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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촉석루

무량청정1 2009. 2. 4. 11:53

 


촉석루,

 

종    목 문화재자료 
제8호 (진주시)
명     칭 촉석루(矗石樓)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83.07.20
소 재 지 경남 진주시  본성동 500-8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진주시
관 리 자 진주시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진주시 문화관광담당관실 055-749-2053
일반설명 | 전문설명
남강< 南江 >가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촉석루는 영남< 嶺南 >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한다. 고려< 高麗 > 공민왕< 恭愍王 > 14년(1365)에 창건하여 일곱 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던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장대< 南將臺 >로서 장원루< 壯元樓 >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진주의 노인들은 시원한 강바람이 더위를 식혀주는 이곳에 모여 시조를 읊고,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 싸움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리며 애국의 기상을 가꾼다. 6·25때 불탄 것을 시민들이 힘을 모아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1960년 5월에 옛모습을 되찾았다.

 

논개(論介)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의 싸움에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쳐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에서 패배한 왜군이 1593년 6월 12만여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온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성을 지키던 민,관,군 7만명이 끝까지 항쟁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촉석루 절벽아래의 의암바위로 유혹하여 그를 껴안고 강물에 투신한 의기이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투신할 때 팔이 풀어지지 않도록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전한다. 이 가락지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 교각상부에 논개 충절의 상징물로서 만들어져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자결한 여인들은 많았지만 논개와 같이 한목숨을 던져 먼저 간 성민들의 원수를 갚은 의로운 기개를 가진 장한 여인은 우리역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논개의 정신은 진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으며 진주정신으로 빛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http://www.jinju.go.kr/

 진주성 정문 촉석문

 진주성 정문 앞에서 본 진주 남강

 수주 변영로님위 논개시비

 

 진주성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촉석성()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때의 거열성지()였다고 하며,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내성의 둘레1.7km, 외성의 둘레 약 4km이다.

임진왜란 때는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때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기록에 보면 1605년(선조 38) 병사(使) 이수일()이 진()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 진주공원 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 주변 내성의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그뒤 병사 김태허()가 1607년 포루() 12개를 증축하였고, 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강에 띄워져 있는 배.... 뱃머리에 서 있는  남녀의 인형이 정담을 나누는듯 ... 이렁이는 바람에 하늘하늘 배가 움직인다.

 

 

 

 

 

 

 의기사 정문 지수문

 논개 영정

논개 영정, 국가표준영정 제19호로 지정

 

충남대 회화과 윤여환(55) 교수가 제작한 논개 영정(사진)이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됐다.

 

윤 교수는 지난 9일 “2년여의 산고 끝에 제작한 논개 영정이 지난해 12월 27일 문화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통과했으며 이달 4일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받았다”고 밝혔다.

 

윤 교수는 논개가 나고 자란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 등을 중심으로 신안 주씨( ) 문중 150여 명의 여성 얼굴을 분석해 모델을 찾아냈다. 그의 논개 영정은 지난해 경남 진주시와 전북 장수군이 공동으로 실시한 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윤 교수는 “‘넓고 네모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을 표현하는 조선시대 미용법을 따르고 복식()은 고전복식전문연구소에 의뢰해 과학적인 검증을 거쳤다”고 말했다.

 

또 의상문양은 당시 유행하던 문양인 연화만초문사(蓮花蔓草紋紗)인데 안동 김씨 묘(1560년대)와 변 수 묘에서 출토된 복식을 참조하여 제작됐다.

   영정의 논개는 "왜장을 유인해 열 손가락에 힘을 다해 껴안고 함께 강에 투신했다"는 내용의 여러 고문헌 기록들에 맞도록 손가락마다 옥가락지를 끼고 있으며 의기에 찬 표정으로 투신순국을 위해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향해 가려고 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영정은 조선시대 전통 영정기법으로 제작됐는데 비단(畵絹)이라는 독특한 재질을 살려내는 배채법(背彩法)과 육리문법(肉理紋法)등을 활용해 얼굴 표정에서 배어나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와 부드러운 질감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2006년 1월 경남 진주시와 전북 장수군은 논개의 고귀한 얼을 더 높이 선양하기 위해 논개 표준영정 제작작가를 전국에 현상 공모했으며 같은 해 7월 13일 윤 교수를 논개 표준영정 제작작가로 선정했다.

   윤 교수는 이후 논개 영정을 제작해 7차례의 엄격한 문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 심의를 통과, 표준영정으로 지정받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수차례 얼굴 형태와 의상을 수정했고 가체머리 모양도 13차례나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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