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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世- 안영유(安永儒)-추밀공(樞密公)1파조

무량청정1 2014. 11. 25. 10:56

2世- 안영유(安永儒)-추밀공(樞密公)1파조

  • 글쓴이 : 교장 안광신

2世  영유(永儒) *길영,선비유

 

할버님은 시조 상호군 공의 장남이시다. 1201년 즉 고려  20대 신종4년 신유(辛酉)생 이시다.

고려 23대 고종때 추밀원부사(정3품), 상호군(정3품)을 각각 추봉(追封)받으셨다

1233년 33세에 별세하시고 묘(墓)는 순흥 동북간 약 6k  지점인 부석면 감곡리(浮石面 甘谷里 = 구 道講里) 지장산(智藏山)서록(西麓) 신좌을향 지원(辛坐乙向 之原)이시다

세전(世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묘소(墓所)는 상주 (喪主)인 아드님(휘 안부(安孚)-태사공(太師公)孚)이 14세때(1233년)부친상을 당하자 상중에 유명한 지관(地官=풍수)에게 위촉해서 얻은 길지(吉地) 즉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1588년 즉 명종13년에 당시 영천군수로 재임중인 후손 판결사(判決事) 상(14世휘 ?)이 성묘(省墓)하고 묘역(墓域)을 돌아보니 타인의 투장(偸葬) 흔적(痕迹)이 발견되고 묘봉(墓封)도 많이허물어진 상태이므로타장(他葬)을 일체 파묘(破墓) 제거(除去)하고

개사초(改莎草)한 후 묘비급상석(墓  碑及床石)등 의물(儀物)도 다시 만들어세웠다.그리고 그 형(兄)인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 위(瑋)가 비명(碑銘)을 찬(撰)하여 각명(刻銘)수비(竪碑)하였으며 묘하에 재실을 건립(建立)하여 영모암(永慕庵)이라 명명하고 제전(祭田)도 마련해서 제사를 올렸다

그후 매년 음3월과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세향을 올려오다가 해방후 종의에 따라서 매년 음10월 2일로 다시 정해서 봉향한다. 또한 재실을 마련한 후로는 수호군(守護軍) 즉 요즘의 산지기를 상주시켜 산소를 엄중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후 1648년 인조때 후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 광남(壙南)에 묻어놓았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 족보(慶州朴氏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 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 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 돼 있다.

따라서 부인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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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파조 2세 추밀공 (휘 영유) 묘(一派祖 樞密公 諱 永儒墓)

소재:경북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감곡부락 (영모암)

안영유(安永儒)

성명(姓名)

 안영유(安永儒)

본관(本貫)

 순흥(順興)

시대(時代)

  

자(字)

 

호(號)

 

 

안영유(安永儒) 순흥인

2世  안영유(安永儒) *길영 , 선비유*

  할버님은 시조(始祖) 상호군 공(公)의 장남(長男)이시다. 1201년 즉 고려(高麗)  20대 신종 4년 신유(辛酉)생 이시다. 고려(高麗) 23대 고종(高宗)때 추밀원부사(정3품), 상호군(정3품)을 각각 추봉(追封)받으셨다. 1233년 33세에 별세(別世)하시고 묘(墓)는 순흥 동북간 약 6k  지점인 부석면 감곡리(浮石面 甘谷里 = 구 道講里) 지장산(智藏山) 서록(西麓) 신좌(辛坐) 을향 지원(乙向 之原)이시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묘(墓)

순흥 부석면 감곡리(浮石面甘谷里) 지장산(智藏山) 신좌(辛坐) 지원(之原)이다

2世 祖(휘 永儒) 묘

 세전(世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묘소(墓所)는 상주(喪主)인 아드님(휘 부孚)이 14세때(1233년)부친상을 당하자 상중에 유명한 지관(地官=풍수)에게 위촉해서 얻은 길지(吉地) 즉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1588년 즉 명종13년에 당시 영천군수로 재임중인 후손 판결사(判決事) 상(14世휘 ?)이 성묘(省墓)하고 묘역(墓域)을 돌아보니 타인의 투장(偸葬) 흔적(痕迹)이 발견되고 묘봉(墓封)도 많이허물어진 상태이므로 타장(他葬)을 일체 파묘(破墓) 제거(除去)하고 개사초(改莎草)한 후 묘비급상석(墓 碑及床石)등 의물(儀物)도 다시 만들어세웠다. 그리고 그 형(兄)인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 위(瑋)가 비명(碑銘)을 찬(撰)하여 각명(刻銘)수비(竪碑)하였으며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여 영모암(永慕庵)이라 명명하고 제전(祭田)도 마련해서 제사(祭祀)를 올렸다. 그후 매년(每年) 음(陰) 3월과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세향을 올려오다가 해방후 종의에 따라서 매년 음10월 2일로 다시 정해서 봉향(奉享)한다. 또한 재실(齋室)을 마련한 후로는 수호군(守護軍) 즉 요즘의 산지기를 상주시켜 산소를 엄중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후 1648년 인조(仁祖)때 후손(後孫) 순원군(順原君) 응창(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墓) 광남(壙南)에 묻어놓았다.

부(父)

안자미(安子美)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 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墓)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학살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墓)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모(母)

 

배(配)

배(配)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慶州朴氏) 족보(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 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 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 돼 있다. 따라서 부인(夫人)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確認)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族譜)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자(子)

안부(安孚)

할아버님은 1220년 즉 고려(高麗)23대 고종(高宗) 7년 경진생(庚辰生)이시다. 소시(少時)에 호문조학(好文早學)하여 약관(弱冠)에 흥주(興州)의 주리(州吏)를 지내시다가 한때 의업(醫業)에 종사하셨다.  1244년 고종 갑진(甲辰)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정의대부(正義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시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 치사(致仕)하셨다.  후에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봉(追封)받으셨다. 부인(副因)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剛州=현 영주) 우씨(禹氏)이시다.  당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신 우성윤(禹成允)공의 따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