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병조판서공(兵曹判書公) 후손/찬성공의 빛난 후손들
인후공(仁厚公)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벼슬도 하시어, 병판공(兵判公)이라고 불리며, 그 후손들을 병판공(兵判公)파라고 한다.
① 안성(安珹)
공은 문성공 회헌선생(晦軒先生) 휘 향(珦)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인후(仁厚)니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요, 어머니는 옥천전씨(沃川全氏)니 진의부위(進義副尉) 의(義)의 따님이다.
공(公)은 음직으로 천문학 습독관(習讀官)을 제수받았고, 뒤에 손자 현(玹)이 귀하게 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증직받았다. 부인은 영암 황씨(靈巖黃氏)니 평안도병마절도사 석생(石生)의 따님이다. 2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 순필(舜弼)은 증 영의정(贈領議政)이요, 차남 순좌(舜佐)는 상의원정(尙衣院正)의 벼슬을 하였다. 따님은 조무(趙珷)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위(瑋)는 판서(判書)요, 현(玹)은 좌의정(左議政)이요, 상(瑺)은 도정(都正)이다.
외손자로 세침(世琛)․세규(世珪)는 무과(武科)요, 세구(世球)․세감(世瑊․세박(世珀)은 조무(越珷)의 소생이다. 공의 묘소는 배천(白川) 호산동(虎山洞) 남쪽 밖 건좌(乾坐) 언덕에 있는데, 부인(夫人)과 쌍분(雙墳)이다. 비(碑)는 있으나, 음기(陰記)가 없고, 유당(幽堂)의 문(文)도 또 전하지 아니하니, 생졸(生卒)과 행적을 상고할 데가 없다.
② 안공(安珙)
공의 휘는 공(珙), 병판공 인후 공의 2째 아드님이다. 공의 생졸 연월일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처음에 습독으로 시작해서 관찰사를 끝으로 관직을 마치고, 광주(光州)의 산속 집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이것은 사촌형제인 정민공(貞愍公) 당(瑭) 때문이었는데 정민공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화를 입었다. 공은 구차하게 벼슬하기 보다는 속세에 몸을 피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고, 스스로 촌부야로(村夫野老)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다.
관직은 천문학 습독관 가선대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오르시었다.
부인은 금성 정씨(錦城鄭氏)이며, 그 아버지는 감사(監司)를 지낸 경(耕)이다.
공은 3남 3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습독을 지낸 순수(舜壽)이고, 둘째 아들은 참의(參議)를 지낸 순명(舜命)이고, 셋째 아들은 주부(主簿)를 지낸 순담(舜聃)이다.
③ 안사전(安嗣全)
공의 휘는 사전(嗣全), 자는 윤숙(胤叔)이다. 찬성공 경(璟)께서 인후(仁厚)를 낳았는데, 공이 막내였다. 공은 1459년에 태어나서 1519년에 돌아가시니 겨우 환갑을 지냈다. 배위는 제천 안씨(堤川安氏)이며 그 부친은 경종(敬宗)이다. 공보다 2년 먼저 태어나셨고, 24년 후에 돌아가셨다.
공은 병오년(1486)에 진사에 합격하고, 1512년에 추천을 받아 이인찰방(利仁察訪)에 임명되었다가 1517년에 제용감(濟用監) 직장으로 승진해 올라 왔다. 그때에 공의 4촌동생인 정민공(貞愍公) 당(瑭)이 정권에 참여하여 악정(惡政)을 폐하고 좋은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수같이 생각하고 몰래 기획을 노리는 무리들이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앞으로의 일이 예측할 수가 없었다. 공이 정민공에게 말하기를, “서리가 내리면 곧 얼음이 어는 것과 같이 징조가 불길하니 결국 나는 떠나겠네.” 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옥천(沃川)의 산중에 서정(西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세상사를 잊고 살다가 생을 마쳤다.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항상 쾌활하셨다. 말하고 웃을 때는 온화해서 앉아있는 모습만 보아도 인자한 군자의 모습이 역력했다. 고상한 덕을 지녔던 공께서 수를 오래 누리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몸을 숨기고 이름만 알려졌고 사람은 떠났지만, 옥천의 서정(西亭)이란 이름만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지니 그 훌륭한 인물임을 다시 알겠다.
공은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는데 큰 아들 순원(舜元)은 충순위(忠順衛)를 지냈고 둘째아들 순개(舜凱)는 첨사(僉使)를 지냈다.
④ 안순좌(安舜佐)
공의 자는 신재(臣哉)이고, 부친의 휘는 성(珹)이니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증직 받았고, 어머니는 영암황씨(靈岩黃氏) 평안병사(平安兵使) 석생(石生)의 따님이다.
공은 홍치 임자년 5월 13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엄숙하고 도량이 넓어 충효(忠孝)와 청직(淸直)으로 입심행기(立心行己)의 근본을 삼았다. 임오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무술년에 금오랑(金吾郎)을 제수 받고 따라서 사복주부(司僕主簿)로 전직하였다. 호조와 공조를 역임하여 각각 요직(要職)을 맡기도 하였다. 외직(外職)으로 안악(安岳), 금교(金郊), 회양(淮陽), 은계(銀溪) 네 곳에 보임되었다. 후에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고 이어 벼슬이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으나, 무진년 5월 초6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77세이시었다. 부인은 아산(牙山)의 저명(著名)한 성씨로 부사직(副司直) 이희(李熙)의 따님이니, 인자하고 근검하여 여자의 법도(法度)가 엄숙하였다. 공과 50년을 내조(內助)하되 서로 대함이 손님 같다가 공보다 2년 먼저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70세이다.
공은 2남과 3녀를 두었으니, 장(長)은 개(玠)니 어모부사과(禦侮副司果)요, 차(次)는 기(玘)니 병자(丙子)년에 진사를 했다.
⑤ 안기(安玘)
자는 윤숙(潤淑)으로 문성공 회헌선생 향(珦)의 10세손이다. 부친은 순좌(舜佐)니 상의원 정(尙衣院正)이다. 공은 가정(嘉禎) 계사년 2월 17일에 태어나 병자년에 상사(上舍)에 오르고, 갑신년 3월 9일에 졸하니 향년 52세이다. 장자(長子) 목사(牧使)인 복선(復善)의 윈종훈(原從勳)으로 승지(承旨)를 증직받았다.
배는 사천 목씨(泗川睦氏)니 현감 상문(尙文)의 따님이요, 현감 희증(希曾)의 손녀다. 부인의 생신은 9월 8일며, 휘일(諱日)은 10월 9일이며, 연도는 전하지 않는다. 공은 2남을 두었으니, 복선(復善)은 즉 목사공(牧使公)이요, 차(次)는 참봉(參奉) 택선(擇善)이다. 목사공(牧使公)은 적자(適子)는 없고, 다만 측실의 자식 4명만 있으니, 만호(萬戶)인 만건(萬健)과 첨사(僉使)인 인건(仁健)과 종건(終健) 신건(信健)이다. 참봉 택선은 일찍 졸하고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천건(千健)이니 또한 일찍 졸하였고 승지(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딸은 도사 민환(閔桓)에 출가하였다.
⑥ 안위(安瑋)
1491(성종 22)∼1563(명종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진(伯珍). 순필(順弼)의 아들이며, 좌의정을 지낸 현(玹)의 형이다. 공은 중종(中宗) 16년 (1521) 신사(辛巳)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동생과 함께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벼슬이 올라서 예조좌랑․|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539년 사헌부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윤임(尹任)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에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근검절약하며 당시 기근으로 어려워진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고자 구황에 힘써 그 실적이 뛰어났다. 명종이 즉위하여 윤임 일파가 몰려나면서 발탁되어 1554년(명종 9) 청홍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내직으로 옮겨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어서 승정원으로 옮겨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하였으며, 1558년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주관하였다. 그뒤 형조참판을 거쳐 1560년 병조판서에 특채되어 이후 오랫동안 국방을 주관하면서 병학(兵學)의 재능을 보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가, 병사하였다.
사람됨이 근면성실하고, 행정능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공께서는 통정대부 파주목사 양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지중추부사를 지내시었다. 우리 안씨의 처음 족보인 병오보(丙午譜) 서문(序文)을 쓰시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⑦ 안현(安玹)
자는 중진(仲珍), 호는 설강(雪江)으로 회헌 문성공의 11대손이다. 부친은 순필(舜弼)이시고, 모친은 조씨(趙氏)로 군수 강문(康門)의 따님이시다. 공은 홍치(弘治) 신유년 4월 9일에 태어나시었으며 60세까지 사시었다.
신사(辛巳)년에 형님 위(瑋)와 함께 연벽(聯璧)으로 문과에 등과하여 세 번이나 호당(湖堂)에 선임되시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셨으며, 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 영경연감춘추관사(領經筵監春秋館事) 세자부력사(世子傅歷事)에 추증되시었다. 또한, 청백리(淸白吏)로 세 번이나 선임 되시고, 병오보(丙午譜)를 주관하였으며, 발문(跋文)을 쓰시었다.
부인은 박씨로 현감 문로(文璐의 따님이시다. 공은 3남 1녀를 두셨으며, 장남은 계선(繼善)으로 일찍 졸하였고, 차남은 광선(光善)으로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의 벼슬을 하였으며, 셋째 종선(宗善)은 나중에 판서 벼슬까지 하시었다.
공의 시호는 문희(文僖)이시다. 시문집으로 설강집(雪江集)이 있다.
⑧ 안상(安瑺)
공은 병서판서 휘 인후(仁厚)공의 증손이며, 부친이신 휘 순필(舜弼)공의 셋째아드님으로, 중종 6년(1511년)에 태어나시고 선조 4년 1571년(신미년)에 61세로 돌아가시었다. 배위은 전주 이씨로 부친은 화녕도정(化寧都正) 계성(繼性)이시다.
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으로 재임중, 1546년(가청 25, 명종 2년) 영천군수로 전임되어 추밀공의 묘소를 참배하고, 초라한 묘소 및 비석을 보고서 풍기 영천 예천에 사는 친족들과 더불어 비석, 표석 및 영모암을 짓고 제사를 올렸다.
후에 판결사(判決事)가 되시었고, 공께서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시어, 조선 선조 때인 1572년(선조 5년)에 음악악보인 금합자보를 발간하였는데, 지금 있는 합자보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합자보 중에는 거문고 외에 비파와 장구의 악보도 들어 있다. 이 금합자보는 안상금보 또는 단순히 금보라고도 하는 데, 여기에는 사모곡이 들어 있다.
⑨ 안진선(安振善)
공의 조부는 휘 순개(舜凱)이시며,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이시었고, 부친 연(璉)은 도학(道學)에 정통하였으나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선비 이령(李齡)의 따님이시다.
공은 선조(宣祖) 병자년(1576) 3월 15일에 태어나시었으며, 호를 졸한(拙漢)으로 하였다. 청렴하고 과묵하고 욕심이 적었고, 경서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회헌선조의 도학을 깊이 이해하여 인재 교육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으셨으며, 초야에서 생애를 마치셨다. 부인은 울산박씨 흥조(興祖)의 따님이다. 선공보다 1년 앞서 태어나셨고 선공보다 3년 앞서 병술년 11월 6일 별세하셨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구(球)이고 차남은 필(珌)이고 삼남은 기(琪)이다.
⑩ 안복선(安復善)
공의 자는 경효(景孝)이시다. 찬성공 5남 인후(仁厚)의 고손이시며. 부친의 휘(諱)는 기(玘)니 성균 진사(成均進士)요,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睦氏)니 현감 상문(尙文)의 딸이다. 안공 기(玘)의 장남으로, 1568년 무진(戊辰) 선조2년에 출생 하시고 병신년(丙申年)에 돌아가시니 89세이시었다. 경인(庚寅)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시고 여러 관직을 거쳐, 끝으로 통정대부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내시었다.
⑪ 안택선(安擇善)
공의 자(字)는 경명(景明)이며, 회헌 문성공 향(珦)의 11대손이다. 부친의 휘는 기(玘)니 성균 진사(成均進士)요,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睦氏)니 현감 상문(尙文)의 딸이다. 신미년 4월 19일에 태어나서 경자년 정월 4일에 졸하니, 향년 30세였다. 배는 광주안씨(廣州安氏)니 광양군(廣陽君) 황(滉)의 따님이다.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는 곧 선조대왕(宣視大王)의 매제(妹娣이니 이 때문에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을 제수(除授)받았다.
공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천건(千健)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따님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민환(閔桓)에게 출가하였다. 승지(承旨)의 1남은 광욱(光郁)이니, 후에 공조 좌랑(工曹佐郎)이 되었다. 좌랑(佐郎) 광욱(光郁)은 6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현감 돈(墪이고, 차남(次男)은 방(埅)과 장령 규(圭)와 승지 후(垕)와 질(耋)과 무(堥)이다.
⑫ 안천건(安千健)
자는 강중(剛仲), 문성공 향(珦)의 12세손이다. 부친 택선(擇善)은 돈녕참봉(敦寧參奉)이요, 모친은 광주안씨(廣州安氏)니 광양군(廣陽君) 황(滉)의 따님이다. 공이 만력(萬曆) 임진년 정월 17일에 태어나서 임자년 8월 30일에 졸(卒)하니, 향년 21세이다. 공은 이조 판서(吏曺判書) 심액(沈詻)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일남(一男)을 두었으니, 광욱(光郁)이다. 아드님 광욱(光郁)은 경오년에 진사(進士)가되고 벼슬을 거쳐 공조좌랑(工曹佐郎)이 되었다. 후에 아드님 좌랑공(佐郎公)이 영국종훈(寧國從勳)에 참여(參與)한 것으로 인하여, 공에게 좌승지(左承旨)가 증직(贈職)되었다.
⑬ 안광욱(安光郁)
공의 자(字)는 희문(希文)이고 호는 동오(東塢)니, 문성공 향(珦)의 13세손이다. 부친은 선무랑(宣務郎) 천건(千健)이신데, 공의 종훈(從勳)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청송심씨(靑松沈氏)니 의헌공(懿憲公) 액(詻)의 딸이다. 공은 광해 경술(庚戌)년 9월에 태어나시어, 계묘년 3월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 54세이시었다.
공은 천성(天性)이 단중안상(端重安詳)하여 접인(接人)에 화후(和厚)하고, 작사(作事)에 신밀(愼密)하며 고인(古人)의 법도를 가졌다. 어려서 선친을 잃고 스스로 역학(力學)할 줄 알아 어른의 수고를 끼치지 않더니, 성장(成長)함에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사위가 되어 스승에게 강마(講磨)를 받으며 재질(才質)의 소문이 날로 퍼지니, 택당이 일찍이 천자(天資)가 도학(道學)에 가깝다고 칭찬하였다.
공은 21세에 상상(上庠)에 오르고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내직으로는 영릉참봉(英陵參奉)․�종묘 부봉사(宗廟副奉事)․상서 직장(尙瑞直長)․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공조 좌랑(工曹佐郎)․익위사(翊衛司) 위솔(衛率) 익찬(翊贊)이요, 외직(外職)으로는 청양(靑陽)․지례(知禮) 현감(縣監)을 지냈다.
공의 초배(初配)는 덕수 이씨(德水李氏)니, 택당 문정공(文靖公)의 중녀(仲女)로 효경단신(孝敬端愼)하고 부덕(婦德)을 갖추었다. 4남을 두었으니, 도사(都事)로 증 승지(贈承旨)인 돈(墪), 방(埅), 승지(承旨)로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인 규(圭), 참의(參議)로 증 대사헌(贈大司憲)인 후(垕)이다. 후배(後配) 선산김씨(善山金氏)는 부사(府使) 종필(宗泌)의 딸이다. 2남은 질(耋)․무(堥)이다.
⑭ 안돈(安墪)
공은 자가 재백(載伯)이니, 부친은 공조좌랑(工曹佐郎) 승지(承旨)에 추증된 광욱(光郁)이시며, 광욱공의 장자(長子)이다. 외조부는 즉 이조판서 대제학 택당이공(李公) 식(植)이다.
공은 천계(天啓) 정묘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 풍성한 체격과 준수한 용모에 언어(言語)는 자세하고, 웃음이 적으며 자품이 화후(和厚)하고 의도(儀度)가 엄중(嚴重)하며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공은 문장이 숙성하고 필법(筆法)이 또한 뛰어나,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고 내직(內職)으로는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장릉 참봉(長陵參奉)․군자 직장(軍資直長)․금부 도사(禁府都事)을 역임하였고, 외직(外職)으로는 평릉 찰방(平陵察訪)․연산 현감(連山縣監)을 지냈다.
공은 병인년 10월 30일에 졸하였다. 배는 광주 이씨(廣州李氏)니 헌납(獻納) 휴징(休徵)의 따님으로, 정묘년에 태어나 계묘년에 졸하였다. 부인은 성품이 청수하고 부덕을 잘 갖추었으며 4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중현(重顯)은 일찍 죽어 자식이 없다. 중렬(重烈)이 유명(遺命)으로 종사(宗祀)를 받들었으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중희(重熙)는 벼슬이 선무랑(宣務郎)이며, 중소(重紹)는 직장(直長)이었다.
⑮ 안규(安圭)
공의 자는 군보(君寶), 자호(自號)는 남계(南溪)다. 공은 동오공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갑술년 9월 10일에 나서 5세에 모부인(母夫人) 상(喪)을 당하고, 조모 심부인(沈夫人)에게 양육을 받았다. 10세에 택당께 수학(受學)하니, 택당이 많이 칭찬하셨다. 계묘년에 부친 동오공의 상을 당하고 병오년에 상사(上舍)에 들어갔으며, 갑인년에 감제(柑製)에 장원하였다. 명년에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정자(正字)․박사(博士)가 되고, 성균전적(成均典籍)․병조좌랑(兵曹佐郎)에 오르시었다.
후에 선혜랑(宣惠郞)․사성(司成)․장악정(掌樂正)을 역임하였는데 대각(臺閣)에서 가장 오래 있었다. 병자년에 사복정(司僕正)․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으로 옮겼고, 세자(世子)의 가례(嘉禮)로 통정대부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풍천부사(豊川府使)에 제수되었다. 한 해 지나 다시 정원(政院)에 들어갔다.
배는 안동김씨(安東金氏)니 종부정(宗簿正) 태기(泰基)의 딸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주(澍)의 현손(玄孫)이다.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중필(重弼)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고, 차(次)는 중익(重翊)이다.
공은 천성이 후중(厚重)하고 안정(安定)하여, 집에 있어도 산업(産業)을 경영치 않고 벼슬에 임해도 청렴결백하여 지위가 비옥(緋玉)에 이르렀어도, 가계(家計)는 궁색하였다. 그러나 태연한 자세로 군흉(群凶)이 득세하는 때에 처해도 우뚝 자립(自立)하였고, 축출을 당해도 쾌활한 의기(義氣)가 꺾이지 않았다.
⑯안후(安垕)
공의 자는 자후(子厚), 호는 죽애(竹涯)이다. 공은 승정(崇禎) 9년 병자(丙子)2월 정해일 진시(辰時)에 지평현(砥平縣) 문정공 이공 식(李公植) 별장에서 출생하여, 겨우 3세에 모친을 여의고 조모 심씨부인 손에서 자랐다.
기유년에 정시(庭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고, 신해년에 전적(典籍)에 올랐다가 다시 예조좌랑(禮曹佐郎)을 제수받았다. 임자년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계축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사(京畿都事) 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또 정언․병조좌랑․정언이 되었고, 병조정랑에서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후에 봉상부정(奉常副正)을 제수받았고, 경신년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계미년에는 다시 좌승지․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후에 사헌부 대사헌 겸 양관 제학 세자좌부빈객(司憲府大司憲兼兩館提學世子左副賓客)에 추증되었다.
공은 4남1녀를 두셨다. 장남은 중정(重鼎)이고, 차남은 중겸(重謙)이며, 삼남은 중진(重晉)이고, 4남은 중관(重觀)이시다. 공은 경인년 5월에 졸연히 풍질(風疾)을 만났고, 3일 지난 을해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75세였다.
⑰안중필(安重弼)
공의 자는 몽경(夢卿)이다. 부친 규(圭)는 호가 남계(南溪)로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종부시 정(宗簿寺正) 태기(泰基)의 따님이다. 기해년 2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근칙하여 동류 중에서 뛰어나니, 선배들이 다 기특하게 여겼다. 수학(受學)함에 문사와 필법(筆法)이 풍부하여, 보는 이들이 입신양명할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겨우 성인이 되면서 여러 번 관제(館製)에 합격하였고, 정묘년에 사마시 1등으로 합격하였다.
무인년에 남계공(南溪公)이 국사로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출사(出使)했다가 봉산(鳳山)에 돌아와 객관(客館)에서 졸하니, 공이 시묘(侍墓)하여, 삼년상을 마치니 사론(士論)이 중하게 여겼다. 신사년에 정릉 참봉(貞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옹원 봉사(司甕院奉事)․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금부도사(禁府都事)로 승진하였다. 무자년에 김부인(金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후에 예조참의․좌승지에 제수되었으며, 무오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였고, 후에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제수되었다. 병인(丙寅) 2월 11일 마포(麻浦) 우사(寓舍)에서 졸하니, 향년 88세였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문화유씨(文化柳氏)이며, 고려 태사(太師) 차달(車達)의 후손으로서 통덕랑(通德郎) 진(軫)의 따님이다. 유순하고 현철하며 규범을 갖추었다. 공은 4녀만을 낳았다. 당제(堂弟) 직장(直長) 중소(重紹)의 아들 석구(錫龜)를 양자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⑱안석경(安錫儆)
공의 자(字)는 숙화(叔華)요, 호는 삽교(霅|橋)이다. 회와선생(悔窩先生) 휘 중관(重觀)의 중자(仲子)이다.
공이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91년 숙종 무술(戊戌) 1718년 7월 정축(丁丑)술시(戌時)에 가흥(可興) 쌍저곡(雙杵谷)에서 태어나, 갑오(甲午) 8월 18일에 향년57세로 세상을 마치시었다.
실(室)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니,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인 사한(師漢)의 따님이다. 무육 조졸하였으며, 계실(繼室)은 밀양박씨(密陽朴氏)니, 사인(士人) 현(礥)의 딸이다. 2녀가 있으니, 장(長)은 청주 한명식(韓命式)에게 시집가고 차(次)는 어리다.
공의 학문은 어려서부터 읽어서 외우지 않음이 없고, 늙도록 정문에 전력하여 그 큰 뜻과 깊은 맛을 얻었다. 주(註)는 주자(朱子)의 정한 것을 주장하여 그 자구(字句)간에 심히 상고하지 않았다. 문인(門人)을 가르침에도, 또한 같이 하고 말 외의 미루어 말하기를 좋아하여, 고인(古人)이 경연에서 강의하는 것 같이 하여 힘쓰도록 하고, 주석에 한귀 한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물으면 곧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은 말년에 충주(忠州) 가흥(可興)으로부터 원주(原州) 흥원(興元)으로 이사하고, 안산(安山)으로부터 횡성읍중(橫城邑中) 옮겼다가 삽교(霅橋)로 전입하여 몸을 마치니, 사는 곳마다 원근 사람이 그 처신을 복종하고 공경하고 믿어, 만년에 도신(道臣)이 박학(博學)과 독행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강릉참봉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시(詩)가 몇 권, 문(文)이 몇 권, 만록(漫錄)이 몇 권, 지문(識聞)이 몇 권, 예학록(藝學錄)이 몇 권인지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삽교집(霅橋集)이 남아있을 뿐이다.
⑲안겸재(安兼濟)
자는 달부(達夫), 호는 팔하(八下)이다. 필선(弼善) 시상(時相)의 손자이다. 아버지 개(鍇)는 관직이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감사 완산(完山) 이언경(李彥經)의 딸에게 장가들어 겸제를 낳았다. 영묘(英廟) 병자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감사를 지냈다.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병신년에 변방에 유배되었다.
[출처] 3) 병조판서공 후손/찬성공의 빛난 후손들 (순흥안씨문숙공파) |작성자 안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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