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1 너릿재 화순쪽 전망대에서 내려 다 본 조망..멀리 화순 읍내가 보인다.
전망대 모습
화순쪽으로 내려 가는 너릿재 옛길
16:51 화순쪽 터널 입구로 내려 왔다. 빠른 걸음 이었는데도 너릿재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화순쪽너릿재공원
백세풍류....심오한 뜻이 있을까?백세를 살며 풍류와 함께 한다면...
비석의 옆면...서석의 영기가 수려기절한 산수를 낳았으니 내고장 화순이다.인걸은 지령이라 많은 충의가 배출되었고 산자수명은
재애높은 인물을 낳아 그 명망 또한 수구하다.
조선조 거유 학포 양팽손선생의 시서화는 남도회화의 효시가 되었고 그의 작품은 한국과 일본에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규남 하백원과 사호 송수면,염제 송태회,근원 구철우는 한말과 근대를 통하여 시서화에 능한 이고장 대표적인 선비다.
헉과 같은 자취와 우아한 예술의 세계가 오늘날 후학들에게 지남이 되고 있으며 한국화단의 거장이요 고고한 생애로 ..................
비석 후면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오지호 화백과 농부가의 여상현 시인등 기라성 같은 이들이 이를 증거하지 않은가?
예부터 능주는 목사고을로 남도의 맑은 향속을 자랑하였다.많은 시인묵객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고 가인재자 또한 면면히 배출되어 근세에 침체된 국악을 구출하는 일역이 되었음은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호남의 데명창 김채만을 비롯하여 공창식,조몽실,안기선,공대일,성창순,박송희,성우향,박초선등과 대금 한주환,가야금 한숙구,병창 정달영,아쟁 김일구,거문고 안기옥,무용 박영구,고수 김동준등은 이나라 국악사를 빛낸 대표적인 인물이며 현국악계의 중견인물로 평가 받고 있는 예술인들까지 모두 합치면 무려 70여인에 달안다.
이 아름다운 산수가 낳은 명인,명창들 사이에 그림자처럼 맥을 잇는 이고장 문?들의 격높은 예술성은 남주 예향이란 대명사를 낳았다.
동복 군자정,능주 영벽정,화순 서양정,적벽 망미정의 무?들은 춘화추월을 읊조리고 적벽강 선유의 고적창화가 지금도 귓가에서 떠날줄 모른다.
내고장 전통문화를 아끼는 마음으로 화순의 옛지명 서양을 빌은 우리의 모임은 선인들이 물려 주신 시조,판소리,한시,묵화,고법등을 익히면서 명인 명창들과 함께 즐겼던 아취가 오늘까지 이르니 그 감회가 더욱 깊다.
화순 출신 명사들
양팽손[ 梁彭孫 ]
출생 - 사망 | 1480 ~ 15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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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자 : 대춘(大春) 호 : 학포(學圃) 시호 : 혜강(惠康) |
본관 | 제주(濟州) |
직업 | 화가, 학자 |
조선조 전기의 학자이며 화가.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시호는 혜강(惠康), 본관은 제주(濟州). 문장에 능하여 1510년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리(敎理)로 재직중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당했다. 37년 복직되고 44년 용담현령(龍潭縣令)을 끝으로 공직에 은퇴하였다. 안견(安堅) 화풍의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비롯한 몇점의 작품이 그의 작이라고 전해진다. 사후에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팽손 [梁彭孫] (미술대사전(인명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호남의 3대 실학자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 1845)
- □ 호 : 규남
□ 연혁
○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출생으로 무등산의 남쪽에서 태어났다해서 호를 규남이라 함.
○ 여암 신경준, 존재 위백규, 이재 황윤석 등과 함께 호남의 4대 실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 이땅에 과학문명의 꽃을 피운 과학자요. 실학자였음.
○ 180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때부터 53세까지 학문에 전념하고 본격적인 실학연구에 몸 바침.
○ 1832년 51세때 참봉이 되어 벼슬을 했고,
○ 1842년 61세에는 석성현감으로 나갔으나 지방 토호의 모함으로 충청도로 유배되기도 함.
○ 그의 실학정신에 입각한 작품에는 양수기 같은 자승차, 자명종, 물의 수압을 이용한 강흡기, 타이머 같이 조정하던 약탕로, 소변통을 밭까지 실어 나르던 거북이 등이 있음.
○ 무엇보다 시서화에도 능했으니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51년이 앞서 제작된 동국지도, 세계전도, 또한 쌍작도 등은 그의 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귀한 작품임.
송수면[ 宋修勉 ]
- 조선 말기의 문인화가이다. 시와 서를 곁들인 사군자에 능하였으며, 특히 나비그림을 잘 그려 ‘송나비’라는 별칭을 얻었다. 허련의 뒤를 이어 호남 문인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는 평을 듣는다.
출생-사망 | 1847 ~ 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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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여산(礪山) |
자 | 안여(顔汝) |
호 | 사호(沙湖)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미술 |
주요작품 | 《묵죽도》《화접도》《묵매도》 《송학도》 |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자는 안여(顔汝)이고, 호는 사호(沙湖)이다. 전라남도 화순(和順)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동복(同福)에 은거하였다. 그림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나비그림을 잘 그려 ‘송나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시(詩)와 서(書)를 곁들인 사군자에도 능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소치(小癡) 허련(許鍊)의 뒤를 이어 호남 문인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는 평을 듣는다. 작품으로는 《묵죽도(墨竹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화접도(花蝶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묵매도(墨梅圖)》(개인 소장) 《송학도(松鶴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 조카 송태회(宋泰會)와 아들 송대회(宋大會)가 그의 작품 세계를 계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수면 [宋修勉] (두산백과)
송태회[ 宋泰會 ]
- 대한민국의 교육자로 《대한매일신보》 기자를 지냈고 국권피탈 이후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오산고보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출생-사망 | 1872 ~ 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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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평숙 |
호 | 염재 |
출생지 | 전남 화순 |
자 평숙(平叔). 호 염재(念齋).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생. 1888년 진사, 1900년 박사시(博士試)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1901∼1907년 중국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귀국, 1908∼1910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하였으며, 국권피탈 이후는 육영에 뜻을 품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는데, 이 학교는 고창고보로 개칭된 후에도 민족교육적 학풍 때문에 타지방의 뜻있는 학도들이 많이 전입해 와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松廣寺) 등 곳곳에 글씨 및 그림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태회 [宋泰會] (두산백과)
구철우[ 具哲祐 ]
이칭별칭 | 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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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현대 |
출생 - 사망 | 1904년 ~ 1989년 |
성격 | 서화가 |
출신지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정리 |
성별 | 남 |
1904∼1989. 전라남도 광주를 무대로 활동한 서화가
활동사항
호는 근원(槿園)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서 천석군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 무렵 ‘꼬마명필’로 알려질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양곡(良谷) 이승복(李承福)과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先)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20년 양재옥과 결혼 직후 서울의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신구학문을 두로 섭렵하였다. 그러나 중동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증조할아버지의 권유로 귀향하였고, 1928년 광주시 대인동으로 이사하면서 허백련(許百鍊) 문하에서 그림과 글씨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1938년 허백련이 광주에 전통 서화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연진회(鍊眞會)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같은 유명 서화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택에서 5년 동안 매일 팔백 자씩 글씨를 쓰면서 개성적 필법을 완성하였다. 특히 그는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에 근간을 둔 단아한 행서에 뛰어났으며, 사군자 중에서는 매화가 일품(逸品)이었다.
1956년 제5회 국전 서예․사군자에 출품한 「묵죽」을 시작으로 연속 4회 특선을 하면서 1960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고, 이후 서예부의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을 7회 역임하였다. 1975년 한국예술원 원로작가에 추대되었고, 1978년 고 허백련의 유지에 따라 설립된 연진회미술원의 초대 원장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곳은 광주농업기술학교를 바꾸어 1978년 2월 10월 개원한 미술교육기관으로 보통과와 전문과로 나누어 사군자와 습자는 물론 국어, 국사, 기초 한문 등의 교양과목도 가르쳤다. 더불어 전라남도 미술대전, 무등미술대전 등 공모전의 심사 또는 운영위원으로 광주 화단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밖에 1964년 신세계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렸으며, 1973년 ‘원로작가 초대전’을 비롯해 1979년 열린 ‘아주현대서화명가전(亞洲現代書畵名家展)’, 1982년 국전(國展)이 폐지되고 처음 열리는 ‘82 현대미술초대전’, 1985년 ‘현대미술 40년전’, 1988년 올림픽을 기념해 개최된 ‘국제현대서예전’, 1990년 ‘한국서예 국전 30년전’ 등 국내외의 주요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현재 전라남도 순천 선암사 경내의 삼성각(三聖閣) 편액과 허백련 묘비는 그의 글씨이며, 다수의 글씨와 사군자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철우 [具哲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76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회 위원
- 1973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회 위원장
- 1969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회 위원장
- 1965 제1-11회 전라남도전 심사위원회 위원
- 1949 ~ 1960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 1945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부 중앙위원회 위원
- 1935 ~ 1944 개성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여상현[ 呂尙玄 ]
이칭별칭 | 본명 여상현(呂尙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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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 |
시대 | 현대 |
출생 - 사망 | 1914 ~ ? |
성격 | 시인 |
출신지 | 전라남도 화순 |
성별 | 남 |
1914∼ 월북. 시인.
개설
전라남도 화순 출생. 본명 여상현(呂尙鉉)
생애 및 활동사항
전남 화순의 동복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 중동학교를 수료한 후 1935년 전북 고창의 고창고보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39년 졸업하였다. 그가 문단에 등단한 시점이 1936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창고보시절에 이미 『동아일보』에 글을 실었다. 1932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에 기재된 「탐승수점(探勝數點)-기일」, 「탐승수점-기이」라는 글에 본명이 밝혀져 있다. 브나로드운동으로 고향 화순에서 강습회를 마치고 주변의 경치를 둘러본 이야기이다. 1933년 『매일신보』에 「추우」, 『조선일보』에 「포구의 노파」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후 1938년 『매일신보』가 학생문예란을 개설하면서 그의 활동무대가 넓어진다. 여러 대학의 캠퍼스를 소개하는 학원풍경 특집란에 「검푸른 송림 속 청춘의 향연장-연전편」이라는 글도 발표했다. 연희전문 재학 중에 산문시 「새벽」, 「좀 먹은 단층」 등도 발표하였다.
이렇듯 학생문사로서의 그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성도 있다. 김승구는 그의 작품 발표무대로 봐서 고창고보 동창인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 창간한 시점을 등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은 『시인부락』을 통해 1942년 일제말기까지 이뤄진다. 등단작으로 알려진 작품은 「장(腸)」, 「호텔 앞 광장」, 「법원과 가마귀」, 「호흡」, 「종로168호」 등으로 민중의 가난한 삶을 잘 보여준다. 『시인부락』을 기준으로 아방가르드적인 기법을 시에 도입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시에 바탕에는 민중성이 놓여 있었다.
해방기에 출간된 시집 『칠면조』(1947)는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대체로 일제 식민지의 삶을 시적 주제로 들여놓고 있다. 민족주의 내용과 모더니즘취향의 시적 기법을 동시에 담은 시세계를 보여준다. 「추조(追弔), 꼬르키-옹(翁)」은 막심고리키 죽음을 추모하는 작품으로 그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준 인물로 짐작된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그의 시 「공작」(『국민문학』1942.3), 「백화의 서정」(『조광』1942.8)이 포함되어 있다. 최라영은 두 작품을 친일문학으로 보기 어렵다고 보면서 1939∼1945년까지 문학활동이 부재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해방 이후 발표작 「복로방(福爐房)」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작품은 정치현실을 비판하면서 민중의 생활에 집중해 있다. 1947년 「슬픈 가락」(『백민』)을 발표하고 월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상현 [呂尙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채만[ 金采萬 ]
- 성악가(판소리). 고종(1863~1907)·대한제국(1897~1910) 때 서편제(西便制) 명창.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綾州) 출생.
출생 - 사망 | 1865 ~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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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李捺致)에게 판소리를 배운 그는 목이 좋지 못했으나 끈질긴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명창이 되었다.
1907년 창극단 협률사(協律社)에 참가해 창극활동을 한 적도 있으나 판소리에 주력하였다. 1909년 원각사(圓覺社)의 폐지 이후 김창환 명창이 조직한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라는 사설 유랑창극단에서 그는 강용환·유성준·박지홍·공창식 등 50여 명의 단원과 함께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상도 남해(南海)공연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1912년 전남 광주에서 지방 출신의 명창으로 조직된 광주협률사(光州協律社)에서 그의 문도인 김억순·안영환·박화섭·전일도·김정문 등은 1920년대까지 8년 동안 지방에서 창극활동을 전개하였다. 소리에는 극도로 장식적인 선율을 구사하는 정교한 기법을 썼다. 시원시원하게 청중을 휘어잡는 송만갑과는 대조적으로 쉰 목소리와 같이 컬컬하게 나오는 수리성에 양성이 낀 성음으로 극단적인 서편제 판소리를 개척했으나, 47세로 죽었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일부밖에 전승되지 못하였다.
그의 장기는 심청가로 당대 독보였고, 특히 심청가의 첫머리인 심봉사를 소개하는 대목은 그의 특장으로 박화섭(朴化燮)을 통하여 한승호(韓承鎬)에게 그 더늠이 전해지고 있다. 제자로는 김정문(金正文)·한성태(韓聖泰)·박종원(朴宗元)·공창식(孔昌植)·박동실(朴東實)·박화섭 등이 있다. 한경석과 교의(交誼)가 깊었던 김채만은 심청가를 잘 부른 명창이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심청가 중 한 대목은 정노식(鄭魯湜)의 『朝鮮唱劇史』에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채만 [金采萬]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공창식[ 孔昌植 ]
-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전남 화순군(和順郡) 능주면(陵州面) 범우골 출생.
출생 - 사망 | 1887 ~ 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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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에 광주(光州) 속골의 김채만(金采萬)에게 3년간 소리를 배웠고, 장기는 심청가이다. 1909년 원각사(圓覺社)의 폐지 이후 김창환 명창이 조직한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라는 사설 유랑창극단에서 그는 강용환·유성준·박지홍 등 50여 명의 단원과 함께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상도 남해(南海)공연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창식 [孔昌植]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조몽실[ 曺夢實 ]
-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전남 화순군 능주(綾州) 출생.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의 조선악부 소속 조선가무단(朝鮮歌舞團) 단원.
출생 - 사망 | 1900 ~ 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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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때 공창식(孔昌植)에게 심청가를 2년 동안 학습했고, 14세 때 김창환(金昌煥)의 문하에서 김봉학·김창환의 아들과 함께 3년 동안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다. 귀향한 후 독공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1928·1929년 남도단가(南道短歌)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1932년 함경남도 원산권번(元山券番)의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다가 1935년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의 문하에서 적벽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1940년 조선창극단(朝鮮唱劇團)에서 창극활동에 동참하였다.
1934년 한복술을 중심으로 광주(光州)에서 창립된 한일창극단(韓一唱劇團)에서 그는 김억순·전일도·박종원 등과 함께 창극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의 조선악부 소속으로 창단된 조선가무단의 단원인 최경식(崔景植)을 비롯하여 정득만·이창배·이일선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후 광주에 사는 박동실·오태석·조상선·성원목·공기남 등과 함께 광주성악연구회(光州聲樂研究會)를 조직하고 대춘향전을 창단공연을 하였다. 1947년 국극협단(國劇協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의 장기는 심청가였다.
1948년에 창단된 조선창극단의 단원인 정광수·신영채·조동선 등과 함께 창작 사극 "논개"(論介)와 "왕자호동"(王子好童)을 공연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몽실 [曺夢實]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안기선[ 安基善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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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처 | 디지털화순문화대전-안기선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의 국악인
가계
가야금 산조 명인 안기옥의 동생이며 서편제 판소리의 맥을 잇는 여류 명창인 안채봉의 사촌 오빠이고, 딸은 창극인 안행련이다.
활동 사항
안기선(安基善)[1904~?]은 판소리 다섯 마당을 두루 잘했다. 지방에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성우향, 박초선, 신영희, 박송희에게 소리를 가르쳤다. 부인과 딸들은 안향련을 제외하고 모두 국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악인으로는 딸 안행련이 있었으나 일찍 타계했다. 명성을 떨치지는 못하였으나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목이 걸걸하여 듣기 좋았으며 안향련의 소리 재능은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기선 [安基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대일[ 孔大一 ]
-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전남 승주군 송광면 월산리 출생. 공옥진(孔玉振)의 아버지. 세습무가(世襲巫家) 출신.
출생 - 사망 | 1910 ~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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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동안 김채만(金采萬)과 송만갑(宋萬甲)의 제자로 판소리 다섯마당을 학습했고, 장판개(張判介)에게 흥보가를 배운 뒤 독공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29세 때 창극단에 들어가 전국 순회공연에 출연했고,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후 전남 광주에서 창악인 중심으로 구성된 광주성악연구회(光州聲樂研究會)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광주 남도국악원(南道國樂院)의 판소리선생을 지냈다. 1974년 전남도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78년 5월 한국브리태니커사의 판소리감상회 때 김소희·김여란·박동진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1982년 6월 8일 공간사랑 기획공연 때 수궁가를 발표하였다. 남도국극원(南道國劇院) 판소리선생으로 제자를 양성하다가 1990년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대일 [孔大一]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박송희[ 朴松熙 ]
- 성악가(판소리). 판소리 여류명창.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 호는 송설당(松雪堂). 예명은 박송이(朴松伊). 전남 화순(和順) 출생.
출생 |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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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때부터 성차옥에게 단가를 배웠고, 1939~1942년 박영구·박동실·박기홍·정응민·안기선·김억순에게 소리를 사사했다. 1944년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조상선(趙相鮮)에게 사사하고 임방울협률사(林芳蔚協律社)에서 활동했고, 1948년 여성국극단(女性國劇團)에 참가하여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950~1955년 여성국극동호회(女性國劇同好會)·새한국극단·햇님국극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김주전(金主傳)이 부산에서 햇님국극단을 재조직했을 때 그녀는 조농옥·박보아·조금앵·박옥진·고일연·김일수·노신성·김정희·이소자·오수연·벽녹수·백숙자·이소은·이영자·조선애·조정례와 함께 "쌍동왕자"·"바보온달"·"마의태자"(麻衣太子) 등의 창작 사극을 공연하였다.
1963년부터 김소희(金素姬)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박봉술(朴奉述)에게 적벽가와 수궁가를, 그리고 박녹주(朴綠珠)에게 흥보가와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및 춘향가를 사사했고, 1973년 정권진(鄭權鎭)에게 심청가를 배워 제3회 판소리유파 발표회에 출연하였다.
1976년 한국브리태니커 『뿌리깊은나무』에서 흥보가 완창 발표를 했고, 이해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이수자로 지정되었다. 1978년 5월 18일 박녹주의 흥보가 전수자연창회 때 출연했고, 1984년 4월 4~12일 국립창극단의 창극 심청가 공연 때, 그리고 6월 15~20일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서동가"(薯童歌)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83년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 단원이 됐고, 1986년 완창판소리 흥보가발표회를 열었으며, 1987년 11월 25일 제17회 판소리유파 발표회에 출연했다. 1988년 박녹주의 흥부가 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1년 흥보가를 지구레코드사의 음반에 취입하였다.
1992년 3월 13~17일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박씨전 때 출연했고, 1993년 10월 17일 국악당 소극장에서 동편제 판소리 제자발표회를 열었으며, 1995년 국립극장에서 숙영낭자전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95년 10월 22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완창판소리 숙영낭자전발표회(淑英娘子傳發表會)를 열었다. 1997년 서울음반에 숙영낭자전을 취입했으며, 1998년 완창판소리 흥보가를 지구레코드에 취입하였다. 1997년 4월 17일 제28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때, 5월 16일 제17회 대한민국 국악제 때, 7월 14일 향사 박귀희 선생 4주기 추모음악회 때, 10월 11일 1997년도 제7회 동리대상 축하공연 때, 10월 17일 97서울국악제 때, 11월 15일 제27회 판소리 유파발표회 때, 그리고 11월 17일 「97만추(晩秋) 남도민요의 밤」 때 출연하였다.
1998년 10월 17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판소리 동편제 흥보가 발표회를 열었다. 1999년 4월 29일 박녹주 명창 추모 국악한마당 때, 5월 25일 99서울국악제 때, 5월 27일 명무(名舞)·명금(名琴)·명창 감상회 때, 그리고 12월 10일과 13일 국립창극단 송년대향연 때 출연하였다. 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제자로 임향임·정임순·문선영 등이 있다.
2003년 제13회 동리대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국립극장에서 박녹주 선생 탄생 101주년 박송희 선생 팔순기념 공연을 열었다. 2006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고, 2010년 제1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송희 [朴松熙]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1988년 KBS국악대상 대상
1988년 KBS국악대상 판소리상
2002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1976 국립국악원
박송희[ 朴松熙 ]
- 성악가(판소리). 판소리 여류명창.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5호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 호는 송설당(松雪堂). 예명은 박송이(朴松伊). 전남 화순(和順) 출생.
출생 | 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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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때부터 성차옥에게 단가를 배웠고, 1939~1942년 박영구·박동실·박기홍·정응민·안기선·김억순에게 소리를 사사했다. 1944년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조상선(趙相鮮)에게 사사하고 임방울협률사(林芳蔚協律社)에서 활동했고, 1948년 여성국극단(女性國劇團)에 참가하여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950~1955년 여성국극동호회(女性國劇同好會)·새한국극단·햇님국극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김주전(金主傳)이 부산에서 햇님국극단을 재조직했을 때 그녀는 조농옥·박보아·조금앵·박옥진·고일연·김일수·노신성·김정희·이소자·오수연·벽녹수·백숙자·이소은·이영자·조선애·조정례와 함께 "쌍동왕자"·"바보온달"·"마의태자"(麻衣太子) 등의 창작 사극을 공연하였다.
1963년부터 김소희(金素姬)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박봉술(朴奉述)에게 적벽가와 수궁가를, 그리고 박녹주(朴綠珠)에게 흥보가와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및 춘향가를 사사했고, 1973년 정권진(鄭權鎭)에게 심청가를 배워 제3회 판소리유파 발표회에 출연하였다.
1976년 한국브리태니커 『뿌리깊은나무』에서 흥보가 완창 발표를 했고, 이해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이수자로 지정되었다. 1978년 5월 18일 박녹주의 흥보가 전수자연창회 때 출연했고, 1984년 4월 4~12일 국립창극단의 창극 심청가 공연 때, 그리고 6월 15~20일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서동가"(薯童歌)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83년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 단원이 됐고, 1986년 완창판소리 흥보가발표회를 열었으며, 1987년 11월 25일 제17회 판소리유파 발표회에 출연했다. 1988년 박녹주의 흥부가 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1년 흥보가를 지구레코드사의 음반에 취입하였다.
1992년 3월 13~17일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박씨전 때 출연했고, 1993년 10월 17일 국악당 소극장에서 동편제 판소리 제자발표회를 열었으며, 1995년 국립극장에서 숙영낭자전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95년 10월 22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완창판소리 숙영낭자전발표회(淑英娘子傳發表會)를 열었다. 1997년 서울음반에 숙영낭자전을 취입했으며, 1998년 완창판소리 흥보가를 지구레코드에 취입하였다. 1997년 4월 17일 제28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때, 5월 16일 제17회 대한민국 국악제 때, 7월 14일 향사 박귀희 선생 4주기 추모음악회 때, 10월 11일 1997년도 제7회 동리대상 축하공연 때, 10월 17일 97서울국악제 때, 11월 15일 제27회 판소리 유파발표회 때, 그리고 11월 17일 「97만추(晩秋) 남도민요의 밤」 때 출연하였다.
1998년 10월 17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판소리 동편제 흥보가 발표회를 열었다. 1999년 4월 29일 박녹주 명창 추모 국악한마당 때, 5월 25일 99서울국악제 때, 5월 27일 명무(名舞)·명금(名琴)·명창 감상회 때, 그리고 12월 10일과 13일 국립창극단 송년대향연 때 출연하였다. 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제자로 임향임·정임순·문선영 등이 있다.
2003년 제13회 동리대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국립극장에서 박녹주 선생 탄생 101주년 박송희 선생 팔순기념 공연을 열었다. 2006년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고, 2010년 제1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송희 [朴松熙]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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