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安氏의 본관과 順興安氏

무량청정1 2022. 11. 3. 14:31

안씨(安氏)의 본관(本貫)에 대()하여

 

본관(本貫)은 문헌(文獻) 109본이 전()해지나 주요(主要) 본관(本貫)은 순흥(順興죽산(竹山광주(廣州강진(康津탐진(耽津신죽산(新竹山경주(慶州안동(安東수원(水原평안(平安순천(順川공산(公山태원(太原)  10여 본()이다. 이 가운데 순흥(順興죽산(竹山광주(廣州) 3본이 대본이며, 특히 순흥 안씨(順興 安氏)는 전체 안씨 인구의 과반수를 상회한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41본이 조사되었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시조(始祖)는 자미(子美)로 그는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냈으며 후()에 신호위상호군(神號衛上護軍)에 추봉된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는 자미(子美)의 세 아들 영유(永儒一派영린(永麟二派영화(永和三派)를 파조(派祖)로 하는 3파로 대별(大別)된다.

 

죽산 안씨(竹山 安氏)의 시조(始祖)는 당나라 출신(出身) 이원(李瑗)의 장남(長男) 안방준(安邦俊)이다. 이원은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때 건너와 정착(定着)했으며 그에게는 지춘(枝春엽춘(葉春화춘(花春)의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문왕(景文王) 때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安氏) 성을 하사(下賜) 받았으며 지춘은 방준으로 개명(改名)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광주 안씨(廣州 安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대장군 방걸(邦傑)로 그는 광주(廣州) 지방(地方)의 반란(叛亂)을 진압(鎭壓)한 공으로 대장군에 오르며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성씨(姓氏)를 갖게 된 유래(由來)는 당시(當時)에 성씨(姓氏)가 없었으나 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統一)한 후 지방(地方) 유력자(有力者)들에게 성씨(姓氏)를 갖게 하는 정책(政策)에 따라 안씨(安氏) 성을 갖게 되었다.

 

탐진 안씨(耽津 安氏)는 순흥 안씨(順興 安氏) 시조(始祖) 자미(子美) 6세손(世孫)인 목()의 셋째아들 원린(元璘)을 시조(始祖)로 하는데, 원린(元璘)의 아들 우()가 홍건적의 침략(侵略)을 막은 공으로 오성군(鰲城君오성은 탐진(耽津)의 옛이름)에 봉해진 뒤 탐진(耽津)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분관(分貫)하였다.

 

신 죽산 안씨(新 竹山 安氏) 역시(亦是) 안목(安牧)의 둘째아들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원형(元衡)을 시조로 하여 순흥 안씨(順興 安氏)에서 분관(分貫)하였다. 탐진안씨(耽津 安氏)와 신 죽산 안씨(新 竹山 安氏)는 각각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탐진군파와 죽성군파로 불리기도 한다.

 

안씨는 조선에서 총 227명의 문과 급제자, 상신 2, 문형(대제학) 1, 청백리 5명과 많은 공신을 배출했는데, 벼슬의 열력에서는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으뜸간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 1009가구에 인구 34 612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8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3 1850가구로 전국 가구구성비 1.3%,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18위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63 7786, 가구수 19 7668가구, 286성 중 제17위로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한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에 대()하여 

 

1. 순흥 안씨(順興 安氏) 시조(始祖) : 안자미(安子美)

2. 순흥 안씨(順興 安氏) 유래(由來) :

 

순흥 안씨(順興 安氏) 1170년 고려(高麗) 의종(毅宗) 24(경인 庚寅)에서 1180년 명종(明宗) 10(경자 庚子)사이에 경북 순흥(慶北順興 = 當時 順安縣)에서 탄생(誕生)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高麗) 신종(神宗) 때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 을 지내시고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귀현(貴顯)으로 인하여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을 추봉(追封) 받으셨다.

 

순흥 안씨(順興 安氏) 시조(始祖) ()는 본시(本時) 순흥(順興) 소백산하(小白山下)에 모셨는데 묘()의 표식물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後孫) 기명(基命)이 주관 발간(主管 發刊)한 갑신파보(甲申派譜) () 1824년 간행(刊行)된 순흥 안씨(順興 安氏) 3파댁 파보(波譜)를 보면 진위 종인(宗人)의 가첩(家牒)에 우리 시조(始祖)에 관하여 몇 가지 지적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을 알게 되어 당시(當時) 종중(宗中)에서 확실(確實)한 고증(考證)을 얻어 보려고 많은 노력(努力)을 하였다는 것이다.

 

시조( 子美)의 묘()는 순흥부(順興府) 동 영마암(東永磨巖)에 있고 부인(夫人)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추밀부사(樞密副使) 광서(光瑞)의 녀()” 운운(云云)이나 전보(前譜)에 기록(記錄)이 없고 당시(當時) 영천(永川) 정원욱(丁元旭)이 보존(保存)한 구보(舊譜)를 열람(閱覽)한 바 문하시중평장사태보내사령(門下侍中平章事太保內史令) 혁황(奕煌)-() 안자미(安子美)”로 등재 돼 있고 그 외손(外孫)난에 2세 추밀공(樞密公, 3세 태사공(太師公), 4세 문성공(文成公)의 휘자(諱 啣)이 연계 등재돼 있으나 신중한 일로써 직서불가(直書不可)하여 이에 응창 단기(應昌 壇記)를 기록(記錄)해둔다. 는 뜻을 족보(族譜) 기록(記錄)에 남겨두고 있다.

 

 

3. 순흥 안씨(順興 安氏) 시조(始祖) 이전(以前)의 역사(歷史)  

 

시조(始祖) ()의 이전(以前)에도 우리 선대(先代)가 계셨을 터인데 시조(始祖) 이래, 후손(後孫)들이 그곳 순흥(順興)에서 세거(世居)하였기에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처음으로 간행(刊行)된 족보(族譜)에는 시조(始祖) 이전(以前)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記錄)이 없다. 여기에 대()하여 이 족보(族譜)(병오보)의 서문에서는 기록(記錄)할 수 없었던 사유(事由)를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하고 있다. - 다만 한스러운 것은 시조(始祖) 이전(以前)의 가첩(家牒)이 전()해 내려 온 것이 없어서 기록(記錄)을 다하지 못하니 이런 점이 오늘날 한() 없이 슬프다. 지금 수보(修譜)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이렇게 한탄(恨歎)하고 게시다. 이로보아 당시(當時)의 그 선조(宣祖)님들의 심정(心情)을 이해(理解)할 수 있다.

 

이 족보(族譜)가 간행(刊行)된지 벌써 45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시조(始祖) 이전(以前)의 역사(歷史)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記錄)이나 유물(遺物)이 발견(發見)하지 못하니 결국(結局) 우리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시조(始祖) ()의 탄생(誕生) 연대(年代)로부터 지금까지 800년의 역사(歷史)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1파는 추밀공 종중 또는 추밀공파라 불리 우며(이는 문성공파)이라고 불리 우기도 한다. 충정공파라면 순흥 안씨 추밀공파(문성공파) 충정공파 라고 하면 된다.

 

2 : 추밀공

3세 : 태사공

4세 : 문성공

5세 : 문순공

6 :  문숙공

7 : 문혜공

8 : 경질공

9世 : 경질공 본부인 소생  안종약(安從約) 판서공(判書公) 판서공파로 분파,  

        후처 소생 9 : 감찰공파, 첨추공파, 도정공파, 참판공파, 참의공파

 

10 : 참찬공파, 찬성공파, 직장공파, 서파공파

    10세 玖(구) 參贊公派   璟(경)贊成公派  琇(수)直長公派  理(리) 西坡公派

 

그런데 시조(始祖) 휘 자미(子美)에게는 아들 3형제(兄弟)가 있어,

 

큰 아들 휘 영유(永儒)의 후손(後孫)들을 1파로,

둘째 아들 휘 영린(永麟)의 후손(後孫)들을 2파로,

셋째 아들 문정공파 휘 영화(永和)의 후손(後孫)들을 3파로 구분(區分)하였다.

 

시조(始祖) 상호군의 연대(年代)에 대하여 일부 문헌(文獻)에는 남송 순희(南宋淳熙) 9년 즉() 고려(高麗) 명종(明宗) 12(1182)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문중(門中)에 전()해 내려오는 족보(族譜)와 회헌실기(晦軒實記)에 근거(根據)할 수밖에 없다. 이것에 의하면 위에 말한 벼슬을 하고 추봉(追封)을 받은 일이 있고, 또 큰 아드님이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휘 영유(永儒)께서 신종(神宗) 4년 신유(辛酉)(1201)()으로 되어있다.

 3세 태사공(太師公) 휘 부()께서는 1220년에 3 5세 밀직제학공(密直提學公) () ()께서는 1260~1267년에 탄생(誕生)하신 것으로 추측되니 시조(始祖) ()께서는 의종 24(1170)부터 명종(明宗) 10(1180)사이에 탄생(誕生)하신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4. 순흥 안씨(順興 安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순흥(順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주시(榮州市)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이다. 본래(本來) 고구려(高句麗)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급산군(?山郡)으로 고쳤고, 940(고려 태조 23)에 흥주(興州)라 하였다가, 1018(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에 속()하였다가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되었다. 1172(명종 2)에 감무(監務)가 설치(設置)되었다. 그 후() 충렬왕(忠烈王)이 태()를 봉안(奉安)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昇格)되었으며, 충목왕(忠穆王)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順興府)로 승격(昇格)되었다. 1413(태종 13) 도호부(都護府)로 바뀌었다가, 1457(세조 3)에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역모(逆謀)를 꾀하였다고 하여 풍기(豊基), 영천(榮川)에 나누어 편입(編入)시켰다. 1683(숙종 9)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로 복구하였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안동부(安東府) 순흥군(順興郡)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慶尙北道)로 이관하였다. 1914년에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군()을 없애고 봉화(奉化)와 영주(榮州)에 각각(各各) 편입(編入)시켜 영주시(榮州市)에 속()한 순흥면(順興面)으로 남아 있다. 1980년 영주시(榮州市)가 생기면서 영풍군(영풍군)의 관할(管轄)이 되었다가, 1995년에 영풍군(영풍군)이 영주시(榮州市)에 통합(統合)되었다.

 

 

5. 순흥 안씨(順興 安氏) 시조(始祖)의 묘소(墓所)

 

묘소(墓所)는 순흥(順興)의 소백산 아래에 있다고 전()해오나 찾지 못하고, 순원군 응창공(應昌公)께서 1647년 평리촌에 시조공의 제단을 마련하고 향려단과 세연지비(洗硯地)등을 건립했다.

무오년에 후손(後孫) 종욱, 상봉, 교덕이 사단비를 세우고, 추원재(追遠齋)를 이건(移建)했음을 총록에 기록되어있다.

순흥(順興)의 시조(始祖)사단 이전중건사업은 1985년부터 시작했다.

전국(全國)의 종원 5.000여명이 성금(誠金)을 기탁(寄託)하여 순흥면 읍내리의 비봉산 43,000평을 종산(宗山)으로 매입하고 그곳에 시조단(始祖壇) 과 후손(後孫) 11(), 추원단비 등을 건립하고 성역화(聖域化)하였다.

- 시조(始祖)께서는 고려(高麗) 신종(神宗)때 군 수뇌부(軍首腦部)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현재 군장성급)을 지내시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현 군 고위장성급)을 추봉(追封) 받으신 존엄(尊嚴)한 어른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