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순흥안씨 자료

순흥안씨 찬성공파 2

무량청정1 2014. 11. 23. 17:38

1派(추밀공파樞密公派)8世 안원(安瑗) *도리옥 원 古名 안정(安定)

 

경질공(景質公)   1332~1411
大司憲 開城留後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
서암(瑞巖) 병마절도사
경질공(景質公)
大司憲 奉翊大夫 刑曹典書
 1332년(충숙왕忠肅복1 壬申)生
1353년(공민왕恭愍王2 癸巳) 문과에 급제-공민왕2년계사방恭愍王二年癸巳榜-1派8世-父-安元崇1
恭愍王癸巳登科
1346년(충목왕忠穆王2 丙戌)生
1374년(공민왕恭愍王23甲寅) 문과에 급제-공민왕23년갑인방恭愍王二十三年甲寅榜-1派8世-父-安元崇1
홍무(洪武) 갑인(甲寅)에 급제(及第)
1411년(태종太宗11辛卯)졸(卒)함 (1332~1411)壽80. (1346?~1411)壽66?.
大司憲 奉翊大夫 刑曹典書 開城留後 忠臣 시호(諡號) 경질공(景質公)

(太祖朝)安瑗
順興人文成公裕玄孫父元崇官至政堂文學順城君諡文惠瑗有鷹癖在家左手臂鷹右手翻書而讀李詹過之聞山谷間有讀書聲至則瑗臂鷹右手翻綱目倚樹而讀相視大笑而去[주:大東韻玉]高麗文科累遷至工曹典書恭讓王欲遷都瑗力陳術士妄誕王從之壬申言事忤旨流配于外入本朝累授官不拜及移都漢陽上強之命留守故國後授刑曹典書諡景質[주:人物考]子從約文科牧使從約子玖文科直學玖子知歸世宗朝文科大司成
-國朝人物志-
安瑗順興人文成公裕玄孫大提學順興君謚文惠元崇子恭愍王癸巳登科恭讓王初爲言官上䟽極諌壬申以鄭夢周黨杖流遠地國亡隱居瑞原別墅我太祖徙都漢陽鎭撫開城必須舊臣有德望者起瑗爲開城留後瑗力辭又除刑判竟不起豪爽不覊自少好鷹李詹聞山谷間讀書聲謂其僕曰此必安老也至則瑗倚大樹左臂應右手翻綱目朗讀遂相視大笑謚
-紀年便攷-

원(瑗)할아버님은 호(號)가 서암(瑞巖)이시다.
1332년 즉 고려28대 충숙왕 복위(復位)원년 임신생(壬申生)이시다.
1353년 공민왕2년 문과에 등과하셔서 한원(翰苑)에 보직(補職)되셨다.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23년 (1374) 갑인(甲寅) 공민왕 23년 갑인방(恭愍王 二十三年 甲寅榜)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시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오르셨는 바
당시 고려는 명(明)나라의 끈질긴 내정간섭(內政干涉)과 왜구(倭寇)의 준동(蠢動)등등 주변국의 극성(極盛)으로 국정이 불안정한 난국에 조정의 고위요직을 맡아 국난극복에 진충보국하셨다.
이때 왕이 공은 가히 이 나라의 충신(忠臣)이오 라고 공로를 높이 찬양 치사했다고 한다.
1390년 공민왕2년에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함이 옳다고 상소를 올린일이 있는데 그 상소문의 첫구절을 보면 “위국지본(爲國之本)은 재호득인심(在乎得人心)하고 득인지요(得人之要)는 재호찰사정(在乎察事情)이니 차왕정지소 당선야(此王政之所當先也)라” [以下略] 이렇게 시작해서 우선 국정쇄신(國政刷新)과 위기국난 타개(危機國難 打開)가 당면(當面)한 구국과제(救國課題)인즉 이 이시점에서 천도는 상책이 아님을 강조 설파하였던 것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조(李朝)가 개국되자 포은당(圃隱黨)관계로 정몽주(鄭夢周)등과 같이 일시 유배(流配)되었다가 바로 풀렸다.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할아버님께 누차 고관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의지를 굳히시고 모든 공직을 사양하셨는 바 한성천도(漢城遷都)후에 왕의 특명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명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는데 끝내 사양(辭讓)하시고 취임(就任)을 아니하셨다.
 말년에는 서원 농서(瑞原 農墅)에서 시문(詩文)을 즐기시며 조용히 여생을 지내셨다.
1411년 신묘 11월13일 향수(享壽) 80세에 세상을 떠나시니 경질(景質)공 이란 시호를 받었다.

묘는 문성공조 남록 유좌(酉坐)지원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하고 개성 표절사(表節祠)에 추향(追享)하였다.
부인은 영양군부인 남씨(英陽郡夫人 南氏)이시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신 남휘주(南輝珠)공의 따님이시다. 묘는 공조와 합폄이시다.
후부인은 파평군부인 윤씨(坡平郡夫人 尹氏)이시고 선친이 영평군(鈴平君) 윤척(尹陟)공이시다. 묘는 공조 우록 신좌이시다.
슬하에 6남(종약, 종예, 종의, 종염, 종신, 종검)과 5녀를 두셨는데 그 중 장남인 종약(從約)은 전실소생이고 차자 5남과5녀는 후실소생이다.
세향은 매년 음10월1일인 바 망향제로 올린다.

경질공 안원(安瑗)
정당문학 원숭(元崇)의 아들로서 1374년(공민왕 23)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년(공양왕 2)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몸소 찾아가 간청하여 벼슬에 나아가니,
1401년(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 大學衍義》·《통감집람 通鑑集覽》 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뒤 1404년 경상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개성유후를 역임하고 병사하였다.
위인이 근면성실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

 

 

1派(판서공파判書公派)9世 안종약(安從約) 판서공(判書公) 판서공파로 분파

 

通政 判內資寺事 海州牧使
증 정헌대부 이조판서겸동지경연춘추관 성균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贈 正憲大夫 吏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 成均館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공민왕4년1355(공민왕恭愍王4 乙未)~세종6년1424(세종世宗6 甲辰) 壽70.
문과에 합격-창왕즉위년무진방昌王卽位年戊辰榜-1派9世-父-안원(安瑗)1
祭享-순흥의 용연사(龍淵祠)와 뒤에또 개성의표절사(表節祠)와 광주(光州)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配享)되다.

安從約
順興人文成公裕五世孫景質公瑗子性正直嚴毅爲世所忌高麗時文科出典十二邑秋毫不犯吏畏民懷以海州牧使
棄官歸周遊自適拜吏曹參議不就弟監察從禮僉樞從誼都正從廉參判從信參議從儉皆有所行誼子致改名玖丁酉文科直提學
-國朝人物志-
고려공민왕을미년一三五五년에출생하여 우왕무진년一三八八년에 문과에급제하였다
조선조에서 이조참의를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않고
마침내지방관리로 은둔하여 一二개고을을역임하면서
추호도범함이없었으며 성품이 정직엄숙하고 굳세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해주목사(海州牧使)로써 벼슬을버리고 돌아와 한가로이 유유자적하였다
조선 세종갑진년一四二四년三월八일에 별세하니 향년七○세이다
정헌대부 이조판서겸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正憲大夫 吏曹判書 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을 추증하다
순조임오년一八二二년에 순흥의 용연사와 뒤에또 개성의표절사와 광주(光州)의 경현사(景賢祠)에배향되다

[배] 정부인(貞夫人)동래정(東萊鄭)씨로 부친은단성보리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으로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양도공(良度公)정양생(鄭良生)이고
조부는밀직(密直)을지낸 봉산군(蓬山君)정호(鄭瑚)이며  증조는판도진시사(判都津寺事)정유의(鄭惟義)이다
외조는 첨의찬성사(僉議賛成事)로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인 문정공(文貞公)근재(謹齋)안축(安軸)이다
[묘] 파주시교하면야동산八四번지 신(辛)좌상하분이다
        세사는 음력一○월四일이다
安從約
고려 형조전서 원(瑗)의 아들. 회헌 향(珦)의 5대손,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남휘주(南暉珠 南輝珠)의 딸이다.
공민왕4년1355~세종6년1424
어려서부터 슬기가 남다르고 배움에 독실 실행에 힘썻으며 , 일찍 문장을 이루었다. 그는 웅위 한 풍채에 천성이 정직하고 굳세며 근엄했다.
용력이 있고 활쏘기에도 뛰어나, 준마를 타고 천 길 절벽을 평지처럼 달리면서 화살을 연방 먹여 쏘아도 한 발도 헛맞힘이 없었다.
우왕(禑王)14년 1388  문과에 급제, 그 수년만에 고려를 뒤엎고 왕이 된 이씨(李氏) 왕조에서 그를 이조 벼슬에 임명하매, 그 아버지가 즐겨 아니하여 "나는 두문동(杜門洞)의 여러분과 뜻을 같이해 왔는데, 네가 어찌 구차로이 이씨 조정의 벼슬에 나가겠느냐."라고 했다.
그는 자주 벼슬에 불려, 마지못해 외직으로 열두 고을의 수령을 차례로 지냈는데, 한결같이 다스림이 청간(淸簡)하여 아전이 두려워했으며, 백성이 즐겨 따랐다. 그가 임천(林川) 고을 원으로 있을 때다. 그곳 풍속이 귀신을 숭상하여, 관아에서 사람이 잇달아 죽으매 관청을 비워두고 , 부근 다른 데로 옮겨 일을 보고 있었다. 그가 부임하여 비워 둔 관청으로 들어가려 하매, 아전과 백성이 울면서 말렸으나, 그는 듣지 않고 들어가 거처했는데 아무런 변고도 없었다.
모든 민간의 잡귀를 위하는 신당(神堂)이며 요괴의 숲을 모조리 불사르거나 헐어버리게 하매,드디어 재변이 사라짐과 함께 미신의 폐단도 없어졌다.
뒤에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사직하고 물러와 서원(瑞原) 별장에서 시서와 산수를 벗하며 자적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안영시(安永時)가 묘지(묘지)를 지었다.
安從約
통정대부 이조참의 판서공 (通政大夫 吏曹參議  判書公)   9 世 (1파)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경연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추증.
1355년(공민왕4,을미년)에 중경(中京)의 양온동에서 출생한 휘종약(從約)은 원(8世,경질공)의 장남이다.
공의 조고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순성군에 봉해진 문혜공 휘 원숭(元崇)이다.
삼중대광 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 향(向)의 5대손이고,
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檢校僉議 贊成事)로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순공인 휘 우기(于器)의 현손이다.

관직 및 업적
무진년 1388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격하여 풍도를 굳게 지켰으며, 기백이 웅장하였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매양 준마를 타고는 천 길 절벽을 달려 내려가기를 평지와 같이 하였으며,
화살을 서로 연달아 쏘면 한번도 빗맞는 적이 없으니, 당시에 권력가들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라고 추존하여 천조참의(天曹參議)에 임명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내 두문동(杜門洞)의 여러 분들과 뜻을 말하고 의리를 나타냈으니 어찌 벼슬길에 구차하니 나갈 수 있겠는가"하였다.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玖)에게 준 시(詩)에 '모름지기 고사리를 뜯어먹는 사람이 되겠다.'는 싯귀가 있으니,
여기에서도 뜻을 가탁(假託)한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번 외직(外職)을 제수하자, 마침내 억지로 부임하여 열 두 고을을 역임하였는데,
간략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추호(秋毫)도 범하지 않으니, 관리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은혜롭게 여겼다.
임천(林川)에 부임하였을 때에는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등으로 관아가 온통 귀신의 소굴로 폐기되어 있었다.
공이 관아로 들어가려고 하자 관리와 백성들은 울며 만류하였다. 공은 결연히 미신을 타파하고 폐해를 깨끗이 없애고 정리하였다.
고을의 남쪽에 소울음이 울리는 옛 우물과 붉은 난삼(난衫)을 입은 대나무 숲속의 처녀귀신과 보광사(普光寺)의 간사한 중이 뱀으로 화한 것과 서원(瑞原)에 귀신이 씌어서 미친 병을 일으킨 것을 모두 제어하니
당시 사람들은 공이 정대(正大)하고 강의(剛毅)하여 능히 요망한 귀신과 괴이한 것들을 복종시키고 백성을 구제한 것을 존중하였다.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서원(瑞原)의 별장에 거주하면서 시서(詩書)와 거문고와 술로 한가롭게 지내며, 때로는 산수(山水)에 노닐고 고기잡이와 사냥에 즐거움을 붙였으며, 세상의 영화와 이익에 있어서는 초연하여 공중을 지나가는 뜬 구름과 같이 여겼다.

묘 소
1424년(세종6,갑진년) 3월 8일에 별세하니 70歲로 장수하셨다.
묘소는 교하(交河)의 아곡방(阿谷坊) 서현(鋤峴) 야동(冶洞) 신좌(辛坐)이다.

배위 및 후 손
배위는 정부인 동래정씨(貞夫人 東萊鄭氏)로, 삼중대광 봉원부원군인 양도공(良度公) 정량생(鄭良生)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 바 장자는 직제학을 지낸 안구(安玖)로 참찬에 추증되었으며, 둘째는 판윤(判尹)을 지낸 안경(安璟)으로 찬성에 추증되었고, 셋째인 안수(安琇)는 직장(直長)이며,막내인 안리(安理)는 군수(郡守)이다.
사위로는 판서 성염조(成念祖)와 현감을 지낸 박수지(朴遂智)이다

 

순흥안씨 판서공파 

순흥안씨 시조, 자미(諱 子美 신호위상호군).세 아드님을 두셨으니,

2 세 諱 영유(永儒  추밀공파, 1 파), 永麟(별장공파, 2 파), 永和(교서공파, 3 파).

3 세 諱 부(孚 태사공)

4 세 諱 향(珦 문성공)

5 세 諱 우기(于器 문순공)

6 세 諱 목(牧 문숙공) 신(愼 판관공파조)

7 세 諱 원숭(元崇 문혜공) 

8 세 諱 원(瑗 경질공)  조동(祖同 양공공파조)  수( 한림공파조)

 '경질공'이 영양군부인 南씨 사이에서 '판서공 종약(諱 從約)'을,

 후배(後配) 파평군부인 尹씨 사이에서 從禮 (감찰공파조) 從義 (첨추공파조) 從廉 (도정공파조) 從信 (참판공파조) 從儉 (참의공파조)다섯 분을 두셨습니다.

 

9 세 諱(휘) 종약(從約 판서공),

貞부인 동래정씨(父 정양생)와 혼인하시어 네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구 (玖 참찬공파조), 경 (璟 찬성공파조), 수 (琇 직장공파조), 리 (理 서파공파조)

  

 

 

 

최초의 족보 이래, 하나의 파(派)인 판서공파(判書公)파로 분류되다가

무오보(丙子譜 1917) 부터 네 개의 파로 나뉘어졌습니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추밀공파(제1파) 12 개파 가운데

제일 큰 집 (참찬공파, 찬성공파, 직장공파, 서파공파)의 연합체가 곧  判書公派이다.

 

순흥안씨 판서공파

순흥안씨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는 판서공 휘(諱)종약(從約)공(公)이다. 고려 성현(聖賢) 문성공(文成公) 향(諱 珦) 선조(先祖)의 5대손(孫)이다. 문성공의 증손인 경질공(景質公 諱 원瑗)과 영양군부인(英陽郡夫人)남(南)씨의 장자(長子)로 1367년(丁未 ?)에 출생하시고 1388년(戊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셨다. 조선 초에 이조참의(吏曹參議 正三品)에 선발(選拔)되었으나 즐거워하지 않았고 해주목사(海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나서 서원(瑞原 지금의 파주)의 농막(農幕)에 머무셨다.

파주의 농막은 공(公)의 조부(祖父)인 문숙공(諱 목牧)대에 황무지였던 파주 일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고(考)인 경질공(諱 원瑗)대에 창성(昌盛)했다. ‘순흥안씨 파주농장’은 넓기가 수만 경(數萬 頃 약 일억 평 이상)에 달하고 노비가 사는 집이 백여 채가 될 정도로 큰 농장이었다. 조선 태조가 한양의 경복궁이 완공될 때까지 6개월여를 거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큰 집이 있었을 것이다.

파주농장에서 금주(琴酒)와 시서(詩書)로 자적(自適)하며 세간사(世間事)를 멀리 하시다가 향년(享年) 70인 세종?년(1436 ?) 3월 8일에 일생을 마감하시니 장지(葬地)는 교하(交河) 아곡방 야동(阿谷坊 冶洞 지금의 파주시 야동동)이었다.

아들 구(玖 예문제학) 경(璟 한성尹) 수(琇 직장) 리(理 군수) 넷과 손자 지귀(知歸/대제학)와 중후(重厚) 근후(謹厚) 관후(寬厚) 돈후(敦厚) 인후(仁厚) 오 형제 과거 급제, 증손(曾孫) 호(瑚 참판) 선(璿 부정) 침(琛 판서) 종(琮 군수) 기(璣 전적)와 당(? 좌의정)의 귀현(貴顯), 또 사위 성염조(成念祖 정승), 외손 성 임(成任 판서) 성 간(成侃 제학) 성 현(成俔 판서), 외증손 성세창(成世昌 영의정) 등의 현달(顯達)로 증직(贈職)이 되었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겸하여 경연(經筵)과 춘추관(春秋館)과 성균관(成均館)과 의금부(義禁府)의 지사(知事), 홍문관(弘文管)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禮文館)대제학(大提學)을 추증(追贈) 받으셨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양도공(良度公) 양생(봉원부원군 良生)의 여(女)다.

4子2女를 두셨으니 長子는 玖(구)로 직제학에 증직(贈職)이 참찬(參贊 正二品), 二子는 璟(경)으로 판윤(判尹)에 증직이 찬성(贊成 從1品), 三子는 琇(수)는 직장(直長 從七品), 四子는 理(리)로 군수(郡守 從四品), 長女는 성염조(成念祖 판서)와 혼인하였고 二女는 박수지(朴遂智 현감)에게 시집갔다.

세상이 칭(稱)하기를 [구玖경璟수琇리理파派]라 하는 판서공(諱 종약從約 10세)파 자손은 순흥안씨 순수 혈통(血統)을 이어왔고 장자가 11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고려 안향安珦 우기于器 목牧 원숭元崇 원瑗 종약從約 조선 구玖 지귀知歸 호瑚 처선處善 정珽)하는 대기록을 세운 문성공 자손의 적손(嫡孫)이다. 또 삼 형제 급제기록(고려 원瑗 조동祖同 수垂)과 오 형제 급제 기록(조선 중후重厚 근후槿厚 관후寬厚 돈후敦厚, 인후仁厚), 삼 형제 동시 급제(안처겸處謙 처함處함 처근處謹 / 父 ?당), 두 형제 동시 급제 기록(위瑋 현玹 / 曾祖父 인후仁厚) 등, 대를 이어 학문을 일으키고 문성공 자손의 자존을 지켜온 가문이다.

순흥안씨 최초의 족보 병오보(丙午1546년) 이래로 ‘문성공자손(文成公子孫)’으로 기록되다가 자손이 번성하여 여러 지파(支派)로 갈라지면서 판서공(諱 종약從約을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가 되었다. 후손이 더욱 번성하여 종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므로 다른 지파와 비교가 되니, 무오보(戊午1918년)부터 판서공의 아드님 넷이 모두 파조가 되어 분리 되었다. 곧 참찬공(구玖)파, 찬성공(경璟)파, 직장공(수琇)파, 서파공(리理)파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0世 安璟 안경 贊成公(찬성공) 찬성공파 파조

 

禑王14 戊辰 1388生 ~ 世祖2 丁丑 1457卒(壽七○)

(字)는 기지(器之)이다

고려 우왕무진년一三八八년에 출생하고

벼슬은 가선대부 검교한성부윤(嘉善大夫 檢校漢城府尹)에이르다

조선 세조정축년一四五七년에 별세하니 향년은七○세다

처음에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므로써

가정대부 호조참판(嘉靖大夫 戶曹叅判)에 증직(贈職)되고

뒤에 손자인 좌의정(左議政) 안당(安瑭)이 귀하게됨으로써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지경연춘추관성균관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세자이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崇政大夫 議政府左賛成兼知經筵春秋館 成均館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貳師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에높혀 추증(追贈)되다.

[배] 정경부인(貞敬夫人)백천조(白川趙)씨로 부친은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부흥군(復興君)숙위공(肅魏公)조반(趙胖)이고 조부는 보승호군(保勝護軍)조세경(趙世卿)이며 증조는 이부상서(吏部尙書)은천군(銀川君)조하(趙何)이다

외조는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계림(雞林)이양오(李養吾)이다

[묘] 백천(白川)의발산방호산(鉢山坊虎山)안쪽 용수동(龍鬚洞)해좌로합폄하고 묘비가있다

세사는 음력一○월一五일이다

대사헌(大司憲)윤헌(尹瀗)이 신도비명을찬한바 총록에실리다.

 

강화도 단소(망배단)시제

 

음력10월15일 전국으로 흩어져 있는 순흥안씨 찬성공파 자손들이 북녁땅이 보이는 강화도에 모여 시제를 지냅니다.

판서공 휘 종약선조의 네 아드님 중 둘째 아드님인 찬성공 휘 경 선조와 그의 다섯 아드님의 묘소는

황해도 팔대 명산인 배천군 발산방 호산에 묘소가 있는데 백천(白川)의발산방호산(鉢山坊虎山)안쪽용수동(龍鬚洞)해좌로합폄하고묘비가있다.

북한이라 왕래가 안 되어 강화도에 단소를 설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세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찬성공의 다섯 아드님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셨으며 조선조 어느 가문에서도 아들 다섯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없어 문중을 빛내고 있는 선조이십니다.

찬성공 할아버지는 시조 자미의 9대손이고 향 문성공 안 자의 6대손입니다.

1. 왼쪽은 찬성공할아버지, 오른쪽은 다섯분의 아드님의 망배단입니다.

 

 

 장소 :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북성2리 91번지

시간 : 오전10시 00분 등록

점심제공 : 시제 행사

음력10월15일 전국으로 흩어져 있는 순흥안씨 찬성공파 자손들이 북녁땅이 보이는 강화도에 모여 시제를 지냅니다.

판서공 휘 종 약 선조의 네 아드님 중 둘째 아드님인 찬성공 휘 경 선조와 그의 다섯 아드님의 묘소는 황해도 팔대 명산인 배천군 발산방 호산에 묘소가 있는데 백천(白川)의 발산 방호산(鉢山坊虎山)안쪽 용수동(龍鬚洞)해좌로 합폄하고 묘비가 있다.

북한이라 왕래가 안 되어 강화도에 단소를 설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세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민통선안 군사지역으로 출입이제한되어 세사당일에만 출입가능합니다.>

찬성공의 다섯 아드님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조에서도 아들 다섯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없어 문중을 빛내고 있는 선조이십니다.

찬성공 할아버지는 시조 자미의 9대손이고 향 문성공 안 자의 6대손 입니다.

※문의사항 아래전화로 문의 요망 합니다.

㉮전화 : 서울 02-921-2663,

㉯인천(강화) : 032-932-2660

⑤FAX : 032-932-2667(통화 할 수 없음)

안 재 노(회장 직무대행)

※주소 :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북성2리 91번지

 

순흥안씨 찬성공파대종회

 

안경(安璟)의 자손(아들)

 

安重厚--->無后

安謹厚--->안림(安琳),안규(安珪)

安寬厚--->안공(安珙),안진(安珍),안형(安珩),안번(安璠)

安敦厚--->안장(安璋),안총(安璁),안당(安瑭)

安仁厚--->안성(安珹),안공(安珙),안사전(安嗣全),안산석(安山石)

 

용재총화(慵齋叢話)-

우리 나라에서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이는 많았으나,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이는 적었다.

그러므로 부모가 죽은 사람은 뒤에 증직(贈職)을 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해에 쌀 20석을 하사하였다.

전조(前朝)에 있어서는 홍우수(洪禹壽)ㆍ홍부(洪富)ㆍ홍강(洪康)ㆍ홍덕(洪德)ㆍ홍명(洪命)뿐이요,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성장(李誠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 5형제와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관후(安寬厚)ㆍ안돈후(安敦厚)ㆍ안인후(安仁厚)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이 항상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형제가 세 사람뿐이어서 다섯에 미치지 못하나, 내가 초시(初試)ㆍ중시(重試)ㆍ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화중(和仲:성간)이 또한 급제하고, 너도 초시ㆍ발영시ㆍ중시에 급제하였으니, 또한 다섯을 넘는다. 수로 견주어보면 우리 부모가 마땅히 그 영화를 누릴 일인데 국법에 있지 않은 것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견한잡록1(遣閑雜錄1)-심수경(沈守慶)

安重厚謹厚敦厚文科(안중후 근후 돈후 문과) :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寬厚仁厚武科(관후 인후 무과) :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安重厚(안중후)1 ▲조선조 (연안부사(延安府使)) <국조 문과 방목>

세종(世宗)29년(1447년), 친시(親試) 정과3(丁科3)

 

부(父) 안경(安璟)

조부(祖父)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조반(趙胖)

 

제(弟) 안관후(安寬厚), 안근후(安謹厚),안돈후(安敦厚),안인후(安仁厚)

<문종실록>의 말미(末尾)에 수찬(修纂)에 관여한 관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영관사(領館事): 정인지(鄭麟趾) 지관사(知館事): 정창손(鄭昌孫), 이계전(李季甸), 김조(金조) 동지관사(同知館事): 최항(崔恒), 하위지(河緯地) 편수관(編修官) 어효첨(魚孝瞻), 송처관(宋處寬) 기주관(記注官): 권지(權枝), 이석형(李石亨), 김덕례(金德禮), 이비, 안지귀(安知歸), 이예(李芮), 유성원(柳誠源), 양성지(梁誠之), 김지경(金之慶), 장계증(張繼曾), 강노(姜老) 이승소(李承召), 조근(趙瑾), 홍응(洪應), 성희(成熺), 김명중(金命中), 이극감(李克堪), 이함장, 서강(徐岡), 김필, 김덕원(金德源) 기사관(記事官): 이계전(李季專), 이익(李翊), 강미수(姜眉壽), 유자문(柳子文), 이유의(李由義), 안중후(安重厚), 박찬조(朴纘祖), 윤자영(尹子濚), 이제림(李悌林), 최한보(崔漢輔), 민정(閔貞), 권이경(權以經), 이문환(李文煥), 유지, 김겸광(金謙光), 안신손(安信孫), 김이용(金利用), 김영견(金永堅), 윤민(尹慜)

安謹厚(안근후)2 ▲조선조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국조 문과 방목>

세조(世祖)6년(1460년), 평양별시(平壤別試) 3(3)

부(父) 안경(安璟) 생부(生父)

조부(祖父)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조반(趙胖)

 

자(子) 안림(安琳)

형(兄) 안중후(安重厚) 제(弟) 안관후(安寬厚), 안돈후(安敦厚),안인후(安仁厚)

>>> 이력 및 기타

- 신동국여지승람 43권 황해도 백천군 문회서원 역사 -

安寬厚(안관우)3 1417 ~ ? ▲조선조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

<국조 문과 방목>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전적(典籍)

 

배(配)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이십칠(二十七)

● 규행(閨行)

원씨(元氏) 본(本) 원주(原州) 순흥(順興) 안근후(安瑾厚)의 처(妻) 명정려(命旌)

 

자(子) <국조 문과 방목>

안림(安琳)

성종(成宗)8년(1477년),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3(乙科3)

 

부(父) 안근후(安謹厚) 생부(生父)

 

조부(祖父) 안경(安璟)

 

증조부(曾祖父) 안종약(安從約)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승사랑(承仕郞)

품계(品階)

관직(官職) 예조/좌랑(禮曹/佐郞)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을 통한 문회서원

열녀】 본조 원씨(元氏) 송화 현감 안근후(安謹厚)의 아내다. 근후가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이 3년을 하고, 그대로 무덤 곁에서 살았다. 사실이 보고되어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효자】 안규(安珪) 열녀 원씨(元氏)의 아들이다. 일찍이 집에 불이 났는데, 원씨가 남편의 신주를 안고, 미처 나오지 못하고 엎어지니, 안규가 불 속으로 들어가서 어머니를 업고, 신주를 안고 나왔는데 머리와 얼굴이 모두 데어 문드러졌다.

세종(世宗)29년(1447년), 식년시(式年試) 정과21(丁科21)

생년(生年) 1417년, 정유

자(字) 율보(栗甫)

부(父) 안경(安璟)

조부(祖父)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조반(趙胖)

처부(妻父) 김숙정(金淑貞)

형(兄) 안근후(安謹厚)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41(신유)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官職) 감사(監司), 직학(直學)

자 율보(栗甫)

생년 정유(丁酉)1417

합격연령 31

전력 : 진사(進士)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 감사(監司)

관직 : 직학(直學)

타과 : 세종(世宗) 23년(1441) 신유(辛酉) 진사시(進士試)

成宗 八年(丁酉 : 1477年)

윤 2월 23일(신유)

 

○강원도(江原道)의 순찰사(巡察使) 이극증(李克增)과 관찰사(觀察使) 안관후(安寬厚)가 치계(馳啓)하기를, “신등이 함께 삼척부(三陟府)의 토성(土城) 안을 살펴보았더니, 샘이 없어서 관방(關防)으로 적합하지 않으나, 성(城) 동문(東門) 밖의 낮은 땅에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으니, 성을 물려서 쌓을 만합니다.” 하였는데, 병조에서 이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청컨대, 가을에 그 고을 백성둘로 하여금 접차 수축(修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0일(갑인)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양경(金良■)과 경기 겸병마절도사(京畿兼兵馬節度使) 박중선(朴仲善)․충청도 병마절도사 안인후(安仁厚)․황해도 겸병마절도사 정괄(鄭眸)․전라도 병마절도사 이숙기(李淑琦)․강원도 겸병마절도사 안관후(安寬厚)․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신주(辛鑄)․우도 병마절도사 권경(權黛)에게 전교하기를,

“열병(閱兵)과 사냥(敆狩)은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아울로 폐할 수 없다. 오는 10월 초3일에 교외(郊外)에서 친열(親閱)하고, 이어서 광주(廣州)에서 사냥하려고 하니, 이제 보내는 발병부(發兵符)를 합(合)해서 증험해 보고, 도내(道內)에서 유방(留防;머물로서 방수(防戍)함)하고 있는 군사 이외에 번휴(番休)하고 있는 모든 고을의 군사는 모두 조발(調發)해서, 왕복[往返]을 따지지 말고 12일간의 양미(糧米)를 싸 가지고 오는 9월 28일에 정금원평(定金院坪)에서 모여 기다리게 하라. 이달 8월에 교대(敆番)한 군사(軍士)는 내려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았고, 오는 11월에 당번(當番)할 충순위(忠順衛)의 정병(正兵) 등은 번상(番上)할 시기가 박두해서,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고, 재해(災害)을 입은 여러 고을의 군사는 모두 징집해 모으지 말라.” 하였다.

8월 26일(경신)

○강원도 관찰사 안관후(安寬厚)에게 유시하기를,

“군려(軍旅)의 동정(動靜)은 오로지 병부(兵符)에 달려 있어서,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아니하다. 비단 합하여 증험할 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고받을 때에도 역시 신중하게 해야 마땅하다. 지금 도내(道內)의 병부를 주고받는 데에 잘못하여서 좌우(左右)가 바뀌는데에 이르렀으니, 병부(兵符)를 설치한 본의(本意)가 아니다. 장차 추국(推■)을 행하여서 죄를 주고자 하였으나, 강무(講武)하는 날이 박두하여서 군사를 징집하는 것을 늦출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우부(右符)를 선전관(宣傳官) 이영분(李永■)에게 주어서 내려 보내니, 경은 그것을 받아 합하여 징험해본 뒤에, 전에 있었던 좌부(左符)를 즉시 속히 올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成宗 九年(戊戌 : 1478年)

5월 28일(기축)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강원도 영동(嶺東대관령 동쪽)의 군현(郡縣)에 읍(邑城)을 쌓지 아니한 곳이 많고, 울진(蔚珍)․평해(平海) 같은 데에는 비록 있기는 하나 원장(垣墻)과 다름이 없으니, 한 해 동안에 비록 다 쌓지는 못할지라도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명년에 한 성을 쌓으면 거의 가(可)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려움이 없지 않겠는가?” 하였다. 안관후가 아뢰기를,

“백성을 반드시 농한기에 부리면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兵曹)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안관후가 또 아뢰기를,

“낙산사(洛山寺)는 예전 길은 평탄한데, 새 길은 험하므로, 다니는 사람이 매우 괴로와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옛 길은 절에서 멀고, 절 앞에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여서 다니는 사람이 절을 볼 수가 없으니, 청컨대, 옛 길을 회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길이 절에서 멀다면, 다니는 사람이 그 절을 볼지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감사(監司)로 하여금 친히

살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안관후가 또 아뢰기를,

“낙산사 앞 20여 리(里)는 절의 중들이 남이 고기잡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에 가서 취하니,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지사(知事) 홍응(洪應)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세조조(世祖朝) 때에 중 학열(學悅)이 금하기를 청한 것입니다.”'하고, 안관후가 아뢰기를,

“한 절을 위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이(利)를 보지 못하게 함이 옳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좌승지 박숙진(朴叔■)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감사(監司)로 하여금 금지하는지의 여부를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3일(임오)

○상참(常參)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安寬厚)가 아뢰기를,

“신이 전날 낙산사(洛山寺)에 구로(舊路)를 열어 금표(禁標)를 치우도록 청하였었는데, 지금까지 하명(下命)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낙산사의 금표는 1백보(步)에 불과하고 해수(海水)는 지극히 넓은데, 하필 1백보 안에서 고기를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구로(舊路)는 절에서 거리가 멀지 아니한데, 대개 양양(襄陽)을 왕래하는 사자(使者)들이 기생을 탐하여 오래 머물면서 간혹 횃불을 들고 밤길을 다니다가 불을 내어 연소(延燒)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만일 구로를 다시 연다면 내가 기생을 없애버리겠다.”

라고 하였다. 안관후가 말하기를,

“기생이야 있고 없고 관계가 없으나, 양양에 기생이 있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데, 이제 만일 기생을 없애 버린다면 후세에 반드시 절을 위해서 없애었다고 할 것입니다. 옛날 제왕도 택량(澤梁;못에 설치한 어량(魚梁))

은 금하지 아니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하였는데, 이제 만일 금하신다면 후세에 반드시 `절을 위해서 금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신자(臣子)로서 선왕(先王)때의 일을 다 고치자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안관후가 말하기를, ”만일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고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고, 좌참찬(左參贊) 허종(許琮)이 아뢰기를, “선왕 때의 일로 헌장(憲章)에 관계된는 것은 경솔히 고칠 수 없겠지만, 이와 같은 일은 마땅히 빨리 고쳐야 합니다.” 하였다. 안관후가 말하기를, “만일 농사가 흉년이 되어서 백성들이 주리게 되면 반드시 해물(海物)을 취하여 먹어야 할 것인데, 어찌 백성들로 하여금 굳이 가까운 데를 버리고 먼 데에서 구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그 금표(禁標)의 안에 민가가 얼마나 되기에 꼭 해물(海物)에 의뢰해서 살려면 창해(蒼海)가 굉장히 넓은데 어찌 반드시 금하는 곳에서 해야 되겠는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손순효(孫舜孝)가 아뢰기를,

“다른 곳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을 위해서 금표를 설치하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고, 지평(持平) 안선(安璿)이 아뢰기를, “신 등이 자주 불가(佛家)의 일을 아뢰었으나, 한번도 아직 윤허를 받지 못하여 결망(缺望)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선왕 때의 일을 다 고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원각사(圓覺寺)를 헐어버리고, 중[沙門]들을 모두 죽여버린 뒤에야 마음이 쾌하겠느냐?”

하니, 안관후가 말하기를, “큰 일은 비록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작은 일은 고쳐버리는 것이 매우 옳습니다.” 하고, 안선이 말하기를, “비록 원각사를 헐어버리고 중들을 다 죽인다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위(魏)나라 임금이 천하의 중들을 다 죽여버렸는데, 이는 너무 심한 일이었다.” 하였다.

9월 3일(신유)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大司諫) 안관후(岸寬厚)․집의(執義) 김춘경(金春卿) 등이 낙산사(洛山寺)의 길을 막은 것과, 해산물 채취를 금지한 것 등의 일을 논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安敦厚(안돈후)4 [조선조 급제자 정록] 성균관 사예 (成均舘司藝)

(세종(世宗) 6년 · 평양별시(平壤別試) · 을과삼(乙科三))

평양별시(平壤別試) 삼등(三等) 11위

敦厚돈후 字可化 一四二一年世祖辛丑生 庚辰以生員同仲氏聯璧 文科官 成均舘司藝

癸卯卒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配 贈貞敬夫人 密陽朴氏 父修撰融祖賛成翊 曾祖判圖判書永均

○墓 虎山先塋左崗子坐上下 墳歲祀十月十五日有神道碑晩鎔撰 十六代孫柄眞立碑追記錄

墓在白川虎山先塋局內로久闕省墓러니十五代孫宇鎬十六代孫承佑承千十七代孫春模宰栳等諸孫이敬慕之義로서輸材互出財力而江華先考祭祀壇側에永爲合設祭祀壇하고陰十月十五日享祀

왕/년도 : 세조(世祖) 6년

과거시험연도 : 1460 경진

시험명 : 평양별시(平壤別試)

등위 : 3(3)

성명(姓名) : 안돈후(安敦厚)

본관(本貫) : 순흥(順興)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사예(司藝)-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음악을 지도한 정4품 관직

봉산 군수(鳳山郡守)

형(兄) : 안중후(安重厚)

부(父) : 안경(安璟)

조부(祖父) : 안종약(安從約)

증조부(曾祖父) : 안원(安瑗)

외조부(外祖父) : 조반(趙胖)

처부(妻父) : 박융(朴融)

安仁厚(안인후)5 成宗 八年(丁酉 : 1477年)

8월 20일(갑인)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양경(金良■)과 경기 겸병마절도사(京畿兼兵馬節度使) 박중선(朴仲善)․충청도 병마절도사 안인후(安仁厚)․황해도 겸병마절도사 정괄(鄭眸)․전라도 병마절도사 이숙기(李淑琦)․강원도 겸병마절도사 안관후(安寬厚)․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신주(辛鑄)․우도 병마절도사 권경(權黛)에게 전교하기를,

“열병(閱兵)과 사냥(敆狩)은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아울로 폐할 수 없다. 오는 10월 초3일에 교외(郊外)에서 친열(親閱)하고, 이어서 광주(廣州)에서 사냥하려고 하니, 이제 보내는 발병부(發兵符)를 합(合)해서 증험해 보고, 도내(道內)에서 유방(留防;머물로서 방수(防戍)함)하고 있는 군사 이외에 번휴(番休)하고 있는 모든 고을의 군사는 모두 조발(調發)해서, 왕복[往返]을 따지지 말고 12일간의 양미(糧米)를 싸 가지고 오는 9월 28일에 정금원평(定金院坪)에서 모여 기다리게 하라. 이달 8월에 교대(敆番)한 군사(軍士)는 내려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았고, 오는 11월에 당번(當番)할 충순위(忠順衛)의 정병(正兵) 등은 번상(番上)할 시기가 박두해서,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고, 재해(災害)을 입은 여러 고을의 군사는 모두 징집해 모으지 말라.” 하였다.

[묘] 백천(白川)의발산방 호산(鉢山坊 虎山) 안쪽 용수동(龍鬚洞)

황해도 연백군 [延白郡]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운산면 雲山面=발산방(鉢山坊)

유적으로는 주암리의 천등산에 등암사(燈巖寺)가 있으며 산기슭에 천등암(天登巖)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이 바위 아래에서 탄생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절터에 큰 미륵상만이 남아 있다. 강서리 백마산(白馬山) 남록에는 고려시대 시인·문객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았던 강서사(江西寺)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호산(虎山)·강서(江西)·우포(牛浦)·파릉(巴陵)·석산(石山)·대야(大也)·도태(都台)·주암(舟巖) 등 8개 이가 있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1世-安仁厚(안인후) (전자족보 24P)

 

嘉善 兵馬水軍節度使 贈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행현감(行縣監),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당상관(堂上官),겸경기수군절도사(兼京畿水軍節度使)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안인후(安仁厚)의 증손자 안위(安瑋)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안위의 동생인 안현(安玹)은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安仁厚(안인후, 兵判公 병판공)

세종 29년 정묘년(1447년)에 무과에 올랐으며,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뒤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 벼슬을 받았다.

산소는 호산(虎山)안골의 선영 남쪽 기슭에 진좌(辰坐)로 모셨으며, 비석을 세웠다.

음력 시월보름에 세사를 모신다.

후손인 억(檍)이 기록(誌)을 지었으며, 교리(校理) 재린(在麟)이 유사(遺事)를 지었다. 아울러 총록(總錄)에 기록되어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옥천전씨(沃川全氏)이며, 그 아버지 진의(進義)는 부위의(副尉義)에 이르렀고, 그 할아버지는 봉사(奉事) 귀덕(貴德)이며, 그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소경(司僕少卿)에 오른 비(備)이며, 그 외할아버지는 우헌납(右獻納)에 오른 탐진안씨 안도(安堵)로서 슬하에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다.

묘는 옥천 서정리(西亭子) 당골(唐洞)에 유좌(酉坐)로 모셨다.

음력 시월십일에 세사를 모신다.

후손인 억(檍)이 기록(誌)하였으며, 문경공(文敬公)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갈(碣)을 지었으며, 총록(總錄)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 6년 경진(1460, 천순 4)-윤 11월 15일(정사)

이찬·이연·안인후·권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찬(李穳)을 은천군(銀川君)으로 삼고, 이연(李衍)을 금산정(金山正)으로 삼고, 안인후(安仁厚)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권언(權躽)을 충청도 처치사(忠淸道處置使)로, 어득해(魚得海)를 경상좌도 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로, 이인(李茵)을 경상우도 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로 삼았다.

세조 6년 경진(1460, 천순 4)-윤 11월 15일(정사)

이조·병조에 양정이 북정할 때에 거느린 군사의 군공을 올리도록 전지하다

이조(吏曹)·병조(兵曹)에 전지하기를,

“양정(楊汀)이 북정(北征)할 때에 거느린 군사의 군공(軍功)은 1등은 다른 2등에 준하고, 2등은 다른 3등에 준하게 하되,

안인후(安仁厚)는 승진시켜 당상관(堂上官)으로 삼고, 이극균(李克均)은 1등의 예에 의하여 자급(資級)을 올리라.”

하였다.

세조 7년 신사(1461, 천순 5)-2월 6일(정축)

회령(會寧)·동관(童關) 싸움에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다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구치관(具致寬)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이제 강효문(康孝文)·박형(朴炯)의 계본(啓本)을 보고 변(變)에 대응할 계책의 합당함을 다 알았으며, 앞서 유시한 사목(事目)은 그 지휘하는 데 참작할 일단을 개시(開示)한 것에 불과할 뿐이지 멀리서 제어하려는 것은 아니니, 어찌 사목에 구애되겠는가? 경(卿)이 진퇴(進退)를 지휘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회령(會寧)·동관(童關) 싸움에 공이 있는 자를 포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은 이를 자세히 핵실(覈實)하여 계문(啓聞)할 것이며, 강효문(康孝文)·박형(朴炯)·강순(康純)·안인후(安仁厚) 이하 공이 있는 장졸(將卒)에게는 잔치를 내려 주어 그 노고를 위로하도록 하라.”

세조 7년 신사(1461, 천순 5) -6월 26일(을미)

만포 절제사로 안인후를 가도록 하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근일에 김유완(金有完)을 만포 절제사(滿浦節制使)로 의수(擬授)하였으나, 다시 문무(文武)에 능하고 적(敵)에 대응하여 일을 잘 처리하는 자를 골라서 아뢰도록 명하였는데, 지금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계류하고 아뢰지 않는 것은 어찌함인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김종순(金從舜)이 민첩하지 못함을 사례하고, 강곤(康衮)·안인후(安仁厚)·김처지(金處智)로써 아뢰었다. 명하여 안인후를 가도록 하였다.

성종 4년 계사(1473, 성화 9)-6월 28일(정해)

박중선·윤계겸·성윤문·이예·김수화·홍약치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박중선(朴仲善)을 숭정 대부(崇政大夫) 평양군(平陽君)으로, 윤계겸(尹繼謙)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성윤문(成允文)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예(李芮)를 가정 대부(嘉靖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김수화(金守和)를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약치(洪若治)를 통정 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정괄(鄭佸)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박거겸(朴居謙)을 겸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兼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이극균(李克均)을 겸 경기 관찰사(兼京畿觀察使)로, 김양경(金良璥)을 겸 황해도 관찰사(兼黃海道觀察使)로, 손소(孫昭)를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안동 대도호부사(行安東大都護府使)로, 이장손(李長孫)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박옹(朴壅)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로, 김순신(金舜臣)을 겸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兼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안인후(安仁厚)를 겸 경기 수군절도사(兼京畿水軍節度使)로, 민효원(閔孝源)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로 삼았다.

성종 8년(丁酉 : 1477年)-8월 20일(갑인)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김양경(金良■)과 경기 겸병마절도사(京畿兼兵馬節度使) 박중선(朴仲善)․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안인후(安仁厚)․황해도 겸병마절도사 정괄(鄭眸)․전라도 병마절도사 이숙기(李淑琦)․강원도 겸병마절도사 안관후(安寬厚)․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신주(辛鑄)․우도 병마절도사 권경(權黛)에게 전교하기를,

“열병(閱兵)과 사냥(敆狩)은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아울로 폐할 수 없다. 오는 10월 초3일에 교외(郊外)에서 친열(親閱)하고, 이어서 광주(廣州)에서 사냥하려고 하니, 이제 보내는 발병부(發兵符)를 합(合)해서 증험해 보고, 도내(道內)에서 유방(留防;머물로서 방수(防戍)함)하고 있는 군사 이외에 번휴(番休)하고 있는 모든 고을의 군사는 모두 조발(調發)해서, 왕복[往返]을 따지지 말고 12일간의 양미(糧米)를 싸 가지고 오는 9월 28일에 정금원평(定金院坪)에서 모여 기다리게 하라. 이달 8월에 교대(敆番)한 군사(軍士)는 내려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았고, 오는 11월에 당번(當番)할 충순위(忠順衛)의 정병(正兵) 등은 번상(番上)할 시기가 박두해서, 왕래하는 데 폐단이 있고, 재해(災害)을 입은 여러 고을의 군사는 모두 징집해 모으지 말라.” 하였다.

성종 11년 경자(1480, 성화 16)-12월 9일(갑인)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안인후가 하직하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안인후(安仁厚)가 하직하였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2世-안공(安珙)  (전자족보 31P)

 

천문학습독(天文學習讀)

가선(嘉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공의 휘는 공(珙), 병판공 인후 공의 2째 아드님이다. 공의 생졸 연월일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처음에 습독으로 시작해서 관찰사를 끝으로 관직을 마치고, 광주(光州)의 산속 집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이것은 사촌형제인 정민공(貞愍公) 당(瑭) 때문이었는데 정민공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만나 화를 입었다. 공은 구차하게 벼슬하기 보다는 속세에 몸을 피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고, 스스로 촌부야로(村夫野老)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다.

관직은 천문학 습독관 가선대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오르시었다.

부인은 금성 정씨(錦城鄭氏)이며, 그 아버지는 감사(監司)를 지낸 경(耕)이다.

공은 3남 3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습독을 지낸 순수(舜壽)이고, 둘째 아들은 참의(參議)를 지낸 순명(舜命)이고, 셋째 아들은 주부(主簿)를 지낸 순담(舜聃)이다.

[출처] 3) 병조판서공 후손/찬성공의 빛난 후손들 (순흥안씨문숙공파) |작성자 안치원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3世-안순명(安舜命)  (전자족보 31p)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 참의(參議)


 안공 휘 순명(舜命):병판공(兵判公) 인후(仁厚)의 손자로써 시조로부터 13세이시며, 휘공(珙)의 둘째 아드님시이다. 중종 임신(1512)년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예조참의를 하셨다. 배위는 숙부인 금성 오씨(金城吳氏)이고, 아버지는 세풍(世風)이시며, 슬하에 1남을 두셨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4世-안근(安瑾)   (전자족보 31P)           

1594년(선조27년)안근(安瑾)의 무과 급제 홍패.

임진왜란 당시의 무과 급제 홍패로

안근은 병과 일백 십팔인으로 급제.

전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문과보다 훨씬 많은 수를 뽑음.

안근(安瑾)의 묘는 도수리 산72번지에 있는데,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이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역임하였고

그의 후손들의 묘가 같은 묘역(墓域)내에 있다.

 


 ㅇ. 안공 휘 근(瑾):인후(仁厚)공의 증손으로 시조로부터 14세이며, 아호는 낙암(樂菴)이시다. 인종 을사(乙巳)년에 음직으로 사직(司直)을 하셨다. 배위 숙인(淑人) 아버지는 안동권씨이며, 참봉 치(錙이시다. 1남을 두셨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5世-안보국(安輔國) (전자족보 234)

관군자주부(官軍資主溥)

 ㅇ. 안공 휘 보국(輔國):인후(仁厚)공의 고손으로 시조로부터 15세이며, 선조 경오년에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하셨다. 배위는 천안 전씨(天安全氏)이며 참봉 의석(義碩)의 따님으로, 3남 경(璥)․정(珽)․숙(璛과 4녀를 두셨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6世-안정(安珽) (전자족보 237P)

贈掌樂院正

 ㅇ. 안공 휘 정(珽):인후(仁厚)의 현손으로 시조로부터 16세손이다. 인조 계해(癸亥)에 증장악원정(贈掌樂院正)을 하시고, 배위는 공인(恭人) 김해 김씨(金海金氏)이시며, 부친께서는 내금위 우(瑀)의 따님이며, 2남 수기(守基)․}수선(守先)을 두시었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7世-안수선(安守先) (전자족보 238P)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8世-안욱(安) (전자족보 239P)

 

 

1派(찬성공파贊成公派)19世-안처인(安處仁) (전자족보 239P)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0世-안필명(安必明) (전자족보 1418P)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1世-안후택(安厚宅)  (전자족보 1419P)

 

 

휘 후택 할아버지는

 

족보에는 있으나 후손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음.(찬성공파 전자족보 1419쪽)

 

후손이 족보 편찬 때 올리지 않아 누락된 것으로 생각되며 우리 집에 내려오는

 

순흥안씨세계(順興 安氏世系)에 있는 내용을 차후 모두 족보에 올려야 함

 

아래는 휘 후택 할아버지 이후 우리 족보 내용이다.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1世-안후택(安厚宅) 

 

戊寅(1758년)卒 配 光山金氏 父 重植 墓 山直洞艮坐 雙墳(무인졸 배 광산김씨 부 중식 묘 산직동 간좌 쌍분)

대전광역시 서구 산직동 (大田廣域市西區山直洞)일까?

간좌:묏자리나 집터 등이 간방(艮方)을 등지고 앉은 자리 간방:정동과 정북의 가운데 45도..동북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2世-안제룡(安濟龍 字 龍圭)

 

庚申生 辛卯卒 配 漢陽趙氏 墓 加資洞 艮坐 合窆 경신(1740년)생 신묘(1771년)졸(32세) 배 한양조씨

묘 가자동 간좌 합펌) 경기도 광주(廣州) 기자산(其自山) 가자동(加資洞)?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3世-안형(安亨 字 正凡)

 

字 正凡 癸未生 甲子卒 配 全義李氏 墓 靈岩白雲洞酉坐

자 정범 계미(1763년)생 갑자(1804년)졸(42세) 배 전의이씨 묘 영암백운동유좌

유좌:묏자리, 집터 등(等)의 유방(酉方)을 등진 자리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4世-안유현(安儒玄 字 君孟)

 

字 君孟 丙申生 辛巳 六月二十一日卒 配 玄風郭氏 墓 羅州 노안면 도산리산1-2번지 雙墳

자 군맹 병신(1776년)생 신사(1821년) 6월21일 졸(46세) 배 현풍곽씨 묘 나주 노안면 산산리산 1-2번지 쌍분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5世-안수팔(安秀八 字 永西)

 

字 永西 己卯생 戊辰 四月五日卒 墓 光州 東谷面 堯基里 店前嶝 酉坐

자 영서 기묘(1819년)생 무진(1868년) 4월5일졸(50세) 묘 광주 동곡면 요기리 점전등 유좌

배 羅州羅氏 壬午生 己丑 九月十一日卒 墓 光州 광산구 (동곡면) 하산동 乙坐(을좌)

배 나주라씨 임오생(1822년) 기축(1889년) 9월11일 졸 (68세) 묘 광산구 하산동 을좌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6世-안원복(安元福 字 成午)

 

字 成午 戊申(1848년)生 丙戌(1886년) 八月二十九日 卒(39세) 墓 光山區 어등산(찾지 못함)

자 성오 무신생            병술 8월29일졸                             묘  광산구 어등산

配 伊川徐氏 父 成贊 壬子 五月二十八日 卒 墓 羅州 노안면 도산리산1-2번지

배 이천서씨 부 성찬 임자 5월 28일 졸       묘 나주 노안면 도산리산 1-2번지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7世-안경환(安敬煥 字 國先)

 

字 國先 壬午(1882년)生 甲申(1944) 十一月二十二日 卒(63세) 묘: 광산구 하산동(본덕동)

자 국선 임오생             갑신 11월22일졸

配 金海金氏 壬辰(1892년) 十二月二十八日生 壬辰(1952년) 正月十六日 卒(61세) 묘: 광산구 하산동

배 김해김씨  임진 12월28일생                    임진 1월16일졸

1남3녀 1남 안정태 1녀 金海金氏 金永黙  2녀 金海金氏(대촌 고모부) 3녀 金海金氏(막내 고모부)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8世-안정태(安正泰)

 

己未(1919년) 八月十一日生 辛亥(1971년12월30일) 十一月十三日卒(53세) (忌 十一月十二日)

기미 8월11생                   신해 11월13일졸

配 羅州林氏 判任 父 守東 庚申(1920년) 正月十八日生 乙亥(1995년11월22일) 九月三十日卒(76세)(忌 九月二十九日)

배 나주임씨 판님 부 수동  경신1월18일생                을해 9월30일졸 

墓 羅州 노안면 도산리산1-2번지

4남2녀 1남 安種琇 2남 安光琇 3남 安鎭琇 4남 安英琇

1녀 安花子 夫 보성선씨 宣鐘華 2녀 安明子 夫 平山申氏 申元求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9世-안종수(安種琇 種南)

 

丙戌(1946년) 七月八日生 配 金海金氏 金永子 壬卯(1951년) 二月二十四日生 父 金容哲 乙未(2015년)앙력 六月三日 15時30分 卒

1녀 安志姸 戊午(1978년) 2월8일생(양 3월16일) 2녀 安晶姸 庚申(1980년) 4월10일생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9世-안광수(安光琇)

 

壬辰(1952년) 二月三日生 配 金海金氏 父 金容佰

1남 安基範 庚申(1980년) 4월28일생 1녀 安秀姸 辛酉(1981년) 11월13일생

壻 朱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9世-안진수(安鎭琇)

 

丙申(1956년) 正月一日生 配

1남 安석영 2남 안채영

 

 

1派(찬성공파贊成公派)29世-안영수(安英琇)

 

辛丑(1961년) 四月二四日生 配

1녀 안가연 2녀 안가희

 

 

1派(찬성공파贊成公派)30世-안기범(安基範)

 

庚申(1980년) 4월28일생 配

子 현서

 

 

1派(찬성공파贊成公派)30世 安석영

 

1派(찬성공파贊成公派)30世 安채영 

 

1派(찬성공파贊成公派)31世 安현서

 

 

순흥안씨대종회나 찬성공파 대종회에서 족보 발행시 21세 휘 후택 할아버지부터 31세까지 모두 등재해야 한다.


순흥안씨 찬성공파 가족묘(상석 앞면)


비문 글씨 


24

순흥안공 휘 유현 (字 군맹)

배 현풍곽씨 

공 1776~ 1821621

1794~ 1848911

 

25

순흥안공 휘 수팔 (字 영서)

배 나주라씨 

공 1819519~ 186846

182223~ 1889911

 

26

순흥안공 휘 원복 (字 성오)

배 이천서씨 

공 1848215~ 1886830일

배 1851126~ 1912529

 

27

순흥안공 휘 경환 (字 국선)

 배 김해김씨 

공 1882212~ 19441122

18921228~ 1952116

 

28

순흥안공 휘 정태

배 나주임씨 판님

공  1919811~ 19711113

1920118~ 1995930

 

 

상석 옆면에 넣은 글씨    서기 2017년7월4일


29세                                  30세                              31

종남 김영자                    기범 배 김지연                   현서

광수 김정순                       석영

진수 박기례                       채영 배 정진영

영수 김순이                       지연

화자 선종화                   정연

명자    신원구                   수연 주현철

                                    가연

                                             가희

 



 

우리는 시조 휘 자미 할아버지의

 

큰아들 2세 휘 영유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1파(추밀공파)이며

둘째 휘 영린 2파(별장공파)

셋째 위 영화 3파(교서공파)

 

우리는 1파 추밀공파로 내려오다

 

9세 큰아들 판서공 휘 종약(시조 이래 종손) 판서공파

 

둘째 휘 종례 감찰공파

셋째 휘 종의 첨추공파

넷째 휘 종렴 도정공파

다섯째 휘 종신 참판공파

여섯째 휘 종검 참의공파로 각각 분파 되었다.

 

9세 판서공 휘 종약

 

 

 

(1918년 이전은 판서공파로 내려오다 손이 많아짐에 따라 1918년 무오보 족보부터 분파)

 

큰아들 10세 휘 구 참찬공파

 

둘째 휘 경 찬성공파.

 

셋째 휘 수 직장공파

 

넷째 휘 리 서파공파로 다시 분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둘째 휘 경 할아버지 후손으로 찬성공파가 되었다.

 

* 항렬도

 

 

 

-1파 추밀공파  -

이 항렬도가 병자대동보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이후 경신대동보와 각 소종 파보에서 준용하고 있다.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淳

柄□

□爀

孝□

□鉉

 

 

 

 

 

 

□洙

相□

□燦

重□

□銓

 

 

 

 

 

 

□洛

東□

□燁

吉□

□鏞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泰□

□根

性□

□均

會□

□泳

萬□

□愿

宰□

□鎭

海□

準□

□柱

恒□

□基

令□

□澤

華□

□愚

起□

□銖

漢□

洪□

□楨

悌□

□壽

念□

□求

茂□

□德

奎□

□鍵

浩□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1세

52세

□集

容□

□周

欽□

□濬

           

□당

光□

□疇

鍊□

□源

 

 

 

 

 

 

□간

亨□

□坤

鐵□

□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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