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순흥안씨 찬성공파 21대 후(厚)자 택(宅)자님의 후손을 찾고자 합니다.
시조 1세 자미
2세 영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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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璟
11세 仁厚
12세 珙
13세 舜命
14세 瑾
15세 輔國
16세 珽
17세 守先
18세 頊
19세 處仁
20세 必明
21세 厚宅
20세 必明 자(子)에 宣宅 , 厚宅 두분이 계시는데
순흥안씨 찬성공파 전자족보 1417~1419 페이지에 보면 厚宅님은 자손이 없는지 후손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집에 있는 순흥안씨세계(順興安氏世系)에는
21세 厚宅
22세 濟龍 字 龍圭
23세 亨 字 正* 한자를 찾지 못했는데 几자 머리위에 삐친 점이 있는 글자입니다.
24세 儒玄 字 君孟 현조부
25세 秀八 字 永西 고조부
26세 元福 字 成午 증조부
27세 敬煥 字 國先 조부
28세 正泰 선친
위와 같이
저희집에 있는 순흥안씨세계(順興安氏世系)에는 쭉 연결이 되어 내려 오는데 전자 족보에는 연결이 없어
21세 厚宅님의 후손이시거나 족보상 후손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아시는 분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순흥안씨 찬성공파 21대 후(厚)자 택(宅)자님의 후손을 찾고자 합니다.
시조 : 자미(子美) 상호군공(上護軍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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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영유(永孺) 추밀공파(樞密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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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부(孚) 태사공(太師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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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향(珦) 문성공(文成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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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晦軒 文成公(初諱: 裕) 회헌 문성공(처음의 이름: 유)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휘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이다. 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현의 칭호인 子(자)라 불리는 분은 오직 회헌(문성공) 선조 한 분 밖에 없다. 1306년 9월 12일(고려 충렬왕, 병오년 갑신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호(諡)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장지(葬地)를 장단의 대덕산에 내렸다. 조선 문종의 어휘(御諱)와 같은 이름(珦)이라서 유(裕)로 바꿔 부르다가 나중에 [향]으로 환원했다. 충숙왕 무오년(1318년), 문묘에 초상화를 봉안했다. (영정 : 국보제 111호) 충숙왕 기미년(1319년),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유상(儒像)은 여러본(本)이 있는데,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충주(忠州)의 도통(道統) 연기(燕岐)의 합강(合江) 진주(晋州)의 도통(道統) 순흥(順興)의 대룡산(大龍山) 송도(松都)의 한천(寒泉) 철원(鐵原)의 모성(慕聖) 장흥(長興)의 만수사(萬壽祠) 재령(載寧)의 문천(文泉) 백천(白川)의 송성영당(松城影堂) 시흥(始興)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나주(羅州)의 집성(集成) 곡성(谷城)의 도동(道東) 중국 공자(孔子)의 사당 등에 봉안되었다.
안향(安珦) 시대 : 고려시대
국적 : 한국
생몰년 : 1243(고종 30)∼1306(충렬왕 32)
정의 : 고려 충렬왕 때의 유학자(儒學者)
생 애
초명은 유(裕)이고, 자는 사온(士蘊)이며, 호는 회헌(晦軒)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으로 경북 순흥 출신이며, 안부(安孚)의 아들이다.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하고, 교서랑(校書郞)·감찰어사가 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고, 원나라에 가서 처음으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유교를 정통이라 여기게 되어 그 책을 베끼는 한편, 공자(孔子)와 주희(朱熹)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그 후 문교진흥(文敎振興)과 인재 양성을 위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으며,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와 72현(賢)의 초상과 제기(祭器)·악기(樂器)·경서(經書)·제가서(諸家書) 등을 구해오게 하는 등 고려 말기 유교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사 상
그가 전한 주자학은 당시 원나라의 학풍을 이끌어온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리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心性修養)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聖人)의 도(道)는 일용윤상(日用倫常) 속에서의 효(孝)·충(忠)·신(信)·경(敬)·성(誠)이라는 실천적 덕목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倫理)를 경시하고 의리(義理)에서 벗어났다고 배척하였는데, 주희는 저술을 통해 불교를 배척한 공이 높았으며, 공자의 학문은 바로 주희의 학문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다. 또 주희의 화상을 벽에 걸어 두었으며, 주희의 호(號)인 회암(晦庵)의 회(晦)자를 따서 스스로 회헌이라 하였다.
저 서
저서에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이 있다.
기 타
그는 죽은 뒤 1318년(충숙왕 5) 왕명에 의하여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의 가장 오래된 그림이기도 하다. 또 조선 중종 때 주세붕(周世鵬)이 순흥의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소수서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晦軒先生實紀 (古上 991.1 안92큁)
安珦 (1243∼1306) : 字 士蘊, 號 晦軒, 本貫 順興.
木板本. -[發行事項不明].
4卷3冊 : 年譜 : 29.5x20.6cm.
四周雙邊. 半匡 : 20x15.5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안향에 대한 사적을 모은 책이다. 안향은 1260(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75(충렬왕 1)년 상주판관(尙州判官) 때 미신타파에 힘썼고, 판도사좌랑(版圖司佐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고, 그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燕京)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1294년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로서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겸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하였고,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첨의참리세자이사(僉議參理世子貳師)를 지냈다. 1299년 수국사(修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한편, 섬학전(贍學錢)이란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육경(六經)·제자(諸子)·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인 1318(충숙왕 5)년에 충숙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이제현(李齊賢)의 초상화와 더불어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白雲洞)에 그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들었는데, 1549(명종 4)년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영주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 문성(文成)이다.
안향의 실기는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제1차로 1763(영조 38)년 17세손 극권(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과 세계비지(世系碑誌) 및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하였다. 판각사업을 도통사(道通祠)에서 하였기 때문에 인자연보에서는 이것을 "도통본실기"라 부르기도 한다. 책머리에 대제학 이정보(李鼎輔)를 비롯하여 박성원(朴聖源), 송명흠(宋明欽) 등의 서문이 있으며 안향의 16세손 석근(錫謹)의 발기가 있다. 제2차로 1816(순조 16)년 안재묵(安齋默) 등이 증보하였으며 홍석주(洪奭周)의 서문이 있다.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제3차로는 안명열(安明烈) 등이 1883∼1884(고종 20∼21)년 사이에 간행하였으며 민영목(閔泳穆)의 서문이 있다. 모두 4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안자연보에서는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4차로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으로 경남진주의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연산본실기(硯山本實紀)"라고 부른다. 5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이만도(李晩燾)의 서문이 있다. 【上溪光明室文庫】수장본은 "연산본실기"이다.
안향에 대한 연구자료로는 이 실기와 안자연보 등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회헌실기》에 대하여 윤용균(尹瑢均)은 그의 《윤문학사유고(尹文學史遺藁)》에서 그 역사적 가치와 신빙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김병구(金柄九)는 그의 《회헌사상연구》에서 대체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등의 기록과 일치하므로 이 실기의 자료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추정하였다.
序 : 李鼎輔, 朴聖源, 宋明欽.
重刊序 : 洪奭周.
三刊序 : 蘇輝冕, 金尙鉉.
四刊序 : 李晩燾, 鄭載圭.
目錄.
卷之 1. 遺集 : 詩.
奏 : 薦李?李玲等.
文 : 諭國子諸生.
卷之 2. 附錄 : 世系源流.
卷之 3. 附錄 : 年譜, 列傳, 行狀, 眞像.
卷之 4. 附錄 : 賜祭(英祖朝賜祭墓文, 正祖朝賜祭廟文, 太常朝賜祭墓文, 今上朝賜祭墓文), 祭紹修廟文, 祭墓文, 碑誌(墓誌, 墓碣銘, 神道碑銘, 松京遺基碑, 順興鄕閭碑), 祠院(紹修書院).
卷之 5. 附錄 : 祠院(臨江書院), 道東廟, 寒泉祠, 門人, 贊述, 補遺錄, 追遠, 報本壇, 祝文, 壇記.
跋 : 安錫儆, 鄭誾敎, 趙鎬來, 鄭泰鉉, 李商永, 金容禧.
안향(安珦)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晦軒先生實記(奎6882), 安克權(朝鮮)編.
1冊(76張) 圖 肖像 筆寫本 26.4×18.9cm.
序:閔泳穆·金尙鉉.
高麗 忠烈王 때의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鼻祖로 추앙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 등을 수록한 책으로서 後孫 克權이 1764년(英祖 40) 初刊했으며 享淳 등이 1884년(高宗 21) 3刊했다. 그러나 본 奎章閣本은 筆寫된 것으로서 筆寫경위나 연대 등은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본서는 목록과 序文 등에 의하면 4卷으로 되어 있으나 1冊2卷만이 남아있는 逸本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본관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1260년(元宗 1) 文科에 급제, 1275년(忠烈王11) 尙州判官으로 있으면서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는데 힘썼고 版圖 佐郞·殿中侍御史·國子司業 등을 지냈다. 그뒤 右司議·左承旨·征東行省員外郞 등을 거쳐 高麗儒學提擧가 되어 王과 공주를 扈從, 元나라에 들어가 《朱子全書》를 베껴썼고 孔子와 朱子의 畵像을 그려가지고 귀국해서 朱子學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각종 벼슬을 거쳐 1304년(忠烈王 30) 僉議侍郞贊成事, 判版圖司事가 되었다. 한편 文敎의 진흥을 위해 贍學錢이라는 育英財團을 설치했으며 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孔子의 초상화를 비치했고 祭器·樂器와 六經·諸子·史등의 서적을 사들였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朱子學者(東方道學之祖)로 지칭되었다. 朝鮮 中宗때 豊基郡守 周世鵬이 順興의 白雲洞에 安珦의 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만드니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책머리에는 目錄에 이어 閔泳穆의 三刊序(1884), 金尙鉉의 續刊序(1883), 蘇輝冕의 序文(1882), 李鼎輔외 序文(1763), 朴聖源의 序文(1764), 宋明欽의 序文(1764), 洪奭周의 序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1}:遺詩 5수(題學宮, 贈太守李蘊古, 題松京甘露寺, 侍從忠宣王如元時感昑, 聯句), 次韻 1수(次晦軒安相國韻·白元恒), 遺文 2편(薦李산李진等奏, 諭國子諸生文), 眞像贊詩 4수(아들 于器, 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眞像贊文 4章(金尙憲, 申翊聖, 15代孫 重觀 등), 年譜(19代孫 在默編), 長湍墓祀記, 英廟朝致祭文, 正廟朝華城聖廟告文成公文, 今上致祭文. 遺文 중 「薦李산李塡等奏」는 密直副使致仕 李산과 典法判書 李진을 經史敎授都監使 교수로 천거한 내용이며「諭國子諸生文」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倫理로서 孝, 忠, 禮, 信, 修己하면 반드시 이룬다고 지적한 후 佛敎는 蔑倫悖義한 夷狄의 敎라고 비난하면서 저간의 好讀佛書의 경향을 개탄하고 諸生들은 新書를 읽고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권2}:麗史列傳, 言行記(申翊聖), 神道碑(大司成 金世濂), 墓誌(14代孫 應昌), 順興鄕閣碑 2章(鄭斗卿 등), 松京遺墓碑 2章(應昌, 金應祖), 諸賢記述, 諸賢詩律 6수(崔瀣, 權近, 李滉 등), 紹修院題詠 6수, 長湍墓致祭日感行 3수. 그리고 目錄에 보이는 {권3}과 {권4}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3}:順興白雲洞書院院誌, 建祠時開墓祝文, 奉安眞像跋, 配祀文貞文敬兩公時告文, 與安牧使瑋安承旨玹書, 上方伯沈通源書, 賜額紹修書院誌, 紹修書院記, 與愼齋周副學書, 答黃正字俊良書, 禮判答豊基郡守張文輔書, 禮曹移文, 禮判上安右相玹書, 眞像改修誌, 祭廟院文 8章, 竹溪辭 3章, 道東曲 9章, 配祀周愼齋時告文, 院規, 白雲洞書院田畓目錄, 祭式, 白雲洞文成公廟創建識, 白雲洞秋 享後序, 鳳岑書院長請狀, 書院通太學文, 太學通諭諸校院文, 上樑文, 重修上樑文, 禮曹回啓, 谷城道東祠記, 松都寒泉祠營建時文, 桃洞祠宇營建時告家廟文, 祠壇記, 館僕報來祝文, 長湍墓閣重修上樑文. {권4}:保宥錄, 世系錄, 門人錄, 太學館儒通諭諸道校院文. 序跋. 본서는 朱子學의 傳來와 발전, 계승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계승과 발전 등의 부문을 잘 밝혀줄 수 있는 {권3}과 {권4}가 없어진 것이 아까운 일이다.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安在默, 1820년 (순조20)
4권2책. 필사본. 18. 9 30. 0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1820년에 後孫 安在默이 간행한 중간본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本官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563을 참조할 것). 安珦은 동방 유학의 鼻祖로 생각되었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문집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安在默의 중간 跋文에 의하면, 初刊本이 소략한 것을 염려하여 年譜를 만들고, 肖像과 墓圖를 附錄하여 1820년 重刊本을 간행하였다 한다. 본서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李鼎輔(1763), 朴聖源, 宋明欽(1764)등이 쓴 晦軒先生實紀序와 洪奭周, 李友信이 쓴 晦軒先生實紀重刊序 그리고 目錄이 있다. {卷一}에는 詩(題學宮) 몇 수와 〈薦李李 奏〉라는 奏文이 있는데, 李 과 李 을 經史敎授都監使 敎授로 천거한 내용이며, 〈諭國子諸生〉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윤리이므로 忠, 孝, 禮, 信, 修己하면 도를 이룰수 있다고 하면서, 불교는 虛妄한 夷狄임을 개탄한 내용이다. 그 다음에 遺像과 文成公의 墓山圖가 부기 되어 있고, 眞像에 대한 여러 사람들(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金尙憲, 申翊聖, 安重觀 등)의 贊詩가 있다. 이어서 후손인 安在默이 쓴 안향의 年譜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卷二}는 附錄으로 鄭麟趾가 쓴 〈麗史列傳〉 가운데서 안향 관련 사항을 초록하였고, 申翊聖이 쓴 안향의 言行記가 있다. 한편 神道碑(1633, 金世濂), 順興鄕閭碑(鄭斗卿), 墓誌(1656, 安應昌), 松京遺基碑(安應昌, 金應祖)등의 묘비와 함께, 諸賢記述이라 하여 여러 사람들의 시문이 부기 되었다. 가령 次李東菴追慕安文 成公韻(崔瀣), 安史官垂宅飮贈歌(權近) 등으로 이외에도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등의 시와 周世鵬이 쓴 白雲洞次白鹿洞賦가 있다. {卷三}은 御製(正宗大王)와 長湍墓謝祭文, 墓祭文(閔聖徽), 長湍墓祀記(安羽濟), 順興紹修書院開基告文등의 致祭文과 周世鵬이 쓴 奉安遺像跋, 竹溪辭三章, 道東曲九章, 配祀文貞文敬公時告文 등이 있다. 그리고 백운동 서원과 관련 周世鵬이 안향의 후손인 牧使 安瑋와 承知 安玹에 보낸 書簡文과 이외에 成世昌이 쓴 白雲洞書院記 등 수편의 書院記와 春秋享祝文, 告文, 上樑文 등이 있다. {卷四}는 後孫인 安應昌이 태종 이후 안향과 관련한 史蹟을 補錄한 〈保宥錄〉과 그 序跋(申翊聖, 洪遇森)이 있다. 그리고 世系錄과 안향의 門人錄으로 權溥, 禹倬, 白 正, 李 , 李兆年, 李晟 등 數人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安錫儆이 쓴 晦軒先生實紀跋과 安翊采가 쓴 晦軒先生實紀重刊跋이 있다. 본서는 우리 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의 實記인 만큼 朱子學의 전래와 발전, 계승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김 호)
晦軒先生實紀 {2} 〈一蓑 고819. an1h〉
安享淳, 1884년(고종21)
4권2책, 목판본, 19. 0 30. 6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安享淳이 1884년에 三刊한 것이다. (安珦에 대해서는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463을 참조할 것). 安珦의 시문집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고,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1820년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晦軒先生實紀》{1} (고4655-27B-1) 이다. 한편 본 《晦軒先生實紀》는 安享淳의 跋文에 의하면 그가 湖南을 여행하다가 宗親 安相溶을 만나, 이전의 《晦軒先生實紀》가 漏落됨이 많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시 重刊本을 편찬하기로 하고서, 안향의 文籍 三章과 시문 一首 등을 엮어 三刊한 것이라 한다. 중간본과 비교하여 볼 때, 순서 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이며 대동소이하다. 다만 三刊하면서 添加된 내용은 新增이라고 표시하였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은 먼저 蘇輝冕가 쓴 晦軒先生實紀三刊序와 目錄이 있다. 그리고 {卷一} 이하의 내용은 순서 상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와 大同小異하다. 신증된 내용은 白雲洞題 이라 하여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 吳命修 등의 시문과 李滉, 安應昌등이 쓴 謁廟院文이 있다. (이하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晦軒先生實紀{3} 〈고4655-27A-1〉
安明烈, 1884년(高宗21)
4권2책, 목판본, 19. 4 29. 7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을 엮은 시문집으로 1884년 安明烈이 三刊한 것이다. 안향의 시문집은 1764년(영조40) 安克觀의 초간본과 1820년(순조20) 安在默의 중간본, 그리고 1884년 安享淳의 三刊本이 있다. 그러나 重刊本을 다시 간행한 三刊本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본서의 跋文을 쓴 安明烈은 三刊本으로 安享淳의 것이 있지만, 누락된 것을 보충키 위해 다시 중간본들을 검토, 三刊本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실기의 내용에 첨가된 것은 新增이라 표시하였으며 다른 三刊本의 新增 내용은 작은 글씨로 표시하였고, 본서 간행시 신주된 것은 본문과 같은 크기로 '新增'이라 표시 하였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은 먼저 目錄과 閔泳穆이 쓴 軒先生實紀三刊序 그리고 金尙鉉, 蘇輝冕등이 쓴 軒先生實紀續刊序가 있고 이하 {卷一}에서 {卷四}까지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신증된 내용으로 松京遺基碑(新增 安應昌), 次晦軒先生題學宮韻(新增 李滉), 次晦軒先生題松京甘露寺韻(新增 李堅幹), 致祭晦軒先生墓日感作(南胤寬, 吳明修 新增), 祭院廟文(新增)등이 있다.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晦軒先生實紀{4} 〈고 4655-27-1〉
편자 미상→安章甫, 연기미상→1883년(高宗20)이후
5권2책. 영본, 목판본, 20. 2 30. 5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 등을 엮은 그의 후손 安章甫가 19세기 후반 엮은 시문집으로 四刊本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463을 참조할 것). 本書 四刊 序文을 쓴 鄭載圭에 의하면 이미 《晦軒先生實紀》가 누차 간행되었고 또 1883년(고종20)에도 三刊本이 발간되어 嶺南 지역에 널리 퍼졌으나, 여전히 각 판본마다 차이와 漏落이 많자, 안향의 후손 安章甫가 이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다시 四刊本을 준비, 刊行하게 되었다 한다. 본서는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권5}는 附錄으로 다루어진 것 같으나 現傳하지 않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다. 아마 여러가지 史籍에서 추록하여 增補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기의 순서와 내용으로는 먼저 晦軒先生實紀序(李鼎輔, 朴聖源, 洪奭周)와 蘇輝冕, 金尙鉉 등이 쓴 晦軒先生實紀三刊序 등 기간의 서문이 있고, 李晩燾, 鄭載圭가 四刊本을 간행하면서 쓴 晦軒先生實紀四刊序가 있다. 이하 目錄, {卷一}부터 卷四까지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와 대동소이하다. (자세한 실기의 내용은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의 해제를 참고할 것). (김 호)
晦軒先生實紀 {1} 〈고4655-27B-1〉
安在默, 1820년 (순조20)
4권2책. 필사본. 18. 9 30. 0cm.
고려 忠烈王 때 名臣, 學者로서 東方道學의 始祖로 추앙 받는 安珦(1243-1306)의 詩文 약간과 行蹟 및 遺事등으로 엮은 시문집으로, 1820년에 後孫 安在默이 간행한 중간본이다. 安珦의 初名은 裕, 字는 士蘊, 號는 晦軒, 本官은 順興이며, 密直副使 孚의 아들이다. (안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 도서 해제》 〈사부3〉 p. 563을 참조할 것). 安珦은 동방 유학의 鼻祖로 생각되었으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문집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764년(영조40)에 안향의 후손이었던 安克觀이 시문집을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그후 遺事와 年譜를 보충하여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安在默의 중간 跋文에 의하면, 初刊本이 소략한 것을 염려하여 年譜를 만들고, 肖像과 墓圖를 附錄하여 1820년 重刊本을 간행하였다 한다. 본서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李鼎輔(1763), 朴聖源, 宋明欽(1764)등이 쓴 晦軒先生實紀序와 洪奭周, 李友信이 쓴 晦軒先生實紀重刊序 그리고 目錄이 있다. {卷一}에는 詩(題學宮) 몇 수와 〈薦李李 奏〉라는 奏文이 있는데, 李 과 李 을 經史敎授都監使 敎授로 천거한 내용이며, 〈諭國子諸生〉은 聖人의 道는 日用의 윤리이므로 忠, 孝, 禮, 信, 修己하면 도를 이룰수 있다고 하면서, 불교는 虛妄한 夷狄임을 개탄한 내용이다. 그 다음에 遺像과 文成公의 墓山圖가 부기 되어 있고, 眞像에 대한 여러 사람들(崔文度, 洪瑞鳳, 李景奭, 金尙憲, 申翊聖, 安重觀 등)의 贊詩가 있다. 이어서 후손인 安在默이 쓴 안향의 年譜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卷二}는 附錄으로 鄭麟趾가 쓴 〈麗史列傳〉 가운데서 안향 관련 사항을 초록하였고, 申翊聖이 쓴 안향의 言行記가 있다. 한편 神道碑(1633, 金世濂), 順興鄕閭碑(鄭斗卿), 墓誌(1656, 安應昌), 松京遺基碑(安應昌, 金應祖)등의 묘비와 함께, 諸賢記述이라 하여 여러 사람들의 시문이 부기 되었다. 가령 次李東菴追慕安文 成公韻(崔瀣), 安史官垂宅飮贈歌(權近) 등으로 이외에도 李滉, 朴承健, 黃俊良, 尹卓然, 趙士秀, 金昌翕, 南胤寬등의 시와 周世鵬이 쓴 白雲洞次白鹿洞賦가 있다. {卷三}은 御製(正宗大王)와 長湍墓謝祭文, 墓祭文(閔聖徽), 長湍墓祀記(安羽濟), 順興紹修書院開基告文등의 致祭文과 周世鵬이 쓴 奉安遺像跋, 竹溪辭三章, 道東曲九章, 配祀文貞文敬公時告文 등이 있다. 그리고 백운동 서원과 관련 周世鵬이 안향의 후손인 牧使 安瑋와 承知 安玹에 보낸 書簡文과 이외에 成世昌이 쓴 白雲洞書院記 등 수편의 書院記와 春秋享祝文, 告文, 上樑文 등이 있다. {卷四}는 後孫인 安應昌이 태종 이후 안향과 관련한 史蹟을 補錄한 〈保宥錄〉과 그 序跋(申翊聖, 洪遇森)이 있다. 그리고 世系錄과 안향의 門人錄으로 權溥, 禹倬, 白 正, 李 , 李兆年, 李晟 등 數人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安錫儆이 쓴 晦軒先生實紀跋과 安翊采가 쓴 晦軒先生實紀重刊跋이 있다. 본서는 우리 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의 實記인 만큼 朱子學의 전래와 발전, 계승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김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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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우기(于器) 문순공(文順公)
안우기(安于器) 순흥인
5世 안우기(安于器) *어조사 우, 그릇 기
할아버님 초휘(初諱)는 천(遷)이시고 자(字)가 허중(虛中)이시며 호(號)는 죽옥자(竹屋子),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선친(先親)이신 문성공의 위업(偉業)을 극계(克繼)하여 문아(文雅)로 현명(賢明)하셨다. 1265년 고려(高麗) 24대 원종 6년 을축생(乙丑生)이시다. 1282년 충열왕 8년 약관 18세의 홍안소년으로 문과(文科)에 등과하셨다. 그후 조정(朝廷)에 몸담아 국학제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사헌(大司憲),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檢校僉議), 찬성사겸판전의시사(贊成事兼判典儀寺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순평군(順平君)에 봉군(封君)되셨다. 1329년 즉 충숙왕 16년 기사(己巳) 9월 12일 향수(享壽) 6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봉향되셨다.
영주문화 > 영주의 역사인물 > 고려시대
안우기(安于器 1265 ~ 1329) 자는 허중(虛中), 호는 죽옥자(竹屋子),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문성공(文成公) 향(珦)의 아들로 어머니는 우사간(右司諫) 김녹연(金祿延)의 딸이다.
-. 충렬왕 8년(1282)에 문과(文科) 급제하였다.
-. 고공정랑(考功正郞), 우승지(右承旨),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贊成事) 등을 지내다.
-. 시호(諡號)는 문순(文順)이다.
順平君 文順公 (순평군 문순공 ) 五世(一派)
고려시대(高麗時代) 元宗(원종)때인 1365년(을축년)에 문성공의 아들로 출생하셨다. 초휘는 천(遷)이고, 자(字)는 허중(虛中)이며, 호(號)는 죽옥자(竹玉子)이다. 충렬왕 임오년인 1282년에 문과 급제하여 翰林知制誥(한림지제고)와 詞林(사림), 寶文閣(보문각)의 두 待制(대제)와 國子(국자)의 祭酒(제주)를 지냈다. 1301년 제주로 있을시 崔凝(최응) 과 함께 과거를 주관했다. 1304년 우부승지, 이듬해 밀직부사를 거쳐 匡靖大夫 檢校僉議 贊成事 兼 判典儀寺事(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 겸 판전의사사)를 역임했다. 충숙왕1년(1314년)에 지밀직으로 박사 柳衍(유연)등이 새로 구입한 經籍(경적) 10,800권을 검열하였다. 1316년 대사헌에서 파직되고 후임으로 趙珝(조후)가 임명되었다.
일찍이 合浦(지금의 마산)에 出鎭(출진)하였을때 청렴과 재간으로 칭찬이 자자했다. 公望(공망)은 있었으나 안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식자들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1329년 9월 12일 (고려 충숙왕 기사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65세였다. 順平君(순평군)에 봉해지고, 시호를 文順(문순)이라 하였으니, 이는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함을 文(문)이라 하며, 자애로워 두루 사람들이 복종함을 順(순)이라 했다. 1822년(순조 임오년)에 순흥의 龍淵詞(용연사)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철원군군부인 최씨氏(鐵原郡君夫人 崔)로 부친은 문하시중 沖若(충약)이고 조고는 문하평장사 징이고, 증조는 이부상서를 지낸 臣胤(신윤)이다. 후배는 郡君夫人 李氏로 판관공파 파조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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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목(牧)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 순흥인
6世 안목(安牧) * 기를 목, (다스릴 목)
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高麗) 25대 충열왕 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 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忠誠)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신 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餘生)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純祖) 임오(壬午)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문숙공(文淑公)휘 ) 6 世 (1파)
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
1290년 (충렬왕, 경인년)에 출생한 휘목(安牧)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향(向)의 손자이고, 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檢校僉議 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자(字)는 익지(益之), 호(號)는 겸재(謙齋)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배위는 화평군부인 김씨(化平郡夫人 金氏)이며, 첨의중찬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김태현(台鉉)의 딸이다.
관직 및 업적
1315년(충숙왕)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1330년(충숙왕 원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해)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1339년(충숙왕, 기묘년)에 장령(掌令)으로서 전주(銓注)를 관장하여 공신(功臣)의 관작을 하사받았다. 그뒤 밀직제학 밀직부사를 거쳐 1348년(충목왕 4)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1352년(공민왕 1) 서연시독관(書筵侍讀官)을 지냈다.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에 이르렀다. 정계에서 은퇴한 말년에는 파주(坡州)의 교외에서 시(詩)를 벗 삼아 한가로운 여생을 보냈다.
제향
360년 5월 (공민왕 경자년)에 별세하니 71歲로 장수하셨다.
조정에서는 순흥군(順興君)에 추봉하고, 문숙(文淑)이란 시호를 내렸다.
1822년(순조, 임오년)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제향되었다.
영주문화 > 영주의 역사인물 > 고려시대
안목(安牧) 호는 겸재(謙齋)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찬성사(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로 어머니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충약(崔冲若)의 딸이다.
-. 충숙왕 2년(1315)에 문과(文科) 급제하였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 서연관(書筵官)등을 지내다.
-. 시호(諡號)는 문숙(文淑)이다.
묘(墓)
고조하 자좌(子坐) 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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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 원숭(元崇) 문혜공(文惠公)
안원숭(安元崇) 순흥인
7世 안원숭(安元崇) *으뜸 원, 높을 숭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순성군(順城君) 문혜공(文惠公) 7世 (1파)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문혜공 휘 원숭의 初諱(처음의 이름)는 정(靖)이다. 1309년(고려 충선왕1년,기유년)에 출생하였다. 문숙공 목(牧)의 아들이고, 문순공 우기(于器)의 손자이며, 회헌 문성공 향(向)의 증손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년,신사년)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언(代言)을 역임했다. 판서(判書)로 있다가 전주(全州)로 부임했었다. 전주에 나가 있을 때에는 학교(유교)의 육성발전에 크게 진흥했다. 그 후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을 제수 받았다. 순성군(順城君)이란 봉호를 받고 얼마 후에 병으로 별세했다. 묘소는 회헌선조의 묘소아래 자좌(子坐)이다.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초하루이다. 조정에서는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1822년(임오년, 순조22)에 순흥의 용연사(順興 龍淵祠)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辰韓國大夫人 原州元氏)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원선지(元善之)의 딸이다.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 바 장남은 형조전서를 지낸 경질공 원(瑗)이며, 둘째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휘 조동(祖同: 양공공파조)이고, 셋째아들은 한림지제고(翰林知製誥)를 지낸 휘 수(垂: 한림공파조)이다. 장녀는 우사간(右司간) 김사렴(金士廉)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상시(右常侍)를 지낸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전룡(奇田龍)에게 출가, 셋째딸은 창녕부원군 독곡 성석린(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에게, 다음은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추(金錘)에게 출가했고, 다섯째딸은 좌랑(佐郞) 김수(金垂)에게 출가했고, 막내딸은 판중추(判中樞) 유원지(柳元之: 좌의정 柳曼殊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영주문화 > 영주의 역사인물 > 고려시대
안원숭(安元崇)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겸재(謙齋) 목(牧)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승 김태현(金台鉉)의 딸이다.
-.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지내다.
-.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묘(墓)
문성공 묘하(墓下) 자좌(子坐)지원 쌍분(雙墳)으로 모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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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 원(瑗) 경질공(景質公)
조동(祖同) 양공공파(양공공파), 수(수) 한림공파(한림공파)
안원(安瑗) 순흥인
8世 안원(安瑗) *도리옥 원
호(號)가 서암(瑞巖)이시다. 1332년 즉 고려(高麗) 28대 충숙왕 복위(復位) 원년(元年) 임신생(壬申生)이시다. 1353년 공민왕(恭愍王) 2년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한원(翰苑)에 보직(補職)되셨다. 그 후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하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오르셨는 바 당시 고려는 명(明)나라의 끈질긴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왜구(倭寇)의 준동(蠢動)등등 주변국의 극성(極盛)으로 국정(國政)이 불안정한 난국에 조정의 고위요직을 맡아 국난극복(國難克服)에 진충보국하셨다. 이때 왕(王)이 공은 가히 이 나라의 충신(忠臣)이오 라고 공로(功勞)를 높이 찬양 치사했다고 한다. 1390년 공민왕2년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함이 옳다고 상소(上疏)를 올린일이 있는데 그 상소문(上疏文)의 첫구절을 보면 “위국지본(爲國之本)은 재호득인심(在乎得人心)하고 득인지요(得人之要)는 재호찰사정(在乎察事情)이니 차왕정지소 당선야(此王政之所當先也)라” [以下略] 이렇게 시작해서 우선 국정쇄신(國政刷新)과 위기국난 타개(危機國難 打開)가 당면(當面)한 구국과제(救國課題)인즉 이 이시점에서 천도는 상책이 아님을 강조 설파하였던 것이다.
1392년 고려(高麗)가 망하고 이조(李朝)가 개국(開國)되자 포은당(圃隱黨)관게로 정몽주(鄭夢周) 등과 같이 일시 유배(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 후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고관(高官)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의지를 굳히시고 모든 공직을 사양(辭讓)하셨는 바 한성천도(漢城遷都)후에 왕의 특명(特命)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명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는데 끝내 사양(辭讓)하시고 취임(就任)을 아니하셨다.
말년(末年)에는 서원(瑞原) 농서(農墅)에서 시문(詩文)을 즐기시며 조용히 여생(餘生)을 지내셨다. 1411년 신묘 11월13일 향수(享壽) 80세에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경질(景質)공 이란 시호(諡號)를 받었다.
세향은 매년 음10월1일인 바 망향제로 올린다.
경질공(景質公) (1파) 8 世
봉익대부 형조전서(奉翊大夫 刑曹典書)
1332년(고려 충혜왕 2년 ,임신년)에 출생하였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 大提學) 문혜공(文惠公) 휘 원숭(元崇)의 맏아들이다. 고려말의 유학자 문성공 휘 향(珦)의 5世孫이며, 문숙공 휘 목(牧)의 손자이다. 호(號)는 서암(瑞巖)이며 고려말 ~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353년(공민왕 2 계사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 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포은 정몽주의 도당이라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한뒤 왕이 직접 공께 찾아와서 간청함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大學衍義), 통감집람(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 뒤 1404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 개성유후를 역임했다. 시호를 경질(景質)이라 하였으니 의(義)를 따라서 일을 함에 경(景)이라 하고, 명실(名實)이 어긋나지 않음에 질(質)이라 한다. 서원(瑞原)의 별장에서 거처하다가 1411년(태종 11)에 타계하셨다. 묘소는 문성공의 묘소 남쪽 기슭 유좌(酉坐)이다. 1822년(순조 임오년)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배향되었다. 개성(開城)의 표절사(表節祠)에 배향되었다. 配位는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며, 전리판서 남휘주의 딸이다. 맏아들 판서공 (이조판서 諱 從約)만을 낳고 타계 하셨다. 後配는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로 영평군(鈴平君)에 봉군된 윤척의 딸이다. 윤씨께서는 장자인 판서공을 제외한 5남5녀를 낳으셨다. 따라서 경질공께서는 11남매를 두셨다.
영주문화 > 영주의 역사인물 > 고려시대
안원(安瑗 1332 ~ )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 공민왕 2년(1353)에 문과(文科) 급제하여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지내다.
-. 시호(諡號)는 경질(景質)이다.
묘(墓)
문성공조 남록 유좌(酉坐)지원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고 개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추향(追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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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 종약(從約) 판서공(判書公)
안종약(安從約)
통정대부 이조참의 판서공 (通政大夫 吏曹參議 判書公) 9 世 (1파)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경연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추증. 1355년(공민왕4,을미년)에 중경(中京)의 양온동에서 출생한 휘종약(從約)은 원(8世,경질공)의 장남이다. 공의 조고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순성군에 봉해진 문혜공 휘 원숭이다. 삼중대광 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 향(向)의 5대손이고, 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檢校僉議 贊成事)로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순공인 휘 우기(于器)의 현손이다.
관직 및 업적
무진년 1388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성품이 정직하고 엄격하여 풍도를 굳게 지켰으며, 기백이 웅장하였다.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매양 준마를 타고는 천 길 절벽을 달려 내려가기를 평지와 같이 하였으며, 화살을 서로 연달아 쏘면 한번도 빗맞는 적이 없으니, 당시에 권력가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추존하여 천조참의(天曹參議)에 임명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내 두문동(杜門洞)의 여러 분들과 뜻을 말하고 의리를 나타냈으니 어찌 벼슬길에 구차하니 나갈 수 있겠는가"하였다.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玖)에게 준 시(詩)에 '모름지기 고사리를 뜯어먹는 사람이 되겠다.'는 싯귀가 있으니, 여기에서도 뜻을 가탁(假託)한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번 외직(外職)을 제수하자, 마침내 억지로 부임하여 열 두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간략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추호(秋毫)도 범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은혜롭게 여겼다. 임천(林川)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등으로 관아가 온통 귀신의 소굴로 폐기되어 있었다. 공이 관아로 들어가려고 하자 관리와 백성들은 울며 만류하였다. 공은 결연히 미신을 타파하고 폐해를 깨끗이 없애고 정리하였다. 고을의 남쪽에 소울음이 울리는 옛 우물과 붉은 난삼(난衫)을 입은 대나무 숲속의 처녀귀신과 보광사(普光寺)의 간사한 중이 뱀으로 화한 것과 서원(瑞原)에 귀신이 씌어서 미친 병을 일으킨 것을 모두 제어하니 당시 사람들은 공이 정대(正大)하고 강의(剛毅)하여 능히 요망한 귀신과 괴이한 것들을 복종시키고 백성을 구제한 것을 존중하였다.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서원(瑞原)의 별장에 거주하면서 시서(詩書)와 거문고와 술로 한가롭게 지내며, 때로는 산수(山水)에 노닐고 고기잡이와 사냥에 즐거움을 붙였으며, 세상의 영화와 이익에 있어서는 초연하여 공중을 지나가는 뜬 구름과 같이 여겼다.
묘소
1424년(세종6,갑진년) 3월 8일에 별세하니 70歲로 장수하셨다. 묘소는 교하(交河)의 아곡방(阿谷坊) 서현(鋤峴) 야동(冶洞) 신좌(辛坐)이다.
배위 및 후 손
배위는 정부인 동래정씨(貞夫人 東萊鄭氏)로, 삼중대광 봉원부원군인 양도공(良度公) 정량생(鄭良生)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 바 장자는 직제학을 지낸 구(玖)로 참찬에 추증되었으며, 둘째는 판윤(判尹)을 지낸 경(璟)으로 찬성에 추증되었고, 셋째인 수(琇)는 직장(直長)이며,막내인 리(理)는 군수(郡守)이다. 사위로는 판서 성염조(成念祖)와 현감을 지낸 박수지(朴遂智)이다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안종약(安從約) (창왕조) 안순(安純) (창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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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경(璟)
시대(時代) : 조선조(朝鮮朝)
안경(安璟) 한성부윤(漢城府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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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인후(仁厚)
安仁厚(안인후, 兵判公 병판공)
세종 29년 정묘년(1447년)에 무과에 올랐으며,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뒤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벼슬을 받았다.
산소는 호산(虎山)안골의 선영 남쪽 기슭에 진좌(辰坐)로 모셨으며, 비석을 세웠다.
음력 시월보름에 세사를 모신다.
후손인 억(檍)이 기록(誌)을 지었으며, 교리(校理) 재린(在麟)이 유사(遺事)를 지었다. 아울러 총록(總錄)에 기록되어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옥천전씨(沃川全氏)이며, 그 아버지 진의(進義)는 부위의(副尉義)에 이르렀고, 그 할아버지는 봉사(奉事) 귀덕(貴德)이며, 그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소경(司僕少卿)에 오른 비(備)이며, 그 외할아버지는 우헌납(右獻納)에 오른 탐진안씨 안도(安堵)로서 슬하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묘는 옥천 서정리(西亭子) 당골(唐洞)에 유좌(酉坐)로 모셨다.
음력 시월십일에 세사를 모신다.
후손인 억(檍)이 기록(誌)하였으며, 문경공(文敬公)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갈(碣)을 지었으며, 총록(總錄)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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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공(珙)
안공(安珙)
1派12世-찬성공파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가선(嘉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墓 光州 無等山 西魔 澄心寺(證心寺) 北柳橋石門 上卯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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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순명(舜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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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 근(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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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 보국(輔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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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 정(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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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 수선(守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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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 욱(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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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 처인(處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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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 필명(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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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 선택(宣宅), 후택(厚宅)
21세 : 후택(厚宅)
22세 :
23세 :
24세 : 유현(儒玄) 자(字) 군맹(君孟) 현조부
25세 : 수팔(秀八) 자(字) 영서(永西) 고조부
26세 : 원복(元福) 자(字) 성오(成午) 증조부
27세 : 경환(敬煥) 자(字) 국선(國先) 조부
28세 : 정태(正泰) 부친
29세 :
20세 必明 자(子)에 선택(宣宅), 후택(厚宅) 두분이 계시는데
순흥안씨 찬성공파 전자족보 1417~1419 페이지에 보면 厚宅님은 자손이 없는지 후손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집에 있는 순흥안씨세계(順興安氏世系)에는
21세 후택(厚宅)
22세 濟龍(濟龍) 字(字) 龍圭(龍圭)
23세 형(亨) 자(字) 정(正○) 한자를 찾지 못했는데 几자 머리위에 삐친 점이 있는 글자입니다.
24세 : 유현(儒玄) 자(字) 군맹(君孟) 현조부
25세 : 수팔(秀八) 자(字) 영서(永西) 고조부
26세 : 원복(元福) 자(字) 성오(成午) 증조부
27세 : 경환(敬煥) 자(字) 국선(國先) 조부
28세 : 정태(正泰)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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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에 계신 順興安氏 贊成攻破 31代 孫 安光勳의 誠金으로 建立했습니다.
順興安氏 贊成攻破 24世孫 安光祿부터 28대손 安鍾煥까지 納骨墓地 完成 했으니 里長하여 墓地管理 잘합시다.
24세 - 안광록(安光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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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 안석순(安錫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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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 안처실(安處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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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 안현식(安鉉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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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 안종환(安鍾煥),
2013년 10월 3일 순흥안씨 찬성공파 대종회 카폐지기 안광신(찬성공파 31대 손) 교장 부친 별세. 향년 98세 호상입니다. 호상이라 제대로 알리지 못 한 것 양해 드립니다.
발인은 2013년 10월 5일 장지는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 선영 입니다.
2013년 10월 7일 삼오 마치고 서울에 귀경 잘 하였습니다.
종친님들 너무나 감사 했습니다. 경주에 살고 계시는 안규영(점영)(찬성공파 29대 손) 할아버지께서 딸(30대손)안인숙과 같이
동행하여 조카(30대손 : 안연호) 장례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순흥안씨 찬성공파 30대손 안연호 옹 별세 향연 9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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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자 : 안광수(김연옥), 안광훈(조성현), 안광신(김광숙). 배상
(사위) : 안명숙:(망) 김동욱, 안천숙 : 차희영, 안경숙 : 홍순탁, 안인숙 : 이종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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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손 : 안상길, 안상현, 안상일. 안상권. 안상규.(외손) : 주희, 광일. 광진. 시표, 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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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증손 : 수영, 수빈, 수현, 수환, 수찬, 수성, 수민, 수혁, 수성
순흥안씨 찬성공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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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같은 사이트를 올려드립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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