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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돌아 본 가련봉
두륜봉 올라 가는 계단
올라 온 계단
두륜산 구름다리...안내판 사진과 비슷
두륜봉 갈림길 약 20여분..바삐 숨 가프게 올라 왔다.
두륜봉에서 본 가련봉
두륜봉 갈림길에서 진불암 쪽으로 하산길
하산하는데 이제 갈림길에 올라온 가을태양님
진불암으로 하산계단
꼭 달마산 도솔봉 통신안테나 같다. 달마산은 땅끝인데...저게 달마산 도솔봉이라면 더 높은 달마산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진불암 입구
진불암
참 고요하다.염불소리도 괭이 소리도 바람소리마저 없는...
님불암 은행나무
도솔봉중계소...지나는 분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 도솔봉은 두륜산 도솔봉이고 달마산 도솔봉은 달마산에 있다고...ㅋㅋㅋ
단풍이 아쉽다.낙옆이 수북히...
수북히 쌓인 낙엽..이삐당...
대흥사에 내려 오니 만일재에서 바로 하산하는 일행과 만난다. 반갑다.
초의대선사...풀로 만든 옷을 입고?
초의선사
[草衣禪師]
출생 - 사망 | 1786년 ~ 18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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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호 : 초의(艸衣), 일지암(一枝庵) |
본관 | 인동(仁同) |
성은 장(張)씨이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인 초의선(1786~ 1866)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이다. 그래서 초의를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10년)에 태어난 선사는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을 지나는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그리고 평생의 친구 되는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는데 특히 추사와 함께 다산초당을 찾아 유배생활 하는 24연배의 정약용을 스승처럼 섬기면서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였다. 물론 초의승려는 다산 선생께 다선(茶禪)의 진미를 더하였을 것이다. 다산은 『각다고』를 쓰고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으며 우리 토산차를 예찬하였으니 한국의 다도는 이렇게 두 분을 만나 중흥하게 된다.
초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塵穢,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精氣)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승려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의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였으며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실사구시를 표방한 정약용의 영향과 김정희와의 교유(交遊)에서 얻은 힘이라고 보고 있다.
1866년 나이 81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맑은 차 한 잔의 맛과 멋을 초의는 이렇게 노래한다.
一傾玉花風生腋 / 身輕已涉上淸境 / 明月爲燭兼爲友 / 白雲鋪席因作屛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초의선사- 『동다송』 제16송 의역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초의선사 [草衣禪師] (차생활문화대전, 2012. 7. 10., 홍익재)
뒤로 보이는 저 봉우리가 노승봉,가련봉일까?
문수전-문수보살을 모신 전각
보현전-보현보살을 모신 전각
보통 절에서는 찾을심자 심검당[尋劍堂]을 쓰는데 여기서는 물가 심潯(물가 심,젖어들 음 )자를 쓰고 있다.
신검당-사찰에서 선실(禪室) 또는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많이 붙이는 이름.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이라고 한다. 심검당의 검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취모리검(吹毛利劍)을 상징한다. 사찰 내에 적묵당(寂默堂)이 심검당과 함께 위치할 경우에는 적묵당은 선원으로, 심검당은 강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곳은 순수한 수행처이므로 외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검당 [尋劍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보박불관
가허루-대흥사 남원(南院)의 출입문으로, 사찰의 중심에 있다. 휘어진 자연목으로 만든 문턱을 넘어 짧은 통로를 지나가면 천불전(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8호)을 비롯해 용화당·동국선원·봉향각·승방 등이 나온다.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건물 중앙은 통로로,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으며,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가허루(駕虛褸)’라는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흥사 가허루 [大興寺駕虛褸] (두산백과)
천개의 부처를 모신 전각
연리지,연리목,연리근
침계루
대둔사의 중심을 가로질러 남 북원을 구분짓는 계류 금당천(金塘川)에 면하여 우뚝 선 2층의 누각이다.
묵원 일곽의 정문과 같은 기능을 하며 심진교를 건너 누하의 어칸 통로를 통해 내정에 들어서게 되어 있다. 보통 주불전 앞 누각이 지면에서 반층 정도 높인 누마루인데 비해 침계루는 완전한 중층 누각으로 하층은 돌담과 판벽으로 막은 광이고 상층 전체가 하나의 홀(hall)로 이루어진 강당류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30평 규모이며 누다락 위엔 큰 북과 종 목어가 걸려 있고 양측 벽에 사천왕 탱화가 걸려 있다.
법당을 향한 내벽은 트여 있고 삼면 벽을 판벽과 판문으로 처리했다. 상층의 기둥이 층귀틀 층보 위에 얹혀져 위아래 기둥이 서로 분리되고 이익공과 내부 기둥이 없는 오량 가구를 구성하여 큰 풍판을 붙인 박공지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침계루 [枕溪樓]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사진으로보는 한국전통건축),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해남 대흥사 응진당과 산신각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799.
대흥사 북원(北院)의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신각과 한 채에 함께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3칸의 산신각과는 쪽문으로 연결된다. 내부에는 중앙에 목조석가삼존상, 좌우에 십육나한상이 자리하며, 제석·범천·사자·금강역사·동자상 등이 있다. ‘응진당(應眞堂)’이라는 현판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의 것이라 한다. 전각 앞에는 보물 제320호로 지정된 응진당전3층석탑(應眞堂前三層石塔)이 서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흥사 응진당 [大興寺應眞堂] (두산백과)
사천왕문인줄 알았는데 사천왕은 없고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부처가 있다.
부처님의 머리 부분...처음에 부처가 있다고 해서 어~부처님이 누워서 합장하고 있네...라고 생각했는데 머리부분이라공....
대흥사는 서산대사 옷가지와 바리때를 보관한 도량이다. 일주문 뒷면엔 ‘선림교해만화도장(禪林敎海滿華道場)’이란 현판이 내걸렸다. 서산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에서 말한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에서 연유했단다. 다시 말해 부처님 가르침이 숲과 바다 같이 자리한 도량이다. 해서 이곳은 한국불교 종통을 이어왔다(宗統所歸之處). 풍담 스님으로부터 초의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대종사를, 만화 스님으로부터 범해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대강사를 낳았다. 그리고 초의 스님으로 인해 우리나라 차문화 성지로 자리매김했다. 초의 스님이 기거했던 일지암이 유명한 이유다.
표충사- 두륜산 대흥사 내에 있는 사당
표충사(表忠祠)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1520~1604)를 모시는 사당이다. 그의 제자인 유정과 처영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대사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서도록 했다. 전쟁 이후 그는 승려로서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받았고, 묘향산에서 선조 37년(1604) 입적했다.
표충사는 사찰 경내에 사당을 겸하고 있다. 대흥사 안에 있는 사당 건물은 조선 정조 12년(1788)에 대둔사 7세 법소인 천묵의 상소로 세워졌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1976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수조대장...금귀대장
장승은 보통 나무로 제작되어 마을 어귀나 신성한 지역에 세워져서 재액과 잡귀의 침범을 막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여 지금도 전국에서 볼 수 있으며, 이제는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장승의 어원은 도교의 불노장생(不老長生)의 ‘장생’에서 변음 되었다고 보는데, 가장 많은 것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이다. 그런데 대흥사의 금귀대장과 수조대장은 흔치 않은 장승인데 무슨 뜻일까? 불교의 우주관은 한 부처님의 감화가 미치는 세계를 일 불국(一佛國)이라 하는데, 이를 삼천대천(三千大天)세계라고도 한다. 이 세계에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의 중생이 살고 있다. 욕계에는 해탈하지 못한 중생이 죽어서 생전에 한 행위에 따라서 윤회하게 되는 여섯 가지 세계가 있는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도이며, 이러한 욕계에는 6종의 하늘(六欲天)이 있는데,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이다.
사왕천(四王天)은 수미산 제4층의 4면에 있는 지국천(동). 광목천(서). 증장천(남). 다문천(북)의 4왕으로 사찰입구의 사천왕문에 있는 신장들이다. 도리천의 주인인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명을 받아 4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고, 8부 신장을 지배하여 불법을 수호한다. 제석천왕의 휘하에 있는 장군 중에 금귀대장과 수조대장이 있는데, 금귀 장군은 금할금(禁)자와 귀신귀(鬼)자로 사찰과 인간들에 대한 귀신들의 침범을 막아주고, 수조대장은 받을 수(受)자와 고할 조(詔)로 사람들의 지극한 소원을 받아서 제석천왕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바로 대흥사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마귀(재액)의 침범을 막아주고 그들이 바라는 소원을 들어서 제석천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오늘도 대흥사의 일주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약수터
물소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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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봉 올라 가다 전망 좋은곳에서 찍은사진
두륜봉에서 360도 찍은 사진
대흥사에서 찍은 사진
대흥사에서 360도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