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순흥안씨 자료

순흥안씨 찬성공파 1

무량청정1 2014. 11. 23. 17:35

 

순흥안씨는 순흥의 토족 성씨이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된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가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증손 안유(安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가 크게 현달하여 생활 근거지가 개성으로 나뉘어져 살게 되었다. 시조 [子美]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이며 이를 각각 1파, 2파, 3파라 부른다. 영유의 후손에 14개파, 영린의 후손에 4개파, 영화의 후손에 4개파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종가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드러난 조상으로는 시조의 증손 안향이 1260년[고려 원종 1년]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다.

 

영린의 후손으로 안문개(安文凱 ∼1338)가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로 원나라에 불리어 가 4년동안 억류되어 있었을 때 함께 있으면서 왕을 위한 경비를 국내에서 염출하여 조달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서 종정부(宗正府)에 가두었다. 왕을 따라 귀국한 뒤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었고, 1327년(충숙왕 14)에는 왕이 원나라에 있었을 때 충절을 바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순흥부원군(順興府院君)의 호를 받았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송천봉(宋天鳳)·홍언박(洪彦博)·이달존(李達尊)·이문정(李文挺)·최재(崔宰)·정운경(鄭云敬) 등 33인과 명경(明經)·은사(恩賜)각 2인을 급제시켰고 옥대(玉帶)를 하사받았다.

영화의 후손으로서 1324년(충숙왕11)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근재 (謹齋) 안축(安軸)은 충혜왕(忠惠王) 때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순흥의 자연경관을 노래한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으며「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文集)을 남겼다.


그 외 시호를 받은 선조가 32명에 이르며, 그중 문(文)자 시호를 받은 이가 17명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안중근(安重根), 안병찬(安秉瓚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궐에 들어가 통곡함), 안승우(安承禹 충주(忠州)의 황강(黃岡) 싸움에서 전사한 전사 ),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안익태(安益泰 애국가 작곡), 백산 안희제(安熙濟), 안재홍(安在鴻)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순흥안씨의 시조(始祖)는 휘가 자미(子美)이다. [어떤 족보에는 공석(公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부인에 대한 기록은 실전하여 알지 못한다. 묘소는 소백산(小白山)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비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1654년에 후손 순원군(順原君[應昌])이 의성현감(義城縣監)에 부임하였다가, 시조(始祖)의 제사가 단절되고 선조들의 유적이 민멸된 것을 보고 경향의 종친들의 협력을 받아, 순흥 평리촌(坪里村) [현 석교리(石橋里) 203번지]을 고택유지(古宅遺址)로 추정하고, 시조공과 아들 태사공(太師公=휘 孚)의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이후 방손들의 제단과 합하여 졌다가, 1988년에 순흥 읍내리 비봉산 아래에 새로이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하여 이설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 2천여 명이 참배하고 세사를 올린다.

갑신파보(甲申派譜 순조23,1824)에서 후손 기명(其命)이 진위(振威)에 사는 종친의 가첩의 기록에 근거하여, "시조공의 묘소는 동마암(東磨岩)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로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다." 하였다. 이는 이전 족보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실인데, 이전에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의 집에 소장된 구보(舊譜)에서 내사령(內史令) 정혁황(丁奕煌)의 사위에 안자미(安子美)로 기록하고 그 아래에 외손으로 태사공과 문성공의 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족보에 정식으로 올리지는 못하고 참고자료로 전하고 있다.


속설에, "안씨(安氏)의 초조(初祖) 안원(安援)은 본래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농서이씨(농西李氏)였는데, 서기807년(당나라,헌종2, 신라,애장왕8)에 신라(新羅)로 건너와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定着)해 살았다. 그 후 경문왕(景文王) 때 와서 갑신란(甲申亂)이 일어나자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安자로 (賜姓)하였다. 맏이 지춘( 枝春)은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命)되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둘째 엽춘(葉春)은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으며, 세째 화춘(花春)은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순흥안씨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어 현재 순흥안씨대종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역사인물에 대한 신상정보를 종합적으로 연구 관리하고 있는 국가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http://people.aks.ac.kr)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시조가 추밀공(樞密公) 영유(永儒), 별장공(別將公) 영린(永麟), 교서공(校書公) 영화(永和) 3형제를 두었다. 추밀공은 송 나라 가태 신유년에 출생하였으며, 바로 문성공 회선선생의 조부로서, 추밀원부사 상호군에 추봉되었다. 부인에 대하여는 실전하여 알 수 없다. 다만, 구보 기록에, "경주박씨 족보에서 계림군 박순(朴純)의 사위에 안영유(安永儒)가 등재되어 있으나 이는 우리 족보에 전해오지 않는 것이어서 참고로 기록해 둘 뿐이다." 하였다.

 

 묘소는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甘谷里) 지장산(智藏山)에 있다. 후손 판서 상(王常)이 영천군수(榮川郡守=지금의 영주)로 부임하였을 때 재실 영모암(永慕庵)을 창건하고 위토를 마련하여 매년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제사를 지내왔다. 근래에 후손들이 묘소를 정비하고 '영모암관리위원회(永慕庵管理委員會)'를 설치하고 음력 10월 1일 순흥 추원단 제사를 올린 뒤, 오후 2시에 제사를 올린다. 슬하에 태사공 부(孚)를 두었다.

태사공 부(孚=가정 경진생)는 고려 신종 갑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태사문하시중(太史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로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 우성윤(禹成允)의 따님이다. 묘소는 순흥에 있다고 전해지나 표석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다. 시조공과 함께 추원단에 제단을 조성하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슬하에 문성공 유(裕)를 두었다.


문성공은 휘는 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추밀공 영유(永儒)의 손자로서 송 가우 계묘년에 출생하였다. 1260년(원종 1)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忠烈王)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儒學)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安子廟)가 있어 음력 9월 12일에 기신제를 올리며, 음력 10월 4일 금촌 야동(冶洞)에 있는 현손 판서공[휘 종약(從約)]의 재사(齋舍)에서 망제(望祭)를 올린다.
출처: http://www.shahn.co.kr/history/index.asp

 

 

順興安氏 순흥안씨 가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문성공(文成公)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후예(後隸)로, 고려때에 신학문인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들여와 전파하고 계승 발전시킨 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순흥사람 안향(선수 유학제거 도첨의중찬 宣授儒學提擧都僉議中贊)이 귀하게 이름을 떨쳤고, 그의 윗대가 대대로 순흥현(順興縣 경북 영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순흥(順興)’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아버지 부(孚)는 고려 의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수태사문하시중(太師文下侍中)에 추봉(追封) 되었고, 할아버지 영유(永儒)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봉 되었고, 증조 자미(子美)는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 되었으니 이는 모두 문성공 안향(安珦)의 현달(顯達)에 따름이다.

 

  시조(子美) 이전에도 선대(先代)가 있었을 터이지만, 맨 처음 족보인 '순흥안씨족보 병오보'(丙午 1546년) 서문에 밝힌 바 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선조(先祖 子美)이상은 가승(家承)이 전(傳)하지 못하여 다 기록하지 못하니 이것은 내가 두고두고 비통(悲痛)하게생각하는 것이다.’ 라고. 그러므로 순흥안씨 문중에서는 병오보를 주관한 안위(文簡公 安瑋) 선조의 기록 외에 어떤 기록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순흥안씨는 크게 세 갈래로 구분된다. 시조(始祖 子美)의 큰아들 영유(永儒)의 후손 곧 ‘문성공(安珦)자손’을 흥주인(興州人) 또는 일파(추밀원부사공파)라고 한다. 영유가 부(孚)를 낳았고, 부가 문성공 향(珦)을 낳았는데 사문(斯文)을 당신의 임무로 삼았으며 말년에는 항상 회암(晦암)의 화상(畵像)을 걸어놓고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고는 스스로 회헌(晦軒)이라 호(號)를 지었다. 고려 충숙왕 6년(1319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문성공 아래로 아들 문순공(文順公) 우기(于器), 손자 문숙공(文淑公) 목(牧), 증손 문혜공(文惠公) 원숭(元崇) 등 사 대(四代)가 문과(文科)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대제학)을 지냈다. 원숭의 아들 삼 형제 곧 경질공(景質公) 원(瑗) · 조동(祖同) · 수(垂)도 문과 급제하여, 원은 고려와 조선조에서 형조전서 · 한성판윤 · 대사헌 · 개성유수 등을 지냈다.

 

  원의 아들 종약(從約)은 문과 급제하여 이조참의 등을 지냈고 맏아들 구(玖 대제학)와 손자 지귀(知歸 대사성) 증손 호(湖 판서) · 침(琛 판서) 그리고 현손 처선(處善)과 사위 성염조(成念祖 판서)와 외손(임任 판서, 간侃 판서, 현俔 좌의정) 외증손 성세창(成世昌 좌의정) 등의 문과 급제와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영달(榮達)로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둘째아들 영린(永麟)은 정준(貞俊)을 낳았고, 정준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철(成哲)을 낳았고, 그의 후손을 순정안씨(順政安氏) 또는 2파(별장공파 또는 검교공파)라 한다. 성철이 세 아들을 낳았으니 장자(長子)는 수견(守堅)이고 차자(次子)는 자겸(自謙)과 문개(文凱)이다.

 

  또 다른 한 갈래는 문성공의 족자(族子)인 석(碩)으로 아버지는 희서(希諝)이고 할아버지가 득재(得財)다. 급제공 석(碩)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은둔하며 벼슬하지 않았고, 아들 삼 형제 곧 축(軸) · 보(輔) · 집(輯)은 모두 고려 문과에 급제하였다. 특히 축(軸)은 바로 '근재(謹齋)선생'으로 아우 보(輔)와 함께 원나라 제과에도 급제하였다.

 

후손들이 조선 건국에 큰 공이 있었고 크게 이름을 떨쳤다. 석(碩)의 후손을 흥령인(興寧人) 또는 죽계안씨(竹溪安氏)라고 하였다. 순흥안씨3파는 교서공파 또는 급제공파라고도 한다. 이로써 마침내 크게 세 갈래로 나눠진 순흥안씨 계보(系譜)는 최초의 족보인 병오(丙午 1546년)보 이래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문성공(安珦)과 근재(安軸)선생의 도덕과 문장이 당시에 으뜸이 되어 후세에 모범을 남겼고, 검교공(安成哲)은 아들이 많은 복(福)을 누렸다. 이 어찌 선조께서 선(善)을 많이 쌓은 경사(慶事)로써 뿌리가 깊고 근원(根源)이 먼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그 자손(子孫)들이 번성(繁成)하여 시서(詩書)의 유택(遺澤)이 더욱 오래도록 전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조선(朝鮮)조에는 자손들이 의관(衣冠)을 하고 관복(官服)을 입은 자가 조정(朝廷)에 가득하였고 후손(後孫)의 경사가 더욱 두터우며, 외손(外孫)들이 융성(隆盛)하여 위로는 소헌왕후(昭憲王后)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왕비(王妃)를 탄생(誕生)하여 중전(中殿)에서 지위(地位)를 잡아 조선에 억만세(億萬世) 무궁(無窮)한 복(福)을 펴게 했으니, 이는 고금(古今)과 천하(天下)에 보기 드문 이름난 가문(家門)이 되었다.

 

[1파]문성공(安 珦)자손 [9갈래] 판서공파(참찬공파, 찬성공파, 직장공파, 서파공파),
감찰공파, 첨추공파, 도정공파, 참판공파, 참의공파, 양공공파, 한림공파, 판관공파.
[2파]검교공(安成哲)자손[4갈래] 안원군파, 충정공파, 의랑공파, 소의공파
[3파]급제공(安 碩)자손 [4갈래] 문정공파, 좨주공파, 중랑장파, 검교공파
[출처] 순흥안씨(順興安氏) 탄생과 역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순흥안씨 판서공파종중) |작성자 오원

 

관향 순흥: http://www.shahn.co.kr/history/gwonhang.asp
순흥의 문화와 역사: http://www.shahn.co.kr/history/cult.asp
순흥안씨 파조의 역사: http://www.shahn.co.kr/part/prt1.asp
시호선조(諡號先祖): http://www.shahn.co.kr/people/mn1.asp
봉군선조((封君先祖): http://www.shahn.co.kr/people/mn2.asp
대제학선조(大提學先祖): http://www.shahn.co.kr/people/mn3.asp
유적,유물: http://www.shahn.co.kr/mhn/index.asp

 

 

 

1世 시조-안자미(安子美)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추봉(追封) 신호위상호군 (神虎衛上護軍)

약력(略歷) :고려신종조때 흥위위 보승별장을 역임하고 신호위상호군에 추봉되었다.

배위의 성씨는 실전 되었다. 묘소는 순흥의 소백산 아래에 있다고 전해 오는데 표식이 없어 찾지 못하였다.

후손인 순원군 응창(應昌)이 의성현감으로 있으면서 순흥의 평리촌 유적지에 제단을 쌓고 제전을 마련하여 매년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올린다.

후손 기명(基命)이 만든 갑신파보에 진위(振威)에 사는 종인의 보첩에 의거하여 이르기를 공의 묘소는 순흥부 동쪽 영마암에 있으며 배위(配位)는 압해정씨(押海丁氏)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다 하였으니 이는 전보(前譜)에 실려있지 않은것이며 이제 영천 정원욱(丁元旭)의 집안 구보(舊譜)를 보니 진현관 대제학 문하시중을 지낸 경(瓊)과 그의 아들 옥당박사 문하시중 평장사 윤화(允樺)와 그의 아들 문하시중 평장사 태보내사령 혁황(奕煌)이 있고 그의 사이에 안자미(安子美) 가 기록되어 있으며 외손(外孫)의 난에 추밀공(樞密公) 태사공(太師公) 문성공(文成公)의 함자가 연이어 써 있었다. 그러나 신중히 하는 도리에 곧바로 쓸수가 없음으로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응창(應昌)이 사단기(祀壇紀)를 찬(撰) 하였다.

무오년(戊午年)에 후손 종욱(宗昱) 상봉(相鳳) 교덕(校悳)이 사단비를 세우고 추원재(追遠 齋)를 이건 하였으며 권상익(權相翊)과 이상영(李商永)이 재기(齋記)를 찬(撰) 하고 후손 종욱(宗昱)이 중수단기를 찬(撰) 하였는바 총록에 쓰여있다

他譜稱公石高麗神宗祖興威衛保勝別將追封神虎衛上護軍 配姓氏失傳墓順興小白山下云而無表未尋後孫順原君應昌帝義城築祀壇於順興坪里村遺跡置祭田 每十月朔日報祀後孫基命甲申派譜據振威宗人家牒云公墓在順興府東永磨巖配押海鄭氏樞密副使光瑞女此前譜所不載而今見永川鄭元旭家舊譜則進賢館大提學門下侍中瓊子玉堂博學士門下侍中平章事允樺子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奕煌女安子美外孫欄連書樞密公太師公文成公諱刻然基在愼重佛可直書故玆錄之應昌撰壇記歲戊午後孫宗昱相鳳校悳堅壇碑移建追遠齋晴山權相翊滄上李商永撰제齋記後孫宗昱撰重修壇記見總錄

 

인적사항

배위(配位) 부모(父母) 형제(兄弟) :실전됨

자녀(子女) : 영유(永儒)[1] 영린(永麟)[2] 영화(永和)[3]

세거지(世居地) : 순흥

묘소(墓所) ;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비봉산

시제(時祭) : 음력 10월 1일

관련자료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 신종(神宗)때 흥위위(興威衛)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된 사실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확실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 녀(光瑞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보존한 구보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 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해둔다. 는 뜻을 족보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안자미(安子美)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墓)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확실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墓)는 순흥부 동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우리집은 9대까지 1파 추밀공파 직손으로 내려 온다.

9세에서 파가 갈라지며 판서공파가 되었다가 10세에서 다시 찬성공파로 분파된다.

 

 

 1派(추밀공파樞密公派)2世- 안영유(安永儒) *길영,선비유

 

추봉(追封)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上護軍)

할버님은 시조 상호군 공의 장남이시다. 1201년 즉 고려  20대 신종4년 신유(辛酉)생 이시다.
고려23대 고종때 추밀원부사(정3품),상호군(정3품)을 각각 추봉(追封)받으셨다


1233년 33세에 별세하시고 묘(墓)는 순흥 동북간 약6k지점인
부석면 감곡리(浮石面 甘谷里=구道講里)지장산(智藏山)서록(西麓)신좌을향지원(辛坐乙向 之原)이시다.

 

세전(世傳)하는바에 의하면 이 묘소(墓所)는 상주(喪主)인 아드님 안부(安孚)-태사공(太師公)孚)이
14세때(1233년)부친상을 당하자 상중에 유명한 지관(地官=풍수)에게 위촉해서 얻은 길지(吉地)즉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1588년 즉 명종13년에 당시 영천군수로 재임중인 후손 판결사(判決事)안상(安瑺-14世)이
성묘(省墓)하고 묘역(墓域)을 돌아보니 타인의 투장(偸葬) 흔적(痕迹)이 발견되고 묘봉(墓封)도
많이허물어진 상태이므로타장(他葬)을 일체 파묘(破墓) 제거(除去)하고
개사초(改莎草)한 후 묘비급상석(墓碑及床石)등 의물(儀物)도 다시 만들어세웠다.

그리고 그 형(兄)인 당시 병조판서(兵曹判書)안위(安瑋)가 비명(碑銘)을 찬(撰)하여
각명(刻銘)수비(竪碑)하였으며 묘하에 재실을 건립(建立)하여 영모암(永慕庵)이라
명명하고 제전(祭田)도 마련해서 제사를 올렸다.


그후 매년 음3월과 10월 상정일(上丁日)에 세향을 올려오다가 해방후 종의에 따라서
매년 음10월 2일로 다시 정해서 봉향한다.

또한 재실을 마련한 후로는 수호군(守護軍)즉 요즘의 산지기를 상주시켜 산소를 엄중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후 1648년 인조때 후손 순원군(順原君)안응창(安應唱)이 묘지(墓誌)를 만들어서
묘 광남(壙南)에 묻어놓았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 족보(慶州朴氏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돼 있다.


따라서 부인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부(父)
안자미(安子美)
1世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아들 자 , 아름다울 미*
시조(始祖께서는 12세기말 고려(高麗)때 경북순흥(慶北順興=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셨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 을 지내시고 후에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고 또 양위분의 묘(墓)도 실전이 되었는바
묘는 본시 순흥 소백산 하(小白山 下)에 모셨는데 묘(墓)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즉
1824년 간행된 순흥안씨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되어 당시 종중에서
학살한 고증을 얻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휘 子美)의 묘(墓)는 순흥부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女)”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이 없고
당시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여(女)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

 

배(配)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慶州朴氏) 족보(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 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 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 돼 있다. 따라서 부인(夫人)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確認)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族譜)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자(子)
안부(安孚)
할아버님은 1220년 즉 고려(高麗)23대 고종(高宗) 7년 경진생(庚辰生)이시다.
소시(少時)에 호문조학(好文早學)하여 약관(弱冠)에 흥주(興州)의 주리(州吏)를 지내시다가 한때 의업(醫業)에 종사하셨다. 
1244년 고종 갑진(甲辰)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정의대부(正義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시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 치사(致仕)하셨다. 
후에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봉(追封)받으셨다.
부인(副因)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剛州=현 영주) 우씨(禹氏)이시다. 
당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신 우성윤(禹成允)공의 따님이시다.

 

 

 

1派(추밀공파樞密公派)3世 안부(安孚) 安孚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

약력(略歷) : (1220 ~

 

고려 고종(高宗) 경진년(1220)에 출생 하였으며 고종 갑진년(1244)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의대부 밀직부사(正議大夫密直副使)를 지내고 판도판서(版圖判書)로 치사(致仕) 하였으며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門下侍中)에 추봉 되었다.

 

조선 순조(純祖) 임오년(1822)에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제향 되었다.

배위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로 부친은 예빈시 동정(禮賓寺同正) 우성윤(禹成允)이고 조고는 우효손(禹孝孫)이며 증조는 생원(生員) 우부(禹傅)이다.

 

묘소는 순흥에 있다하나 표지가 없어 찾지 못하였다.

 

매년 10월 초하루에 순흥의 평리촌(平里村)에 있는 호군공(護軍公)의 사단(祀壇)에 제향한다.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만랑(漫浪) 황호(黃호)가 祀壇紀(祀壇記)를 찬하였으며

후손인 진사(進士) 몽백(夢伯)이 유사(遺事)를 찬하였는바 총록에 보인다.

 

인적사항

배위(配位) : 순정군부인강주우씨 ( 順政郡夫人剛州禹氏 )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剛州=현 영주) 우씨(禹氏)이시다.

당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신 우성윤(禹成允)공의 따님.

부모(父母) : 영유 (永儒) [1]

형제(兄弟) : 형제없음

자녀(子女) : 향 (珦) [1]

파(派) : 추밀공파 (樞密公:永儒:1派)

세거지(世居地) : 순흥

묘소(墓所) ; 순흥의 평리촌(平里村)

시제 : 음력 10월 1일

 

이력(履歷)

이름(휘諱) 전력관직 등과기록(登科) 부(父)-파(派)세(世)

안부(安孚) 密直副使版圖判書致仕 追封守太師門下侍中

[고려문과]고종高宗53년1244갑진甲辰고종33년갑진방高宗五十三年甲辰榜-父-안영유(安永儒)-1派 3世

 

안부(安孚)

고려 고종(高宗) 경진년(1220)에 출생 하였으며 고종 갑진년(1244)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의대부 밀직부사(正議大夫密直副使)를 지내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르 치사(致仕) 하였으며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文下侍中)에 추봉 되었다.

조선조 순조(純朝) 임오년(1822)에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제향 되었다.

안부(安孚) 순흥인

 

3 世-안부(安孚) *믿을 부*

할아버님은 1220년 즉 고려(高麗)23대 고종(高宗) 7년 경진생(庚辰生)이시다.

소시(少時)에 호문조학(好文早學)하여 약관(弱冠)에 흥주(興州)의 주리(州吏)를 지내시다가 한때 의업(醫業)에 종사하셨다.

1244년 고종 갑진(甲辰)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셔서 정의대부(正義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시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歷任) 치사(致仕)하셨다.

 

후에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봉(追封)받으셨다.

부인은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剛州=현 영주) 우씨(禹氏)이시다.

당시 예빈시동정(禮賓寺同正)을 지내신 우성윤(禹成允)공의 따님이시다.

또한 1822년 순조임오(純祖壬午)에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봉향(奉享)하였다.

슬하에 아드님 향(珦 = 문성공) 한분을 두셨다.

 

묘(墓)양위분 모두 실전(失傳)되었는 바 후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唱)이

순흥 추원단(향려단) 시조사단 옆에 사단을 만들어 배향(配享)하고

매년 음10월 1일 세사(歲祀)를 올린다.

 

려말(麗末)의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안향(安珦)의 부(父) 안부(安孚)도 향사(鄕使)로서 의과(醫科)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왕족(王族)인 왕목(王沔)은 의종(毅宗)의 부마(駙馬)였는 바 그의 종숙(從叔) 안평백(安平伯) 경(璥)과 함께 의술(醫術)에 정통(精通)하였고, 검교정승(檢校政丞) 허평(許評)의 아들인 종(悰)은 충선왕(忠宣王)의 부마(駙馬)였는데 의술(醫術)로써 환자 고치기를 업(業)으로 하였다.

 

안향(安珦)의 아버지인 안부(安孚)는 고종대에 활동하던 사람으로 주리(州吏)였는데 의업(醫業)으로 출신(出身)하여 정3품인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高麗史 卷105 列傳18 安珦)

 

부(父)

안영유(安永儒)

2世-안영유(安永儒) *길영 , 선비유*

할버님은 시조(始祖) 상호군 공(公)의 장남(長男)이시다. 1201년 즉 고려(高麗) 20대 신종 4년 신유(辛酉)생 이시다.

고려(高麗) 23대 고종(高宗)때 추밀원부사(정3품), 상호군(정3품)을 각각 추봉(追封)받으셨다.

1233년 33세에 별세(別世)하시고

묘(墓)는 순흥 동북간 약 6k 지점인 부석면 감곡리(浮石面 甘谷里 = 구 道講里) 지장산(智藏山) 서록(西麓) 신좌(辛坐) 을향 지원(乙向 之原)이시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모(母)

부인(夫人)은 실전(失傳)되었는 바 경주박씨(慶州朴氏) 족보(族譜)를 보면

*대아손 문충공(大阿飡 文忠公) 인범(仁範)후손 ... 평장사 계림군(平章事 鷄林君) 충문공(忠文公) 박순(朴純)여(女) 안영유(安永儒)* 라고 입보(入譜) 돼 있다.

따라서 부인(夫人)은 경주박씨(慶州朴氏)이셨다는 사실(史實)은 확인(確認)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전보(前譜)에는 부재(不載)되었으므로 좀더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는 사유만을 우리 족보(族譜)에 주록(註錄)해서 전해 내려온다. 슬하에 아드님 부(孚) 한 분을 두셨다.

 

자(子)

안향(安珦)

晦軒 文成公(初諱: 裕) 회헌 문성공(처음의 이름: 유)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휘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이다.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이다. 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현의 칭호인 子(자)라 불리는 분은 오직 회헌(문성공) 선조 한 분 밖에 없다.

1306년 9월 12일(고려 충렬왕, 병오년 갑신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호(諡)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장지(葬地)를 장단의 대덕산에 내렸다.

조선 문종의 어휘(御諱)와 같은 이름(珦)이라서 유(裕)로 바꿔 부르다가 나중에 [향]으로 환원했다.

충숙왕 무오년(1318년), 문묘에 초상화를 봉안했다. (영정 : 국보제 111호) 충숙왕 기미년(1319년),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유상(儒像)은 여러본(本)이 있는데,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충주(忠州)의 도통(道統) 연기(燕岐)의 합강(合江)

진주(晋州)의 도통(道統) 순흥(順興)의 대룡산(大龍山) 송도(松都)의 한천(寒泉) 철원(鐵原)의 모성(慕聖) 장흥(長興)의 만수사(萬壽祠)

재령(載寧)의 문천(文泉) 백천(白川)의 송성영당(松城影堂) 시흥(始興)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나주(羅州)의 집성(集成)

곡성(谷城)의 도동(道東) 중국 공자(孔子)의 사당 등에 봉안되었다.

 

 

 

1派(추밀공파樞密公派)4世 안향(安珦)

 

안향(安珦 ; 1243~1306)의 초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郞)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겸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 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이진(李?)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년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소수서원에 배향된 안향,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는 소수서원 (紹修書院)이 있다. 출발은 백운동서원이었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 이 고려 유학자 안향 (安珦, 1243~1306)의 사묘(祠廟)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풍기군 학사(學舍)를 그곳으로 옮겼다. 안향의 본관지 순흥에서 안향을 기리고자 한 것. 이로써 백운동서원이 이룩되었다. (순흥부는 1457년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사당한 뒤 폐지되어 풍기군에 합쳐짐)

 

명종 5년(1550년) 퇴계 이황 이 풍기군수로 부임했다. 명종 에게 친필 편액 을 내려 받고 서책과 전답을 지원받으며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소수’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다. 이 ‘소수’라는 말에 안향의 업적과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 소수서원에는 1318년 충숙왕 이 원나라 화공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국보 111호 안향 초상화가 있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원나라 화공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 고려사 ] 열전은 안향을 이렇게 평한다.

 

‘사람됨이 장중하고 조용하면서 착실하여 많은 이들이 존경했다. 계획을 잘 세우고 판단력도 뛰어나 동료들이 그를 순순히 따랐다. 늘 인재 양성과 학문 부흥을 자신의 중대한 임무로 여겼다. 손님 대접을 좋아하고 남에게 자기 것을 내어주기를 좋아했다. 문장은 맑으면서도 힘이 있었고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에 서다

1289년 11월 안향은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방문했다. 주자(朱子)의 저서를 필사하고 공자의 초상을 모사하여 1290년(충렬왕 16년) 봄에 귀국했다. 이에 따라 1290년을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안향의 유고문집 [회헌실기](晦軒實記)에는 ‘유국자제생문’(諭國子諸生文)’이 실려 있다. 국학 생도들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하는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단, [회헌실기]의 사료적 가치와 ‘유국자제생문’의 진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회암(朱晦菴, 주자)의 저술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불교를 배척하는 공이 공자에 짝할 만하였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면 회암을 배우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다. 학생들은 새로 들어온 (주자의) 서적을 읽기에 힘써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만년에는 항상 회암 선생(주자)의 진영(眞影)을 걸어놓고 경모하여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였다.’[고려사] 열전 ‘안향’

 

물론 어느 한 년도를 딱 집어서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이라 말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물건도 아닌 사상의 수용이 정확한 시작점을 지닌다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사실 1290년과 안향 이전에도 기초적이나마 고려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에 관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1298년부터 연경에 10년 간 머무르며 성리학을 공부한 뒤 서적을 갖고 귀국한 백이정(白頤正)의 역할도 중요했다. 백이정은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자면 안향, 백이정, 권보, 우탁, 이제현 등으로 이어지는 13세기말~14세기 중반이 성리학 초기 수용기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년)에는 성리학의 핵심 텍스트인 사서(四書)가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초기 성리학의 맥은 다시 이곡, 이색 부자(父子)와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안향은 이러한 흐름의 선구자였다. 백이정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에는 그가 권보, 우탁 등과 함께 안향 문하에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제현(1287~1367)은 안향을 그 시대 유학의 으뜸이자 대표 격이라 언급했다. 안향은 이미 자신의 시대에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

 

교육과 학문 진흥을 위한 안향의 뜻과 노력

‘재상의 임무 가운데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양현고가 비어 인재를 기를 길이 없다. 육품 이상은 은 한 근씩을 내고, 칠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포(布)를 내게 하자. 그 늘어나는 이식(利息)으로 섬학전(贍學錢, 교육기금)을 조성하자.’[고려사] 열전 ‘안향’

 

1304년(충렬왕 30년) 안향은 재부(宰府)와 중추원에 위와 같이 건의했다. 이를 보고받은 왕은 왕실 재산과 곡식을 내어 도왔다. 양현고는 1119년(예종 14) 관학(官學) 진흥을 위해 설치한 장학재단이다. 그러나 양현고를 확충하려는 안향의 뜻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대신 고세(高世)는 자신이 무인(武人)이라는 이유를 들며 반발했다. 재산을 내야 하는 일에 모든 대신들이 흔쾌히 동참했을 법하지 않다. 이에 안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만세의 규범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무인인 내가 무엇하러 돈을 내어 문인 생도들을 가르치는 데 보태느냐’ 한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가당한 일인가?’

 

결국 고세도 안향의 말을 듣고 기금 조성에 참여했다. 안향은 기금 일부를 박사(博士) 김문정에게 주어 중국 강남 지방으로 보냈다. 그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 72현의 상(像)을 그려오고, 제기와 악기, 경서와 역사서, 그 밖의 사상서까지 구해오게 했다. 안향이 섬학전 조성을 추진한 1304년에 공자를 기리며 모시는 대성전(大成殿)이 개경 국학에 새로 건립됐다. 안향은 교육과 학문의 인프라 구축에 노력함으로써 소수서원의 ‘소수’, 즉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안향이 이해한 유교와 성리학, 일상생활에서의 윤리 실천

안향은 주자를 경모하고 성리학을 유교의 정통으로 깊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리학에 관해 그가 쓴 별도의 논저나 글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성리학을 어떤 것으로 이해했을까? 추정해볼 수는 있다. 첫 번째 단서는 ‘유국자제생문’의 다음 대목이다.

 

‘성인(聖人)의 도는 다만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뿐이다. 자식이 효도하고 신하가 충성하고, 예로 집안을 다스리고 신의로 벗을 사귀고, 자기 자신을 경(敬)으로 닦고, 모든 일을 반드시 정성으로 할 따름이다.’

일상생활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 이것은 유교의 핵심이자 주자가 특히 [소학](小學)에서 강조한 사항이다. 안향이 주안점을 둔 것은 인간 심성(心性)이나 이기(理氣), 태극(太極)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의 구체적인 도덕 실천이었다. 이는 당시 원나라 유교의 대세였던 허노재(許魯齋, 1209~1281), 즉 허형(許衡)의 학문 세계가 지닌 특징이기도 했다.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접한 안향이 허형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불교는 어떠한가.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 윤리를 파괴하니 이적(夷狄)의 무리와도 같다. 근래 병과(兵戈)에 시달린 나머지 학교가 피폐해지고 선비는 학문을 모르니, 배운다는 게 고작 불서(佛書)나 즐겨 읽고 그 허무공적(虛無空寂)한 뜻을 따르니 가슴 아프기 짝이 없다.’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안향의 초상화, 고려 중기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을 모사한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역시 ‘유국자제생문’의 한 대목이다. 안향 이전의 고려 유학자 대다수는 불교를 강하게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고려는 엄연한 불교국가가 아니던가. 유교야말로 인간이 따라야 할 사실상 유일하게 올바른 가르침이며, 그 밖의 것들은 헛된 학문(虛學)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유교 정통주의. 이는 성리학의 큰 특징이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안향을 한국 성리학 역사의 첫머리에 놓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재상인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직을 끝으로 은퇴한 안향이 1306년 세상을 떠났을 때, 국학과 사학 12도의 생도들이 소복을 입고 길에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의 특징

 

안향을 비롯한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 대부분은 과거 급제자들이었다.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학문 실력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귀족 세도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무신정권 붕괴(1270) 이후 새로이 떠오르는 가문 출신이었다. 본관도 대부분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남(三南)에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가 많은 가운데 대지주도 있었다.

 

안향의 아버지 안부(安孚)는 오늘날 경북 영주시에 속한 순흥 지역의 아전이었다. 안부는 잡과에 해당하는 의업(醫業)에 급제하여 중앙 관계에 진출했다. 그 전까지는 중앙 관계에 진출한 적이 없는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고려 말 신진사대부라 일컫는 세력과 매우 비슷하다. 음서(蔭敍)와 과거, 중앙 귀족세가와 지방 신흥가문, 대지주 계층과 중소지주 계층의 대비다.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 왕조 개창의 주도 세력인 신진사대부와 연속성을 지닌다.

 

세도가문의 권력 남용, 관리의 부정부패, 토지 겸병(兼倂)과 양민 수탈, 조세 문란. 당시의 고려 사회는 무신정권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유학자들의 성리학 수용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토대를 찾으려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대부의 나라’이자 ‘성리학의 왕국’ 조선을 사상적으로 예비했던 것이다.

 

안향(安珦)1)의 처음 이름은 안유(安裕)이며 흥주(興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사람이다. 부친 안부(安孚)는 주리(州吏)로 의술(醫術)에 종사하다가 벼슬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까지 지내고 사직했다. 안향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원종 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교서랑(校書郞)에 보임되었다가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승진해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적에게 사로잡히자 평소 그의 명망을 듣고 있던 적이 그를 이용하려고 달래고 으르면서 군중에 “안한림(安翰林)을 놓아주는 자는 벌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안향이 계책을 써서 탈출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상을 주었다. 12년(1271)에 왕명을 받들고 서도(西道)로 가서는 청렴으로 이름났다. 이후 내시원(內侍院)으로 소환되자 내시원의 묵은 폐단을 글로 써서 보고해 없앴으며, 곧이어 감찰어사로 승진했다.

충렬왕 원년(1275)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는데, 당시 여자 무당 세 명이 요망한 귀신을 모셔놓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었다.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로부터 군(郡)과 현(縣)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허공에서 나오는 듯한 사람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어찌나 큰지 마치 갈도(喝道)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달려가 뒤질세라 제사를 지냈는데, 수령(守令)까지도 합세했다. 그들이 상주(尙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오자 안향이 곤장으로 때리고 칼을 씌우니 무당이 귀신의 계시라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상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안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무당이 용서를 빌기에 그제야 석방하니 그 요망한 사술이 사라지고 말았다.2)

 

안동(安東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 가서는 읍리(邑吏)를 시켜 자기의 발을 씻게 하자 그 읍리가 “나는 읍리인데 당신이 어째서 나를 욕보이는 거요?” 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아전들과 의논해 그를 타박하려 하자 어떤 늙은 아전이 안향의 풍모를 보고 나오더니,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이 분은 훗날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오를 터이니 쉽게 대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3년 뒤에 안렴사(按廉使)가 그의 행정이 청렴하다고 추켰으므로 내직으로 불러들여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승진시켰다. 또한 뚤루게[禿魯花]3)로 뽑혔으며 예에 따라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승진하고 우사의(右司議)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임명되었다. 이어 황제의 명령으로 정동행성 원외랑(員外郞)이 되었고 곧이어 낭중(郞中)에 올라 본국의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었다.4) 뒤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서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주둔군의 지휘관이 되자 군사들을 위무하고 백성들을 구휼하니 고을들이 그의 덕으로 편안해졌다. 이후 거듭 승진해 첨의참리(僉議叅理)가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叅知機務)·행동경유수(行東京留守)·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계림부윤(雞林府尹)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참리(叅理)가 되었다. 충렬왕이 복위한 후 충선왕이 원나라로 가게 되자 안향이 따라갔다. 어느 날 황제가 왕을 급히 부르자 왕이 영문을 몰라 겁에 질렸다. 승상(丞相)이 나와서, 따라온 신하 가운데 우두머리 되는 자가 들어와서 뵈오라고 전갈하므로 안향이 들어갔다. 승상이 황제의 말이라며, 고려왕이 공주를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안향은

 

“규방의 일은 밖에 있는 신하가 알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가지고 물으시니 어찌 만족하시도록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승상이 그대로 보고하자 황제는

“이 사람은 요점을 알고 있으니 어찌 먼 나라의 사람이라고 무시하겠는가?”

라 하고 다시 묻지 않았다.

 

충렬왕 26년(1300)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자 권력을 잡은 자가 그를 꺼리게 되었고 결국 왕에게 몰래 귀띔해 중찬(中贊)으로 올려준 후 나이를 이유로 사직하게 했다. 그러나 곧이어 찬성사로 복직했다. 안향은 교육기관이 나날이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양부(兩府)에 건의했다.

 

“재상의 직무 가운데 인재를 교육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없는데, 지금 양현고(養賢庫)5)가 텅텅 비어서 선비를 기를 수 없습니다. 6품 이상으로부터는 각각 은 한 근을, 7품 이하로부터는 베를 차등 있게 갹출한 다음 그것을 양현고로 보내어 기금은 그대로 두고 이자만 받아서 섬학전(贍學錢)6)으로 삼도록 해주십시오.”

양부가 이를 승인하고 보고하자 왕은 내고(內庫)의 돈과 곡식을 내어 기금의 조성을 도왔다. 밀직(密直) 고세(高世)7)가 자신은 무인(武人)이라 하여 출자를 꺼리자 안향이 재상들에게 말했다.

 

“공부자(孔夫子)의 도(道)가 천추만대의 헌장이 되었으니 신하가 왕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고 동생이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그런데도 ‘나는 무인인데 무엇 하러 괜스레 돈을 내어서 너희 문인들의 후진들을 기를 것인가?’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은 공자를 무시한 것이니 과연 옳은 태도이겠습니까?”

 

고세가 그 말을 듣자 크게 부끄러워하며 바로 돈을 내놓았다. 안향은 또 기금을 조성하고 남은 돈을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8)등에게 주어 중국으로 파견해 공자와 그 칠십 제자의 초상을 그려 오도록 하고 아울러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6경(六經) 및 제자서(諸子書)와 사서(史書) 등을 구해 오게 하였다. 또한 밀직부사로 벼슬을 마친 이산(李)과 전법판서 이진(李瑱)9)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10)로 삼았다. 그리하여 금내학관(禁內學館)11)·내시(內侍)·삼도감(三都監)12)·오고(五庫)의 관리 중에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칠관(七管)13)과 십이도(十二徒)14)의 생도들로서 경서(經書)를 가지고 수업을 받는 자가 거진 수백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유생들 가운데 어떤 자가 선배에게 예를 갖추지 않자 안향이 노해 벌을 주려고 하였다. 그 유생이 사죄하자 안향은,

또 이제현(李齊賢)과 이이(李異)는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해 함께 이름이 났는데, 안향이 불러서 시를 짓게 하고는 “이제현은 필시 귀한 신분이 되고 오래 살 것이나 이이는 오래 살지 못하겠다.”고 예언했는데 과연 들어맞았다.

만년

“내가 생도들을 내 아들과 손자처럼 대하는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이 늙은이의 마음을 깊이 새기지 않는가?”

고 훈계하고는 집으로 데리고 가 술자리를 열어주었다. 유생들이,

“공이 우리를 이처럼 정성껏 대하시는데 만약 그 감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사람이겠는가?”

고 반성했다. 충렬왕 32년(1306)에 다시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서 사직하고 죽으니 나이 예순 넷이었으며 시호를 문성(文成)이라고 하였다. 장사를 치를 때 칠관과 십이도의 유생들이 소복을 하고 노제를 지냈다.

안향은 성품이 장중하고도 자상하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공경했다. 상부(相府)에 재직 중에는 일을 잘 기획하고 단안을 잘 내려 동료들이 순순히 따르고 조심할 뿐 감히 다투지 못했다. 항상 학문을 진흥해 인재를 길러내는15)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도 한시도 그 일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또 손님 맞기를 좋아하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문장은 맑으면서도 굳세어 읽을 가치가 있었고 또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김이(金怡)와 백원항(白元恒)16)이 아직 출세하지 못했을 때 안향이 그들을 보고는 훗날 반드시 모두 벼슬이 높고 현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 이제현(李齊賢)과 이이(李異)는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해 함께 이름이 났는데, 안향이 불러서 시를 짓게 하고는 “이제현은 필시 귀한 신분이 되고 오래 살 것이나 이이는 오래 살지 못하겠다.”고 예언했는데 과연 들어맞았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선생(晦庵先生)17)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지극히 경모했으며 자신도 회헌(晦軒)이라 자호했다. 유금(儒琴) 하나를 장만해 두고는 선비 가운데 배울 만한 자를 만날 때마다 배우기를 권했다. 충숙왕 6년(1337)에 그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논의가 벌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안향의 건의에 따라 섬학전이 설치되긴 했으나 이것만으로 어찌 문묘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대했으나 그의 문생(門生) 신천(辛蕆)18)이 힘껏 주청해 마침내 그를 종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향 [安珦] (국역 고려사: 열전, 2006.11.20, 경인문화사)

 

 

1派(추밀공파樞密公派)5世 안우기(安于器) *어조사 우, 그릇 기

 

문순공(文順公) 문순(文順) = 勤學好問曰文 慈和徧服曰順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중기를 좋아함을 문(文), 자혜로워사람들이두루복종함을 순(順)이라한다.
봉호: 순평군(順平君)
 (1265년~1329년)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찬성사겸판전의시사(檢校僉議贊成事兼判典議寺事)
安于器文成公裕子字虗中號竹厓以廉幹稱忠宣甞不快於裕故于器有公望而無內援竟
罷職議者惜之官至賛成順平君忠肅己巳卒

할아버님 초휘(初諱)는 천(遷)이시고 자(字)가 허중(虛中)이시며 호(號)는 죽옥자(竹屋子),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선친이신 문성공의 위업(偉業)을 극계(克繼)하여 문아(文雅)로 현명(賢明)하셨다.
1265년 고려24대 원종6년 을축생(乙丑生)이시다.
1282년 충열왕 8년 약관18세의 홍안소년으로 문과에 등과하셨다.
그후 조정에 몸담아 국학제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사헌(大司憲),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檢校僉議),
찬성사겸판전의시사(贊成事兼判典儀寺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순평군(順平君)에 봉군(封君)되셨다.
1329년 즉 충숙왕16년 기사(己巳) 9월 12일 향수(享壽) 6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묘는 선고 문성공조(文成公兆) 우측 제1록 자좌지원(子坐之原)이다.
1822년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봉향되셨다.

부인은 철원군군부인(鐵原郡君夫人) 최씨(崔氏)이시고 그 선친이 당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신
최충약(崔沖若)공 이시다.
묘는 고조우록(考兆右麓) 임좌(壬坐)로 모셨다.
후부인은 이씨(李氏)이신데 생졸년(生卒年), 묘 등이 모두 실전되었으므로 공조(公兆)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세사는 매년 10월 1일인 바 해방후는 금촌 판서공묘역에서 망향제(望鄕祭)로 올린다.
슬하에 이남(장자 목(牧), 차자 신(愼))을 두셨다. 차자인 신(愼)은 후실 이씨 소생이다.
여기에서 차자이신 신(愼)할아버님 댁이 분파(分派)하셨는 바 이 할아버님께서
로부판관(鹵簿判官)을 지내셨으므로 판관공파(判官公派)라고 호칭한다.

 

 

1派(추밀공파樞密公派)6世-안목(安牧) *기를 목,(다스릴 목)-문숙공(文淑公)

 

시호(諡號) 문숙(文淑) = 勤學好問曰文道德純一曰淑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하고, 도덕(道德)이 순일(純一)함을 숙(淑)이라한다.
순흥군(順興君) 문숙공(文淑公)
정당문학(政堂文學)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藝文直提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목(牧)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25대 충열왕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 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신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 임오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하였다.
부인은 화평군부인(化平君夫人) 김씨 이시고
첨의중찬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
(僉議中贊修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判典理司事)
문정공(文正公)쾌헌(快軒)설암(雪庵)김태현(金台鉉)공과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의 따님이시다.
외조는 신호위 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이시다.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에 추봉(追封)되이시다.
묘는 선고(先考) 문순공조하(文順公兆下) 자좌(子坐)지원이며
부인묘는 동원(同原)이영(異塋)이시다.
슬하(膝下)에 원숭(元崇), (원형(元衡), 원린(元璘)2,3자는 근거 없음)
1녀(민유(閔愉)) 여흥인(麗興人 : 대제학(大提學))를 두셨다

차자인 원형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封君)되어 신죽산 안씨(新竹山 安氏)로 분관(分貫)했고
또 그 다음 원린은 강진군(康津君)으로 봉군을 받았으므로 탐진 안씨(耽津*舊康津*安氏)로 분관을 하였다.
그런데 이 차자 두분(원형, 원린)은 우리 족보(族譜=1546년에 창간(創刊)한 병오초보(丙午初譜)로부터
1980년 수보(修譜)한 14차 경신보(庚申譜)까지 역대족보를 보면 1918년 발간(發刊)한 12차 무오보(戊午譜)에
처음으로 입보가 되고 이어서 1936년 간행 13차 병자보(丙子譜)에도 입록되었지만
사실고증(史實考證)이 않됨으로 종의(宗儀)에 따라 불무가의(不無可疑), 관지가의(觀之可疑)라고 주기(註記)됐는데
경신보 당시 다시 거론 시비론쟁이 있었으나 다수 종원(宗員)의 정손(正孫) 인정 입보(入譜) 찬성으로 이를 시정 정보(正譜)처리 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안목(安牧) 자(字) 익지(益之),  호(號) 겸재(謙齋)
할아버님은 자(字)가 익지(益之)이시고 호(號)는 겸재(謙齋)이시다.
1290년 고려(高麗) 25대 충열왕 16년 경인(庚寅)생이시다.
1315년 충숙왕 2년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내시고
1348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등을 역임하셨다. 
1352년에는 밀직부사에 오르셔서 서연시독(書筵侍讀)의 중책까지 맡아 왕(王)을 보필(輔弼)하는데에 충성(忠誠)을 다하시고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등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신후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封君)되셨다.
만년(晩年)에는 파주(坡州) 서교(西郊)에서 상영소요(觴詠逍遙)하시고 시서(詩書)를 즐기시면서 여생(餘生)을 조용히 보내셨다. 1360년 경자(庚子) 5월 2일 향수(享壽) 7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문숙공(文淑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조(純祖) 임오(壬午)에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하였다.
세향은 선고위와 같이 망향제로 올린다.

문숙공(文淑公)휘 ) 6 世 (1파)
 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
 1290년 (충렬왕, 경인년)에 출생한 휘목(安牧)은 삼중대광 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을 지낸
문성공 휘향(向)의 손자이고,  광정대부 검교첨의 찬성사(檢校僉議 贊成事) 우기(于器)의 아들이다.
 자(字)는 익지(益之), 호(號)는 겸재(謙齋)이며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배위는 화평군부인 김씨(化平郡夫人 金氏)이며,
첨의중찬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딸이다.

 

 관직 및 업적
1315년(충숙왕)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1330년(충숙왕 원년) 대언(代言) 이군해(李君해) 등과 함께 인사권을 관장하였다.
1339년(충숙왕, 기묘년)에 장령(掌令)으로서 전주(銓注)를 관장하여 공신(功臣)의 관작을 하사받았다.
그뒤 밀직제학  밀직부사를 거쳐 1348년(충목왕 4)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1352년(공민왕 1) 서연시독관(書筵侍讀官)을 지냈다.통헌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通憲大夫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에 이르렀다. 정계에서 은퇴한 말년에는 파주(坡州)의 교외에서 시(詩)를
벗삼아 한가로운 여생을 보냈다.

 

제향
360년 5월 (공민왕 경자년)에 별세하니 71歲로 장수하셨다.
조정에서는 순흥군(順興君)에 추봉하고, 문숙(文淑)이란 시호를 내렸다.
1822년(순조, 임오년)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제향되었다.

 

묘(墓)
고조하 자좌(子坐) 지원이다.


부(父) 안우기(安于器)
5世  안우기(安于器) *어조사 우, 그릇 기
할아버님 초휘(初諱)는 천(遷)이시고 자(字)가 허중(虛中)이시며 호(號)는 죽옥자(竹屋子),
그리고 시호(諡號)는 문순공(文順公)이시다.
선친(先親)이신 문성공의 위업(偉業)을 극계(克繼)하여 문아(文雅)로 현명(賢明)하셨다.
1265년 고려(高麗) 24대 원종 6년 을축생(乙丑生)이시다.
1282년 충열왕 8년 약관 18세의 홍안소년으로 문과(文科)에 등과하셨다. 그후 조정(朝廷)에 몸담아 국학제주(國學祭酒),
우부승지(右副承旨),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사헌(大司憲),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檢校僉議),
찬성사겸판전의시사(贊成事兼判典儀寺事)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시고 순평군(順平君)에 봉군(封君)되셨다.
1329년 즉 충숙왕16년 기사(己巳) 9월 12일 향수(享壽) 6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봉향되셨다.

 

모(母)
정부인은 철원군군부인(鐵原郡君夫人) 최씨이시고 그 선친(先親)이 당시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신 최충약(崔沖若)공 이시다.
묘(墓)는 고조우록(考兆右麓) 임좌(壬坐)로 모셨다.
모(母)
후부인은 이씨(李氏)이신데 생졸년(生卒年)묘등이 모두 실전(失傳)되었으므로 공조(公兆)우측에
추설사단(追設祀壇)해서 모셨다.
세사는 매년 10월 1일인 바 해방후는 금촌 판서 공묘역에서 망향제(望鄕祭)로 올린다.

 

배(配)
부인은 화평군부인(化平君夫人) 김씨 이시고 첨의중찬(僉議中贊) 문정공(文正公)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선고(先考) 문순공조하(文順公兆下) 자좌(子坐)지원이며 부인묘는 동원(同原)이영(異塋)이시다.

 

자(子)안원숭(安元崇)
7世  안원숭(安元崇) *으뜸 원, 높을 숭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배(配)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이시고 당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신
원선지(元善之)공의 따님이시다.

 

 

1派(추밀공파樞密公派)7世 안원숭(安元崇)

 

순성군(順城君) 문혜공(文惠公)
시호(諡號) 문혜(文惠) = 勤學好問曰文 柔質慈民曰惠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함으로 문(文)이라 하며, 유순하고 질박하여 백성을 사랑함을 혜(惠)라 한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大提學)
安元崇牧子登文科官至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順成君謚文憲
 文惠, 順成君, 安元崇, 藝文館大提學, 政堂文學

안원숭(安元崇) 安靖 1309生 高麗忠惠王 文科
按廉使 進賢舘 政堂文學
문혜공(文惠公)
순성군(順城君)大提學
-順城君 文惠公 정당문학政堂文學 [고려문과]충혜왕忠惠王後2년1341신사辛巳충혜왕後2년신사방忠惠王後二年辛巳榜
-父-안목(安牧)-1派7世

약력(略歷) : 1309 ~
처음 휘는 정(靖)이다 고려조 층선왕(高麗朝忠宣王) 기유년(1309)출생
충혜왕(忠惠王) 신사년(1341)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번 관직을 제수받아 대언(代言)을 거쳐 판서(判書)로 있다가
전주(全州)로 부임 하였으며 얼마 안있다가 광정대부 정당문학대제학(匡靖大夫政堂文學大提學)을 제수받았다.
순성군(順城君)으로 봉하였고 시호는 문혜(文惠)라 하였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묻기를 좋아함으로 문(文)이라 하며 유순하고 질박하여 백성을 사랑함을 혜(惠)라 한다
순조 임오년(1822)에 순흥용연사(順興龍淵祠)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 (辰韓國大夫人原州元氏)이다 부친은 첨의평리 (僉議評理)를 지낸 선지(善之)이며 조부는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경(卿)이고 증조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문순공(文純公) 부(傳)이다 외조부는 첨의평리(僉議評理)을 지낸 문신공(文愼公) 언양(彦陽) 김변 (金변)이다.
묘는 문성공(文成公) 묘아래 자좌(子坐) 쌍분이다 후손 응창(應昌)이 묘지를 찬하고 참판(參判) 김학수(金鶴洙)가 묘갈(基葛)을 찬한바 총록에 보인다 세사는 1O월 초하루이다.
  사위 김사렴(金士廉)은 안동인(安東人)으로 우사간(右司諫)을지냈다 부친은 상락백 (上洛伯) 천(천)이다 아들 간(侃)은 안찰사(按察使)이고 위 는 정랑이며 제 는 부사이고 약 은 소윤(少尹)이며 식(湜)은 좌랑이다 사위는 목사 마희원(馬希遠)이다.
  사위 기윤(奇輪)은 행주인(幸州人)으로 우상시(右常侍)를 지내고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부친은 경왕(敬王)이다 아들은 오자(敖子)와 승지 전룡(田龍)이다.
  사위 성석린(成石璘)은 창녕인(昌寧人)으로 좌의정과 창녕부원군을 지내고 호가 독곡(獨谷)이며 시호가 문정공(文靖公)이다 부친은 시중(侍中) 여완(汝完)이다 아들에 발도(發道)는 좌참찬이고 지도(志道)는 참의이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인 조휴(趙休)와 고려 종실인 정강군(定剛君) 왕탄(王坦)이다.
  사위 김추(金錘)는 강릉인 (江陵人)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으며 부친은 명원군(溟源君) 광을(光Z)이다 아들에 이남(以南)은 사령(寺令)이며 윤남(允南)은 감무(監務) 이다 사위에 서환(徐換)은 부령(副令) 이고 유창(兪昶)은 판사(判事)이며 이양명(李陽明)은 사예(司藝)이고 효생(孝生) 은 호군(護軍)이다.사위 김수(金垂)는 좌랑이다.사위 유원지(柳元之)는 문화인(文花人)으로 판중추를 지냈으며 부친은 좌의정 만수(曼殊)이다.

  인적사항
    배위(配位) : 진한국대부인원주원씨 ( 辰韓國大夫人原州元氏 )
    부모(父母) : 목 (牧)
    자녀(子女) : 원 (瑗)
  파(派) : 추밀공파 ( 樞密公:永儒:1派 )
  세거지(世居地) : 순흥
  묘소(墓所) : 장단부 대덕산 구정리 문성공 묘아래 자좌 쌍분

안원숭(安元崇) 순흥인
초휘(初諱)가 정(靖)자 이시고 여조방목(麗朝榜目)에는 숭(崇) 또는 림(琳)자로 기록(記錄)돼 있기도 하다.
1309년 즉 고려(高麗) 20대 충선왕(忠宣王) 원년(元年) 기유생(己酉生)이시다.
1341년 신사(辛巳)에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셨다.
등과직후 대언유판서(代言由判書)로 루차 전주(全州)에 출진하셨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등 요직(要職)에 오르셔서
국사에 공헌(貢獻)하신 바 크며 순성군(順城君)에 봉군(封君)되셨다.
졸년(卒年)은 실전(失傳)이 되었고 문혜공(文惠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1822년 순흥 용연사에 봉향(奉享)되셨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문혜공 휘 원숭의 初諱(처음의 이름)는 정(靖)이다.
1309년(고려 충선왕1년,기유년)에 출생하였다. 문숙공 목(牧)의 아들이고, 문순공 우기(于器)의 손자이며,
회헌 문성공 향(向)의 증손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년,신사년)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언(代言)을 역임했다.
판서(判書)로 있다가 전주(全州)로 부임했었다. 전주에 나가 있을 때에는 학교(유교)의 육성발전에 크게 진흥했다.
그 후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을 제수 받았다.
순성군(順城君)이란 봉호를 받고 얼마 후에 병으로 별세했다. 묘소는 회헌선조의 묘소아래 자좌(子坐)이다.
세사(歲祀)는 음력 10월 초하루이다. 조정에서는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1822년(임오년,순조22)에 순흥의 용연사(順興 龍淵祠)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진한국대부인 원주원씨(辰韓國大夫人 原州元氏)이며, 첨의평리(僉議評理) 원선지(元善之)의 딸이다.
슬하에 9남매(3남 6녀)를 두었는 바 장남은 형조전서를 지낸 경질공 원(瑗)이며,
둘째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휘 조동(祖同: 양공공파조)이고,
셋째아들은 한림지제고(翰林知製誥)를 지낸 휘 수(垂: 한림공파조)이다.

장녀는 우사간(右司간) 김사렴(金士廉)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우상시(右常侍)를 지낸 덕양부원군(德陽府院君) 기전룡(奇田龍)에게 출가,
셋째딸은 창녕부원군 독곡 성석린(좌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에게,
다음은 전공판서(典工判書) 김추(金錘)에게 출가했고, 다섯째딸은 좌랑(佐郞) 김수(金垂)에게 출가했고,
막내딸은 판중추(判中樞) 유원지(柳元之: 좌의정 柳曼殊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문성공 묘하(墓下) 자좌(子坐)지원 쌍분(雙墳)으로 모셔있다.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주원씨(原州元氏)이시고
당시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신 원선지(元善之)공의 따님이시다.
묘(墓) 쌍분(雙墳)

자(子) 안원(安瑗),안조동(安祖同),안수(安垂)      6 녀(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