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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무량청정1 2014. 11. 25. 10:55

1世시조始祖-안자미(安子美) 1世시조-안자미(安子美)

1世시조-안자미(安子美)-상호군공(上護軍公)

 

1世 시조-자미(子美)

 

  약력(略歷) : (1200-1250)

  다른 족보에는 이름을 공석(公石) 이라 칭하였다. 고려신종조때 흥위위 보승별장을 역임하고 신호위상호군에 추봉되었다.

 배위의 성씨는 실전 되었다. 묘소는 순흥의 소백산 아래에 있다고 전해 오는데 표식이 없어 찾지 못하였다.

  후손인 순원군 응창(應昌) 이 의성현감으로 있으면서 순흥의 평리촌 유적지에 제단을 쌓고 제전을 마련하여 매년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올린다.

 후손 기명(基命)이 만든 갑신파보에 진위(振威)에 사는 종인의 보첩에 의거하여 이르기를 공의 묘소는 순흥부 동쪽 영마암에 있으며 배위(配位)는 압해정씨(押海丁氏)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다 하였으니 이는 전보(前譜)에 실려있지 않은것이며 이제 영천 정원욱(丁元旭)의 집안 구보(舊譜)를 보니 진현관 대제학 문하시중을 지낸 경(瓊)과 그의 아들 옥당박사 문하시중 평장사 윤화(允樺)와 그의 아들 문하시중 평장사 태보내사령 혁황(奕煌)이 있고 그의 사이에 안자미(安子美) 가 기록되어 있으며 외손(外孫)의 난에 추밀공(樞密公) 태사공(太師公) 문성공(文成公)의 함자가 연이어 써 있었다. 그러나 신중히 하는 도리에 곧바로 쓸수가 없음으로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응창(應昌)이 사단기(祀壇紀)를 찬(撰) 하였다.

  무오년(戊午年)에 후손 종욱(宗昱) 상봉(相鳳) 교덕(校悳)이 사단비를 세우고 추원재(追遠 齋)를 이건 하였으며 권상익(權相翊)과 이상영(李商永)이 재기(齋記)를 찬(撰) 하고 후손 종욱(宗昱)이 중수단기를 찬(撰) 하였는바 총록에 쓰여있다

 

  他譜稱公石高麗神宗祖興威衛保勝別將追封神虎衛上護軍 配姓氏失傳墓順興小白山下云而無表未尋後孫順原君應昌帝義城築祀壇於順興坪里村遺跡置祭田 每十月朔日報祀後孫基命甲申派譜據振威宗人家牒云公墓在順興府東永磨巖配押海鄭氏樞密副使光瑞女此前譜所不載而今見永川鄭元旭家舊譜則進賢館大提學門下侍中瓊子玉堂博學士門下侍中平章事允樺子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奕煌女安子美外孫欄連書樞密公太師公文成公諱刻然基在愼重佛可直書故玆錄之應昌撰壇記歲戊午後孫宗昱相鳳校悳堅壇碑移建追遠齋晴山權相翊滄上李商永撰제齋記後孫宗昱撰重修壇記見總錄

 

 인적사항

    배위(配位) 부모(父母) 형제(兄弟) :실전됨

    자녀(子女) : 영유(永儒)[1] 영린(永麟)[2] 영화 (永和) [3]

 

  세거지(世居地) : 순흥

  묘소(墓所) ;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비봉산

  시제(時祭) : 음력 10월 1일

 

  관련자료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 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을 추  봉(追封) 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 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된 사실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학살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 녀(光瑞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보존한 구보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 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해둔다. 는 뜻을 족보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시조사단(始祖祀壇)

가운데가 시조단비(壇碑)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조사단 전경

 

안자미(安子美)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 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墓)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학살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墓)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