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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공파의 유래(1파)

무량청정1 2016. 11. 14. 10:43

파조는 10세 경(璟)으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6대손이며, 판서공(判書公 諱 從約)의 차남이다. 고려말기인 우왕 14년(1388)에 태어나셨으며, 관직은 감찰과 여러 고을 수령을 지냈으며 가선대부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70세로 세조 2년(1457) 별세하셨다.

찬성공파의 유래(1파)

파조(派祖)의 휘(諱)는 경(璟)이고 증(贈)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지경연춘추관성균관지사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행직으로 가선대부검교 한성부윤이셨다.

자는 기지(器之), 고려 때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생(晦軒先生)의 6대손이다.

증조 휘 원숭(元崇)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시호가 문혜공(文惠公)이며, 조부 휘 원(瑗)은 개성유후(開城留候)를 지냈고 시호가 경질공(景質公)이시다. 아버지 휘 종약(從約)은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냈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양도공(良度公) 정량생(鄭良生)의 따님이다.

파조께서는 1388년 무진(戊辰) 고려우왕 14년에 출생하시어, 사형제 중 차남으로 형님 참찬공과 함께 형제분이 연벽(聯璧)으로 문과에 급제 하시어 관직으로 감찰(監察)을 세 번 하시고 수령(守令)을 여섯 번 하셨다. 그 때마다 고을 사람들이 신임하고 복종하였다. 말년에는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검교(檢校)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으며, 1457년 정축 세조3년에 별세하시니 70이시었다. 묘는 황해도 배천 용수산 해좌(亥坐) 자리에 썼다. 지금은 휴전선 넘어 이북 땅이라 성묘 할 길이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배위(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배천(白川) 조씨(趙氏)는 숙위공(肅魏公) 조반(趙胖)의 따님이시며, 5남 2녀를 두시었다. 인자하시고 법도로 자손을 가르쳐 모두 급제케 하시었다.

장남 중후(重厚)공은 문과 등과 하여 연안부사(延安府使)이고, 차남 근후(謹厚)공은 문과 등과하여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이며, 삼남 관후(寬厚)공은 문과 등과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이다. 사남 돈후(敦厚)공은 문과에 등과 하여 성균관사예(成均?司藝)가 되고, 후에 차남 당(?)이 좌의정이 되어 증직(贈職)으로 영의정(領議政)을 받게 되시었다. 오남 인후(仁厚)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고, 후에 증손 현(玹)이 의정부 좌의정이 되니 추증(追贈)되어 병조판서를 받게 되시었다. 장녀는 내자윤(內資尹) 나연(羅演)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이곽(李?)에게 출가하시었다.

조정에서는 다섯 아들이 과거에 등과 하였다하여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추증(追贈)하였고, 해마다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팔년 후에 손자 당(瑭)이 좌의정(左議政)으로 귀하게 됨으로, 의정부좌찬성의 증직을 받으셨다. 배위(配位)께서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증받으시어, 우리 파를 찬성공파(贊成公派)라 하게 되었으며, 파조 휘 경(璟)자 할아버지를 찬성공 할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찬성공의 손자 휘 당(瑭)께서 중종 14년(1519년) 11월에 기묘사화(己卯士禍) 당시에 좌의정 벼슬을 하고 계시다가 조광조 등을 죽이려하는 것을 임금께 간곡하게 말리시는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사화에 직접 연루가 되어 옥고를 치루셨다.

이후 1575년(선조 8년) 신사무옥(辛巳誣獄) 사건으로 안공 당과 그 아드님이신 안공 처겸 등이 죽임을 당해 1586년(선조9년) 안공 당의 무죄가 밝혀지기까지, 우리 안문(安門)의 세가 위축이 되고, 벼슬을 멀리하여 시골로 낙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광주시(光州市), 충북 옥천(沃川), 경기 양평, 강원 횡성 등지에 우리 안문의 세거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파조 찬성공의 묘소는 물론 아드님 오형제분 묘소가 휴전선 넘어 이북 황해도 연백에 있다. 파조의 묘는 황해도 배천 용수산 해좌(亥坐) 자리에 썼다. 지금은 북쪽 땅이라 후손들은 성묘할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정성을 모아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북성리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이 바라보이는 곳에 찬성공 파조와 아드님 오형제분의 단비(壇碑)를 모시었다.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후손 수백 명이 모여 단사(壇祀)를 모시고 있다.

찬성공파의 분파도


1세 시조 安子美(안자미) 上護軍公(상호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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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永儒(영유) 1파 樞密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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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孚(부)   太師公(태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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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珦(향)   文成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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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于器(우기) 文順公(문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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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牧(목)   文淑公(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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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元崇(원숭) 文惠公(문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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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瑗(원)   景質公(경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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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從約(종약) 判書公(판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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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玖(구)   參贊公派-璟(경)贊成公派-琇(수)直長公派-理(리) 西坡公派
     |   (참찬공파)   (찬성공파)   (직장공파)   (서파공파)
11세               |
          重厚(중후) 謹厚(근후) 寬厚(관후) 敦厚(돈후) 仁厚(인후)
          장남    차남    삼남    사남    오남
          府使公   執義公   監司公   司藝公   判書公
           (부사공)   (집의공)  (감사공)  (사예공)  (판서공)

찬성공파의 상대(上代)

(1) 안공 중후(安公 重厚)
 공의 휘는 중후(重厚)요, 아버지는 휘 경(璟)인데, 벼슬이 검교 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으로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科擧)에 올랐으며, 손자인 좌의정 당(?)이귀하게 되자 여러 번 추증을 받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배천 조씨(白川趙氏)로 부흥군(復興君) 조반(趙?의 따님이시다.

중후 공을 비롯하여, 행음공(杏陰公) 휘 임(琳), 효정공(孝旌公) 휘 규(珪), 정민공(貞愍公) 휘 당(?), 원정공(院正公) 휘 순좌(舜佐), 문간공(文簡公) 휘 위(瑋), 문희공(文僖公) 휘 현(玹) 등은 공의 조카, 종손(從孫), 또는 종증손(從曾孫)들로서 찬성공파 상대(上代)의 가장 훌륭한 선조들이다.

공은 정통(正統) 무오년(1438년)에 성균관에 올랐고, 정묘년(1447년) 친시(親試)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과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권세를 잡은 간신에게 미움을 받았을 적에는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간 적도 있고, 훌륭한 치적(治績)이 있어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공은 따님 두 분만을 두셨다. 큰 따님은 현감인 봉삼산(奉三山)에게, 둘째 따님은 사직(司直)인 맹석경(孟碩卿)에게 출가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외손이 봉사(奉祀)를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며 세월이 오래되고 병란과 온갖변고를 겪어, 배위의 성씨와 생졸 연도 및 묘소를 잃게 되었다.

(2) 안공 근후(安公 謹厚)
 공의 휘는 근후(謹厚)요, 자는 방경(方敬)이다. 아버지는 휘 경(璟)인데, 벼슬이 검교 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으로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科擧)에 올랐으며, 손자인 좌의정 당(?)이 귀하게 되자 여러 번 추증을 받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배천조씨(白川趙氏)로 부흥군(復興君) 조반(趙?의 따님이시다.

공이 별세한 뒤에 여러 번 병란(兵亂)을 겪어 증거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공의 생졸연대와 이력을 모두 알 수 없다. 조정에서 벼슬하신 사실과 집안에서 하신 아름다운 덕을 더 더욱 상고할 수가 없다. 유사(有司)로서 겨우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공이 과거에 급제한 것이 천순(天順) 경진년(1460)이고, 내직(內職)으로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직강(直講),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와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였고 외직(外職)으로는 송화현감(松禾縣監)이라는 사실 뿐이다.

어머님인 조부인(趙夫人)보다 먼저 별세하여, 배천(白川)의 호산(虎山)에 있는 찬성공(贊成公)의 묘소 오른쪽 자좌(子坐)의 산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숙인(淑人)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제주목사(濟州牧使) 원지어(元志於)의 따님이며, 대사헌(大司憲) 원숙(元肅)의 손녀이다. 부인은 공이 별세하여 장례하지 않았을 때에 빈소에 불을 끄다가 별세하였다

부인은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는데, 성종 신해년(1491)에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旌閭)를 받았다. 또 영묘(英廟)께서는 일찍이 배천군지(白川郡誌)를 보시다가 정렬(貞烈)을 추념하고, 묘 아래에 정려문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공은 5남을 낳았는데, 장남인 임(琳)은 벼슬이 예조좌랑(禮曹佐郞)이며 차자인 이(理)는 벼슬이 참봉이요, 규(珪)는 벼슬이 호군(護軍)을 지내고 효행으로 정려문을 받았다. 넷째는 함(?)이고, 다섯째는 찬(瓚)이다. 좌랑의 손자인 전(琠)은 현감을 지냈으며, 두 아들인 광종(光宗)?흥종(興宗)과 함께 율곡선생(栗谷先生)에게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80세의 고령으로 광종(光宗)과 함께 용만(龍灣)의 행재소로 달려가다가 길에서 왜적을 만났으나, 그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광종은 부친을 보호하다가 마침내 함께 살해되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져 정려문을 받았다.

호군의 5세손 세구(世?는 대군(大君)의 사부(師傅)를 지냈으며, 아들인 식(?)은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지냈고, 식의 아들 시상(時相)은 문과로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증손인 관제(寬濟)는 교리(校理)를 지내고, 대제(大濟)는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겸제(兼濟)는 감사(監司)를 지냈으니, 이들이 가장 현달한 사람들이다

(3) 안공 관후(安公 寬厚)
 공의 휘는 관후(寬厚)요, 자는 율보(栗甫)이니 고려 때 중찬(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 유(裕)의 7대손이다. 벼슬이 가선대부 검교한성부윤(嘉善大夫檢校漢城府尹)인 휘 경(璟)은 공의 아버님이며, 어머니는 추충협찬개국공신(推忠協贊開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로서 부흥군復興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숙위공(肅魏公)인 조반(趙?)의 따님이다.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으며, 관향은 배천(白川)이다.

공께서는 영락(永樂) 정유년(1417) 8월 정해일에 셋째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고 기상과 도량이 특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신유(辛酉)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시고 정묘(丁卯)년에 문과에 등과 하시어 홍문관직제학 성균관 대사성 강원도 관찰사 가정대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시고 정유년(1477)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며, 무술년(1478)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다. 하루는 공이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으면서 군자와 소인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요체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여 논하니, 성상께서는 크게 칭찬하였다. 기해년(1479)봄에 특명으로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제수되었으며, 경자년(1480)에는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병진년(1498) 봄에 우연히 병을 만나 위독하여, 3월 경신일에 정침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1세였다.

배위(配位)는 돈용교위 행 사직(敦勇校尉行司直) 상주(尙州) 김숙정(金淑貞)의 따님이며, 고려 때에 낙성군(洛城君)에 봉해진 김선치(金先治)의 11대손으로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홍치(弘治) 신유년(1501) 11월 기축일에 별세하니, 향년91세였다.

공께서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인 신(王?) 은 벼슬이 도정(都正)인데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화산(花山) 김세광(金世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외아들인 천기(天琦)를 낳았다. 차남인 진(珍)은 부인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호군(護軍) 기헌(奇憲)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인 유청(惟淸)?유렴(惟廉)을 낳았다. 형(珩)은 수의부위 사용(修義副尉司勇)을 지냈는데, 감역(監役) 유혼(柳混)의 딸에게 장가들어 외아들인 처인(處仁)을 낳았다. 번(?)은 효력부위(效力副尉)인데, 주부(主簿) 이복전(李福田)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장녀는 군수 소사식(蘇斯軾)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좌랑(佐郞) 민수겸(閔壽謙)에게 출가하였다. 묘소는 황해도 연백 범산 선영후 해좌(亥坐) 자리에 있다

(4) 안공 돈후(安公 敦厚)
 공은, 자는 가화(可化)이며 문성공 회헌선생의 7대손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휘 경(璟)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배천조씨(白川趙氏) 부흥군(復興君) 휘 반(?)의 따님이다.

공은 영락(永樂) 신축년(1481)에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공은 준수하고 특이하며 총명하였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숭상하여 약관시절에 성균관에 올랐으며, 경태(景泰) 경진년에 중씨(仲氏)와 함께 연방(聯榜)으로 급제하여 여러번 낭서(郎署)를 역임하고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보직되었다. 성화(成化) 계묘년(1483)에 63세로 별세하였으며, 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에 추증되었다. 배천(白川)의 호산(虎山)에 있는 선영의 아래 해좌(亥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배위는 증정경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수찬(修撰) 박융(朴融)의 따님인데, 공의 추증에 맞추어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으니, 이는 아들 정민공(貞愍公)이 귀하게 되어 국가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장(璋)은 부사(府使)이고, 둘째 총(?)은 정랑(正郞)이고, 셋째 당(?)은 좌의정(左議政)으로 시호가 정민(貞愍)이다. 딸은 좌상(左相)을 지내고 시호가 문대공(文戴公)인 김응기(金應箕)에게 출가하였다. 서녀(庶女)는 송린(宋璘)에게 시집갔는데, 집안 노비의 소생이다.

장남 부사(府使)의 아드님인 처형(處亨)은 별좌(別坐)이고, 처정(處貞)은 만호(萬戶)이며, 딸은 제학(提學) 김관직(金寬直)과 남정소(南廷召)?정심(鄭深)?신영석(申永錫)과 종실인 부정(副正) 이경(李?)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정랑의 서녀(庶女)는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정민공의 아들로 처겸(處謙)은 수찬(修撰)이고, 처함(處?은 수선(修繕)이며 처근(處謹)은 박사(博士)이다. 김응기의 아들은 아무개이며, 송린의 아들은 사련(祀連)으로 바로 신사년(1521)에 외가를 모함하여 화를 일으킨 자이다.

공은 선대의 명망과 덕을 이어받고 다섯 형제가 우애하여 이미 엄정(嚴正)하고 뛰어나게 영리하였으며, 조정을 도와 장차 큰 일을 할 듯하였다가 끝내 굴절되고 펴지 못하였다. 또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신유년의 재앙에 정민공(貞愍公) 네 부자(父子)가 나라를 걱정하고 도(道)를 지키다가 모함을 받아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니, 이를 어찌 차마 형언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후손들이 침체하여 떨치지 못하고 마치 서리 맞은 나무와 같이 되었으며, 샛별처럼 듬성듬성 남아 있게 되었다.

(5) 안공 인후(安公 仁厚)
 공의 휘는 인후(仁厚)이니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선생 휘 향(珦)의 7대손이다. 아버지는 휘 경(璟)이시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배천조씨(白川趙氏)이시다. 공은 찬성공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지절(志節)이 강개(慷慨)하고 기백이 뛰어나 성균관 유생의 신분을 접고 무과(武科)에 급제하시었다. 형님 사형제는 문과에 급제 하셨는데 공만 무과에 급제하시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병마절절도사 (忠淸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으며 뒤에 증손인 좌의정 현(玹)이 귀하게 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여러 번 병란(兵亂)으로 증거 할만한 문헌(文獻)이 없어 나신 해, 돌아가신 해, 자 호 등 이력을 알 수 없어 안타깝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옥천 전씨(沃川全氏)로 아버지는 의(義)인데 진의부위(眞義副尉)를 지냈고, 할아버지는 귀덕(貴德)으로 봉사(奉事)를 지냈고, 증조(曾祖)는 비(備)로 사복소경(司僕少卿)을 지냈다.

공은 3남 3녀를 나으셨다. 장남인 성(珹)은 천문학습독관(天文學習讀官)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2남인 공(珙)은 습독(習讀)으로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3남인 사전(嗣全)은 찰방(察訪)을 지냈다. 장녀는 임견수(林肩岫)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현감 송계종(宋繼宗)에게 출가하였으며, 3녀는 습독(習讀) 오자연(吳自衍)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산석(山石)이다.

손자 순필(舜弼)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순좌(舜佐)는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냈다. 손녀는 조무(趙珷)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상은 큰집의 소생이다.

손자 순수(舜壽), 순명(舜命), 순담(舜?)과 진사 이훈(李薰)과 김수(金銖)에게 출가한 손녀는 둘째 집 소생이다. 상장(上將) 순원(舜元)과 첨정(僉正) 순개(舜凱) 및 훈도(訓導) 정연(鄭淵)과 참판(參判) 고극함(高克?)과 서고(徐固)에게 출가한 손녀는 막내집의 소생이다. 순복(舜福)은 산석(山石)의 소생이다.

공의 묘소는 배천[白川]의 호산(虎山)에 계신 찬성공(贊成公)의 묘소 남쪽 기슭 진좌(辰坐)에 있으며, 부인의 묘소는 옥천군(沃川郡)옥천읍(沃川邑) 서오리(西五里) 서정자(西亭子) 당곡(唐谷) 유좌(酉坐)의 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