다른 三刊本의 新增 내용은 작은 글씨로 표시하였고, 본서 간행시 신주된 것은 본문과 같은 크기로 '新增'이라 표시 하였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은 먼저 目錄과 閔泳穆이 쓴 軒先生實紀三刊序 그리고 金尙鉉, 蘇輝冕등이 쓴 軒先生實紀續刊序가 있고 이하 {卷一}에서 {卷四}까지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신증된 내용으로 松京遺基碑(新增 安應昌), 次晦軒先生題學宮韻(新增 李滉), 次晦軒先生題松京甘露寺韻(新增 李堅幹), 致祭晦軒先生墓日感作(南胤寬, 吳明修 新增), 祭院廟文(新增)등이 있다.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晦軒先生實紀{4} 〈고 4655-27-1〉
편자 미상---〉安章甫, 연기미상---〉1883년(高宗20)이후
5권2책. 영본, 목판본, 20. 2 30. 5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 등을 엮은 그의 후손 安章甫가 19세기 후반 엮은 시문집으로 四刊本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463을 참조할 것). 本書 四刊 序文을 쓴 鄭載圭에 의하면 이미 《晦軒先生實紀》가 누차 간행되었고 또 1883년(고종20)에도 三刊本이 발간되어 嶺南 지역에 널리 퍼졌으나, 여전히 각 판본마다 차이와 漏落이 많자, 안향의 후손 安章甫가 이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다시 四刊本을 준비, 刊行하게 되었다 한다. 본서는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권5}는 附錄으로 다루어진 것 같으나 現傳하지 않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다. 아마 여러가지 史籍에서 추록하여 增補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으로는 먼저 晦軒先生實紀序(李鼎輔, 朴聖源, 洪奭周)와 蘇輝冕, 金尙鉉 등이 쓴 晦軒先生實紀三刊序 등 기간의 서문이 있고, 李晩燾, 鄭載圭가 四刊本을 간행하면서 쓴 晦軒先生實紀四刊序가 있다. 이하 目錄, {卷一}부터 卷四까지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와 대동소이하다.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
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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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世 祖 文成公(휘 珦) 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대덕산 (京畿道 長湍郡 津西面 訥木里 口井洞大德山) 자좌지원(子坐之原) 이다.
장례식(葬禮式)에는 칠관십이도(七管十二徒) 제생(諸生)이 소복(素服)을 하고 노제(路祭)에 참사하였다. 그 위대했던 행적(行蹟)과 참정지공(參政之功)을 높이 찬양해서 *도덕박문(道德博文)이요, 안민입정(安民立政)이란 큰 뜻을 들어 문성(文成)이란 시호 (諡號)를 조정(朝廷)에서 내렸다. 1318년 충숙왕(忠肅王) 5년 무오(戊午) 2월에 왕명(王命)으로 문성공 존영(尊影)을 도형(圖形)하여 문묘(文廟)에 봉안(奉安)하고 또 상향(桑鄕)인 순흥 향교(鄕校)에도 봉안(奉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즉 1319년 충숙왕 6년 기미(己未) 6월에는 문묘종사(文廟從祀) 즉 공자사당(孔子祠堂)인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셨다.
*문묘(文廟)는 중국(中國) 옛 주(周)나라 사성십철(四聖十哲)과 송(宋)나라 육현(六賢) 그리고 우리나라 명현(名賢)만을 엄선해서 섭사(攝祀)하는 사묘(祠廟)이다.*
1542년 즉 이조(李朝)11대 중종(中宗) 37년에는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재임(在任)중인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순흥 백운동(白雲洞)에 서원(書院)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嚆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創建하여 문성공의 진상(眞像)을 봉안(奉安)하였다. 그리고 그후 국내(國內) 여러곳에 서원(書院) 또는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봉향하고 있다. 1977년에는 경기도 의왕시 월암3리 부곡역(富谷驛) 동쪽에 안자묘(安子廟)를 건립(建立)하여 매년 음 9월12일 할아버지 기일(忌日)에 수많은 후예자손(後裔子孫)들과 회헌 성조님을 흠모(欽慕)하는 유림(儒林), 저명인사들이 참사(參祀)해서 기신제(忌辰祭)를 올린다. |
부(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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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安孚)
3 世 안부(安孚) *믿을 부*
할아버님은 1220년 즉 고려(高麗)23대 고종(高宗) 7년 경진생(庚辰生)이시다. 소시(少時)에 호문조학(好文早學)하여 약관(弱冠)에 흥주(興州)의 주리(州吏)를 지내시다가 한때 의업(醫業)에 종사하셨다. 1244년 고종 갑진(甲辰)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정의대부(正義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시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 치사(致仕)하셨다. 후에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봉(追封)받으셨다. 부인(副因)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剛州=현 영주) 우씨(禹氏)이시다. 당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신 우성윤(禹成允)공의 따님이시다. |
모(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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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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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夫人)은 한남군군부인 김씨(漢南郡君夫人 金氏)이시고 우사간(右司諫)을 지내신 김록연(金祿延)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부좌(?左)로 모셨다. |
배(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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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인은 서원군군부인 염씨(瑞原郡君夫人 廉氏)이시고예빈경 태자보(禮賓卿 太子保)를 지내신 염수장(廉守藏) 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실전(失傳)되었으므로 할아버님 묘 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매년 음10월1일 세향(歲享)을 올려왔는 바 8.15 해방후 국토분단(國土分斷)으로 산소가 북한(北韓)에 소재(所在)하게된 불행(不幸)으로 10월5일 경기도 금촌교하(金村交河) 야동(冶洞) 판서공(判書公=9세 휘 종약(從約) 즉 할아버님의 5대손) 묘역(墓域)에서 망향제(望鄕祭)로 봉향(奉享)하고 있다. |
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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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우기(安于器)
5世 안우기(安于器) *어조사 우, 그릇 기
할아버님 초휘(初諱)는 천(遷)이시고 자(字)가 허중(虛中)이시며 호(號)는 죽옥자(竹屋子),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선친(先親)이신 문성공의 위업(偉業)을 극계(克繼)하여 문아(文雅)로 현명(賢明)하셨다. 1265년 고려(高麗) 24대 원종 6년 을축생(乙丑生)이시다. 1282년 충열왕 8년 약관 18세의 홍안소년으로 문과(文科)에 등과하셨다. 그후 조정(朝廷)에 몸담아 국학제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사헌(大司憲),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檢校僉議), 찬성사겸판전의시사(贊成事兼判典儀寺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순평군(順平君)에 봉군(封君)되셨다. 1329년 즉 충숙왕16년 기사(己巳) 9월 12일 향수(享壽) 6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배(配) 부인은 철원군군부인(鐵原郡君夫人) 최씨이시고 그 선친(先親)이 당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신 최충약(崔沖若)공 이시다.
묘(墓)는 고조우록(考兆右麓) 임좌(壬坐)로 모셨다.
배(配) 후부인은 이씨(李氏)이신데 생졸년(生卒年), 묘 등이 모두 실전(失傳)되었으므로 공조(公兆)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세사는 매년 10월 1일인 바 해방후는 금촌 판서(判書) 공묘역에서 망향제(望鄕祭)로 올린다. |
녀(女) |
5 녀(女) |
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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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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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산의 인물>
2.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안향 1243-1306 사온 회헌 순흥 順興 시문성배향문묘 회헌실기
安珦 1243-1306 士蘊 晦軒 順興 順興 諡文成配享文廟 晦軒實記 |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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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순흥인
4世 안향(安珦) *구슬 향, 옥 이름 향*
할아버님은 고려(高麗)때 고명(高名)한 성현(聖賢)이시고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로서 동방(東方) 이학지조(理學之祖)라는 존칭(尊稱)과 추앙(推仰)을 받으시는 우리 안문(安門)의 명조(名祖)이시다. 초휘(初諱)는 유(裕) *너그러울 유, 늘어질 유* 이시고 자(字)는 사온(士蘊)이시며 호(號)는 회헌(晦軒),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시다.
1243년 고려(高麗)23대 고종30년 계묘(癸卯) 6월 경상도(慶尙道) 흥녕현 (興寧縣) 죽계(竹溪) 즉 지금의 경북(慶北) 순흥(順興)에서 탄생 (誕生)하셨다. 1260년 원종 원년(元年)에 약관(弱冠) 18세의 홍안 소년(紅顔少年)으로 문과(文科=요즘의행정고시)에 등과(登科=과거 급제)하셨다. 등과직후 교서랑(敎書郞 *당시 비서성 소속=현 청와대 비서)에 보직(補職) 되셨다가 수월후 한림원(翰林院)으로 전보(轉補)되셨다. 1265년 23세 되시던 해에 아드님 우기(于器)를 출생하시고 그해 송경(松京=당시 우리나라 수도였고 지금의 개성(開城)임 태묘리(太廟里)로 이사(移徙)하셨다. 1270년 28세 되시던 해 6월에 삼별초의난(三別抄의 亂)이 일어나 배중손(裵仲孫)이 이끄는 난군들에게 피납(被拉)되었는데 난군두목(亂軍頭目) 배중손이 안한림(安翰林)은 중요 인물(人物)인 즉 방면을 엄금하라는 특명(特命)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궁리 끝에 괴교(拐交)를 써서 탈출하셨다.
이때 원종왕이 의(義)로운 일이라며 찬사를 하셨다고 한다. 1272년 원종 13년 30세에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승진(昇進)되셨다. 1275년 충열왕 원년(元年) 할아버님 33세때는 경상도 상주(尙州) 판관(判官)으로 영전(榮轉)하시게 되셨는데 그 당시 그 지방에 무당(巫女) 2인이 요망(妖妄)한 미신(迷信)을 받들고 상주(尙州)를 위시해서 경주(慶州), 합주 등 여러고을을 돌아다니며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신통술(神通術)로 선량한 백성(百姓)들을 현혹(眩惑)시키고 순수(純粹)한 정신문화(精神文化)를 혼란(混亂)케 하므로 특명을 내려서 그들 무녀를 잡아 엄벌하여 미신을 타파하고 민심(民心)을 수습하여 민생(民生)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정명관(善政名官)이란 찬사와 호평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1277년 35세때에는 판도사 좌랑(版圖司 佐郞), 그리고 36세때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 46세에 우사의대부(右司義大夫)로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으셨다. 1289년 47세때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왕명을 받아 그해 윤10월 충열왕을 딸아 원(元=지금의 중국) 나라에 들어가셨다. 할아버님은 그 당시 연경(燕京)*원나라의 수도*에 머무르시며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베끼시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진상(眞像)을 모사(摹寫)하셔서 소중히 간직해 가지고 귀국(歸國)하셨다. 이때부터 이 주자학(朱子學)을 신중히 강독(講讀) 연구(硏究)하고 널리 포교하는 등 유학(儒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할아버님께서 원나라에 머무르실 때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돌아보시다가 읊으신 시(詩)한수가 있었기에 여기에 수록한다.
[詩]
粉 堞 縱 橫 萬 里 平 하니
居 民 賴 此 得 安 生 이라
當 時 若 數 秦 皇 罪 인즉
只 在 梵 坑 不 在 城 이니라
흰 성벽은 종횡으로 만리나 펼쳐 평탄하니
백성들은 이 성을 의지하여 편안히 살아가네
그 당시 만약 진시황의 죄를 따지려고 한다면
다만 시서를 불살은 죄지 성 쌓은 것이 무슨 죄랴
1294년 52세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동남도 병마사(兵馬使)를 제수(除授)받아 합포(合浦=지금의 마산)에 출진(出鎭)하여 무군휼민(撫軍恤民)하고 주군백성(州郡百姓)의 복지증진(福祉增進)과 민생(民生)안정(安定)에 심혈(心血)을 기우리는 등 헌신노력(獻身努力)하므로써 선정명관(善政名官)이라는 호평과 존경(尊敬)을 받으셨다. 그때 잠시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에 들리셨다가 읊으신 시(詩) 한 수가 있다.
[詩]
一 葉 飛 來 鏡 面 平 하니
輝 空 金 碧 梵 王 城 이라
嶺 頭 蒼 翠 排 嵐 影 하고
石 上 潺 湲 帶 雨 聲 이라
日 暖 庭 花 粧 淺 錦 하고
夜 冷 山 月 送 微 明 이
憂 民 未 得 ? 塗 炭 하니
欲 向 蒲 團 寄 半 生 이라
나무 잎이 날라와 거울같은 물위에 띄이고
황금벽옥으로 찬란하게 번쩍이는 범왕성을 이루었네
고개마루 푸른빛은 남색초록빛을 띄어있고
돌 위에 졸졸 흐르는 물은 비소리를 먹음었구나
따사로운 햇살받아 비단인양 뜰에 꽃은 피고
서늘한 밤 산위에 뜬 달은 희미한 빛을 밝혀준다
백성들을 걱정하나 도탄에서 건저내지 못하니
포단에나 향하여 반평생을 붙여볼가 하노라
1297년에 첨의참리(僉議?理), 세자이보(世子貳保)를 배명(拜命)하셨다. 1298년 56세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 太學士)겸 수문전 태학사(修文殿 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등 요직(要職)을 맡으셨다. 1300년 할아버님 58세때에 광정대부(匡正大夫), 찬성사(贊成事)에 오르시고 이에 심가(尋加)해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正一品),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 태학사(修文殿 太學士), 제수국사(提修國史) 등을 치사(致仕)하셨다. 이와같이 할아버님께서는 평생(平生)을 고려국 조정(朝廷)에 몸담아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두루 역임하시고 국가사회에 공헌하신 위대한 성현(聖賢)이시다. 따라서 할아버님은 백왕가범(百王可範)의 명현(名賢)으로 존칭을 받으시는 위대한 어른이시다.
1301년 조정(朝廷)의 모든 벼슬을 사임 하신후에 사택(私宅)마저 국가(國家)에 헌납(獻納)하시고 개성(開城) 서부 양온동(良?洞)으로 이사를 하셨다. 1303년 61세의 고령에도 후진(後進)교육(敎育)과 인재(人才)양성(養成)에 힘쓰셨는바 특히 양현고(養賢庫)라는 교육금고(敎育金庫)를 만들어서 백관(百官= 현 모든공무원)들로부터 은포(銀布=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은과 주단포목 등등)를 각출(各出)케 하여 교육자금을 마련해서 당초 계획된 교육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익년(翌年)에는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만들어 흥학설교(興學設敎)에 여생(餘生)을 바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1306년 병오(丙午) 음(陰) 9월 12일에 향수(享壽) 64세로 애섭하게 서거(逝去)하셨다. 이 때 충열왕(忠烈王)이 장지(葬地) 및 위토(爲土)를 특사(特賜)하셨으니 그 사패지지(賜牌之地)인 장지(葬地)는 장단부 송림현 구정리(長湍府 松林縣 口井里 = 지금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소재 대덕산(大德山) 자좌오향지원(子坐午向之原)이다. |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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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안향(安珦)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성균관 대성전 - 조선조 문묘 -
成均館 大成殿 - 朝鮮朝 文廟 -
文廟란 중국 唐나라에서 739년에 文宣王으로 追尊된 孔子를 모신 祠堂을 말한 것이다. 儒敎가 세상을 다스리는 基本 理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漢나라 때부터 大聖至聖文宣王 즉, 孔子에 대한 祭禮를 行해왔으며, 朱子가 儒敎를 集大成한 宋나라 대에 이르러 體系的으로 孔子를 비롯한 聖人들의 位牌를 모시고 享禮하는 制度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朝鮮朝에 들어 儒敎가 나라의 統治思想이 되자 太朝 6년인 1397년에 明倫堂, 文廟, 養賢庫 등을 두고 儒敎의 聖賢들을 配享하였다. 그러나 文廟가 創建된지 얼마 되지 않는 太宗 2년 1402년 火災로 消失되어 太宗 7년 1407년에 重建되었다, 그 후 中宗 1년 1506년에 補修하였으나 壬辰倭亂으로 다시 損失된 것을 宣祖 34년 1601년부터 39년 1606년까지 年次 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文廟는 中央에는 國學으로 成均館을 두고, 地方에는 鄕校라 하여 全國 234個所를 設置하여, 中央과 地方의 敎育體系를 確立하고 敎育과 敎化의 求心點으로 그 役割을 다 하게 하였다. 거기에는 孔子를 비롯한 5聖과 孔門 10哲, 宋朝 6賢을 祭享한 大成殿과 우리나라의 東國 18賢과 孔子의 69弟子를 包含한 中國의 歷代先賢 94位를 합한 112位의 位牌를 東西로 從享한 東?와 西?로 이루어져 있고, 그 북쪽에는 學舍인 明倫堂이 있으며 科擧로 嚴選한 200명의 生進들이 入學 居處하는 東西齋가 따라있다. 學舍 明倫堂에서는 이들 儒生에게 四書五經의 九齋를 講讀하여 人材를 養成하였다.
1910년 日帝는 國權을 强倂하고 成均館과 鄕校의 財産을 分離하여 敎育을 一切 中止하여 國立大學의 機能과 民族敎育의 脈을 끊었다. 그 대신 1924년 植民地敎育을 위하여 京城帝國大學을 設立하니 당시 全國儒林들이 主權回復運動으로 義兵을 일으키고, 成均館을 敎育機關으로서의 機能回復을 선도하자 그 懷柔策으로 明倫專門學院을 設立하고서 日帝의 變質된 敎育을 强要하다가 1943년 閉校措置 하였다.
1945년 8.15 光復과 더불어 初代 成均館長으로 就任한 心山 金昌淑翁이 1946년 9월 25일 成均館大學을 設立하고 이어서 綜合大學校로 昇格시켜 初代 學長과 總長을 歷任하면서 成均館을 國家가 아닌 儒林이 本來의 敎育機關으로 復元하고 1949년 全國儒林大會의 決議로서 東西?에 從享된 東國 十八賢은 大成殿안으로 奉安하고 그 외 中國 九十四賢의 位牌는 모시지 않기로 하여 ?埋하였다.
지금의 文廟 大成殿은 文宣王(孔子)을 爲始한 五聖과 孔門 十哲, 東國 十八賢, 宋朝 六賢, 등 三十九聖賢의 位牌가 主從으로 奉安되어 있다. 地方의 鄕校에는 처음부터 牧使. 府使. 郡守가 다스리는 고을은 中設位라 하여 5聖. 孔門 10哲. 東國 18賢. 宋朝 6賢등 39位를 奉安 하였으며, 縣令. 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은 小設位로 5聖과 東國 18賢. 宋朝 4賢(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등 27位를 奉安하였다.
成均館과 全國의 鄕校에서는 每年 陰曆 二월과 八월의 上丁日(처음으로 丁자가 드는 날)이 되면 文廟에 享祀 드리는 儀式인 釋奠大祭를, 每月 朔望에 焚香禮를 奉行하며 儒敎精神에 立脚한 道義闡明과 倫理扶植을 實踐하기 위한 敎化事業을 爲始하여 國家的. 民族的. 傳統文化的. 社會的. 事業을 竝行하고 있다.
2002년 8월 逸山 記.
* 文廟 大成殿 祭享位 *
五聖. 孔門十哲. 東國十八賢. 宋朝六賢. 등 三十九位
# 五聖
主擘 : 大成至聖文宣王 <孔子>
配享 : ?國復聖公顔子 <顔回> ?國宗聖公曾子 <曾參>
沂國逑聖公子思 <孔伋> 鄒國亞聖公孟子 <孟軻>
# 孔門 十哲
費公 閔損 <子騫> ?公 ?耕 <伯牛>
薛公 ?雍 <仲弓> 齊公 宰豫 <子我>
黎公 端木賜 <子貢> 徐公 ?求 <子有>
衛公 仲由 <子路> 吳公 言偃 <子游>
魏公 卜商 <子夏> 穎川侯 ?孫師 <子張>
<元來 孔門十哲의 顔回가 五聖으로 올려 配享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孫師(子張)를 追加하였다>
# 東國十八賢
弘儒侯 薛聰 <氷月齋> 文昌侯 崔致遠 <孤雲>
文成公 安珦 <晦軒> 文忠公 鄭夢周 <圃隱>
文敬公 金宏弼 <寒暄堂> 文獻公 鄭汝昌 <一두>
文正公 趙光祖 <靜庵> 文元公 李彦迪 <晦齋>
文純公 李滉 <退溪> 文正公 金麟厚 <河西>
文成公 李珥 <栗谷> 文簡公 成渾 <牛溪>
文元公 金長生 <沙溪> 文烈公 趙憲 <重峰>
文敬公 金集 <愼獨齋> 文正公 宋時烈 <尤庵>
文正公 宋浚吉 <同春> 文純公 朴世采 <玄石>
# 宋朝六賢
道國公 周敦? <濂溪> 豫國公 程顥 <明道>
洛國公 程? <伊川> 新安伯 邵壅 <康節>
?公 張載 <橫渠> 徽國公 朱憙 <晦菴>
以上 39位 祭享.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소수서원(紹修書院)
중종계묘건 명종경술이어필액 서원현액시차(中宗癸卯建 明宗庚戌以御筆額 書院懸額始此).
제향. 안 유(초명향 호회헌 고려 태학사 시문성 문묘배향 본순흥). 안 축(호근재 첨의찬성사 시문정 본순흥). 안 보(축제 정당문학 시문경 본순흥). 주세붕(호신재 호참 중추부동지사 시문민 본상주).
祭享. 安 裕(初名珦 號晦軒 高麗 太學士 諡文成 文廟配享 本順興). 安 軸(號謹齋 僉議贊成事 諡文貞 本順興). 安 輔(軸弟 政堂文學 諡文敬 本順興). 周世鵬(號愼齋 戶參 中樞府同知事 諡文愍 本尙州).
# 전라도(全羅道) 곡성(谷城)
*매헌영당(梅軒影堂)
숙종정사건(肅宗丁巳建).
제향. 안 유(호매헌 시문성 문묘배향 본순흥).
祭享. 安 裕(號梅軒 諡文成 文廟配享 本順興).
# 경기도(京畿道) 장단(長端)
*임강서원(臨江書院)
효종경인건 숙종갑술액(孝宗庚寅建 肅宗甲戌額).
제향. 안 향(초명유 호회헌 삼사좌사 시문성 문묘배향 본순흥). 이 색(호목은 고려시중 한산백 시문정 본한산). 김안국(호모재 예판 대제학 시문경 인종묘배향 본의성). 김정국(호사재 안국제 예참 시문목 본의성).
祭享. 安 珦(初名裕 號晦軒 三司左使 諡文成 文廟配享 本順興). 李 穡(號牧隱 高麗侍中 韓山伯 諡文靖 本韓山). 金安國(號慕齋 禮判 大提學 諡文敬 仁宗廟配享 本義城). 金正國(號思齋 安國弟 禮參 諡文穆 本義城). |
문헌(文獻) |
1.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안향(安珦) (원종조) 안축(安軸) (원종조) |
안유(安裕)-안향(安珦)
성명(姓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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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安裕) |
본관(本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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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順興) |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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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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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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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온(士蘊) |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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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헌(晦軒) |
이력(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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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安裕)
晦軒 文成公 諱 珦 (初諱:裕) 회헌 문성공 휘 향 (처음의 이름:유)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휘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이다. 공(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현의 칭호인 子(자)라 불리는 분은 오직 회헌(문성공) 선조 한 분 밖에 없다. 1306년 9월 12일(고려 충렬왕, 병오년 갑신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호(諡)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장지(葬地)를 장단의 대덕산에 내렸다. 조선 문종의 어휘(御諱)와 같은 이름(珦)이라서 유(裕)로 바꿔 부르다가 나중에 [향]으로 환원했다.
충숙왕 무오년(1318년), 문묘에 초상화를 봉안했다.(영정 : 국보제 111호)
충숙왕 기미년(1319년),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유상(儒像)은 여러본(本)이 있는데,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충주(忠州)의 도통(道統)
연기(燕岐)의 합강(合江)
진주(晋州)의 도통(道統)
순흥(順興)의 대룡산(大龍山)
송도(松都)의 한천(寒泉)
철원(鐵原)의 모성(慕聖)
장흥(長興)의 만수사(萬壽祠)
재령(載寧)의 문천(文泉)
백천(白川)의 송성영당(松城影堂)
시흥(始興)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나주(羅州)의 집성(集成)
곡성(谷城)의 도동(道東)
중국 공자(孔子)의 사당 등에 봉안되었다.
安子年譜 〈고1360-49〉
편자미상, 1917년
2권1책, 목, 29. 5 20Cm
이 책은 안향의 연보이다. {권1}은 고려 고종 30년(1243)부터 충렬왕 32년 丙午(1306)까지이고, {권2}는 忠淑왕 5년 戊午부터 1917년까지다. 趙鎬來가 쓴 〈발문〉을 보면 1910년 진주에 있는 학자들이, 硯山에 孔子祠를 만들고 주자와 안향을 모시어, 주자와 안향의 《연보》를 내기로 하였다고 한다. 鄭泰鉉의 〈발문〉에는 안향 연보의 원본과 《실기》(《晦軒先生實記》, 규6882, 규장각해제 사부3 563)를 합하여 《별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9대 손이 在默이 편찬한 연보의 원본은 《실기》 {권1}에 있지만 상당히 소략하고 탈자가 있어 새로 만들은 것이다. 체제는 공자가 지은 《춘추》의 편년에 따라, 연차적으로 기술하고, 《주자연보》에 따라 상권은 안향의 연보를 적고, 하권은 죽은 다음에 그에 대한 기록을 적은 것이다. 《朱子年譜別本》 古 921.91-J868j〉과 함께 간행되었다 (조남호)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安在默, 1820년 (순조20)
4권2책. 필사본. 18. 9 30. 0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1820년에 後孫 安在默이 간행한 중간본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本官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563을 참조할 것). 安珦은 동방 유학의 鼻祖로 생각되었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문집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安在默의 중간 跋文에 의하면, 初刊本이 소략한 것을 염려하여 年譜를 만들고, 肖像과 墓圖를 附錄하여 1820년 重刊本을 간행하였다 한다. 본서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李鼎輔(1763), 朴聖源, 宋明欽(1764)등이 쓴 晦軒先生實紀序와 洪奭周, 李友信이 쓴 晦軒先生實紀重刊序 그리고 目錄이 있다. {卷一}에는 詩(題學宮) 몇 수와 〈薦李李 奏〉라는 奏文이 있는데, 李 과 李 을 經史敎授都監使 敎授로 천거한 내용이며, 〈諭國子諸生〉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윤리이므로 忠, 孝, 禮, 信, 修己하면 도를 이룰수 있다고 하면서, 불교는 虛妄한 夷狄임을 개탄한 내용이다. 그 다음에 遺像과 文成公의 墓山圖가 부기 되어 있고, 眞像에 대한 여러 사람들(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金尙憲, 申翊聖, 安重觀 등)의 贊詩가 있다. 이어서 후손인 安在默이 쓴 안향의 年譜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卷二}는 附錄으로 鄭麟趾가 쓴 〈麗史列傳〉 가운데서 안향 관련 사항을 초록하였고, 申翊聖이 쓴 안향의 言行記가 있다. 한편 神道碑(1633, 金世濂), 順興鄕閭碑(鄭斗卿), 墓誌(1656, 安應昌), 松京遺基碑(安應昌, 金應祖)등의 묘비와 함께, 諸賢記述이라 하여 여러 사람들의 시문이 부기 되었다. 가령 次李東菴追慕安文 成公韻(崔瀣), 安史官垂宅飮贈歌(權近) 등으로 이외에도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등의 시와 周世鵬이 쓴 白雲洞次白鹿洞賦가 있다. {卷三}은 御製(正宗大王)와 長湍墓謝祭文, 墓祭文(閔聖徽), 長湍墓祀記(安羽濟), 順興紹修書院開基告文등의 致祭文과 周世鵬이 쓴 奉安遺像跋, 竹溪辭三章, 道東曲九章, 配祀文貞文敬公時告文 등이 있다. 그리고 백운동 서원과 관련 周世鵬이 안향의 후손인 牧使 安瑋와 承知 安玹에 보낸 書簡文과 이외에 成世昌이 쓴 白雲洞書院記 등 수편의 書院記와 春秋享祝文, 告文, 上樑文 등이 있다. {卷四}는 後孫인 安應昌이 태종 이후 안향과 관련한 史蹟을 補錄한 〈保宥錄〉과 그 序跋(申翊聖, 洪遇森)이 있다. 그리고 世系錄과 안향의 門人錄으로 權溥, 禹倬, 白 正, 李 , 李兆年, 李晟 등 數人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安錫儆이 쓴 晦軒先生實紀跋과 安翊采가 쓴 晦軒先生實紀重刊跋이 있다. 본서는 우리 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의 實記인 만큼 朱子學의 전래와 발전, 계승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김 호)
조선환여승람(창원) ■先正
○安裕: 초명은 珦이나, 國諱를 피하여 裕로 개명하였다. 호는 晦軒이니 興州인이다. 고려 元宗조에 文科에 급제하고, 학교의 쇄함을 걱정하여 瞻學錢을 드리게 하였고, 중국에 들어가 70子의 초상을 그리고 祭器와 樂器와 六經과 諸子史를 구입하여 돌아왔다. 시호는 文成公이다. 忠肅王조에 문묘에 배향되니, 일찍이 合浦를 진합하여 군사를 위무하고 백성을 구제하니 州郡이 편안하였다.
조선환여승람(창원) ■淸白
○安裕: 先正篇에 보인다. |
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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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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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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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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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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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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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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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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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유(安裕)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 경상도 慶尙道 [1] > 경주부 慶州府
상성군(商城郡) : 본래는 서형산군(西兄山郡)이었다. 동안군(東安郡) : 본래는 생서랑군(生西郞郡)이었다.
명환 고려 안유(安裕) : 유수(留守)로 있었다.
2. 제목 해동 18현
1. 설총(薛 聰) 본관 경주(慶州) 호 우당(雨堂)
신라고승 元曉의 자로 神文王때 翰林으로 弘儒侯로 追封
2. 최치원(崔致遠) 본관 경주(慶州) 시호 문창후(文昌侯)
호 고운(孤雲) 신라때 당나라 수학 翰林學士
3. 안유(安 裕) 본관 순흥(順興) 시호 문성(文成)
호 회헌(晦軒) 고려 忠烈王때 修文館太學士
4. 정몽주(鄭夢周) 본관 연일(延日) 시호 문충(文忠)
호 포은(圃隱) 고려 恭愍王때 門下侍中
5. 김굉필(金宏弼) 본관 서흥(瑞興) 시호 문경(文敬)
호 한헌당(寒暄堂) 刑曹佐郞, 조선중종때 右議政에 추증
6. 정여창(鄭汝昌) 본관 하동(河東) 시호 문헌(文獻)
호 일두(一두) 縣監, 右議政에 追贈
7. 조광조(趙光祖) 본관 한양(漢陽) 시호 문정(文正)
호 정암(靜菴) 大司憲, 領議政에 追贈
8. 이언적(李彦迪) 본관 여주(驪州) 시호 문원(文元)
호 회재(晦齋) 左贊成, 領議政에 追贈
9 이황(李 滉) 본관 진성(眞城) 시호 문순(文純)
호 퇴계(退溪) 大提學, 領議政에 追贈
10. 김인후(金麟厚) 본관 울산(蔚山) 시호 문정(文正)
호 하서(河西) 弘文館 校理, 領議政에 追贈
11. 이이(李 珥) 본관 덕수(德水) 시호 문성(文成)
호 율곡(栗谷) 吏曹判書, 領議政에 追贈
12. 성혼(成 渾) 본관 창녕(昌寧) 시호 문간(文簡)
호 우계(牛溪) 左參贊, 領議政에 追贈
13. 김장생(金長生)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원(文元)
호 사계(沙溪) 刑曹參判, 領議政에 追贈
14. 조헌(趙 憲) 본관 백천(白川) 시호 문경(文敬)
호 중봉(重峯) 僉正, 領議政에 追贈
15. 김집(金 集) 본관 광산(光山) 시호 문경(文敬)
호 신독재(愼獨齋) 判中樞府事, 領議政에 追贈
16. 송시열(宋時烈)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호 우암(尤菴) 左義政, 領議政에 追贈
17. 송준길(宋浚吉) 본관 은진(恩津) 시호 문정(文正)
호 동춘당(同春堂) 吏曹判書, 領議政에 追贈
18. 박세채(朴世采) 본관 반남(潘南) 시호 문순(文純)
호 현석(玄石) 左義政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