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여행/담양

담양의 정자와 월봉산

무량청정1 2021. 5. 25. 19:57

2021.05.22

담양에는 10개의 정자가 있다 먼저 가사문학과 5개의 정자를 탐방했었고 오늘은 그 나마지 5개 정자를 탐방한다.

 

담양 수북면 관어정(觀魚亭)-고서면 명옥헌(鳴玉軒)-창평면 남극루(南極樓)-대덕면 연계정-창평면 상월정(上月亭)-월봉산(月峰山)산행 -연계정(漣溪亭)

월봉산 산행 지도 

제일 먼저 들른곳은 담양 수북면 나산마을회관 앞에 있는 관어정(觀魚亭)이다.

관어정(觀魚亭)- 지정별 : 담양군향토유형문화유산- 시대 : 조선시대- 위치 : 담양군 수북면 나산리 171-4

 

나산(羅山)마을에는 조선 숙종 때 함양박씨 문서(文瑞)에서 가산(羅山)마을에 축조하였다는 저수지(마을사람들은 朴池라고 부르고 있다) 한가운데 섬에 있으며, 그 섬 안에 있는 정자가 관어정이다. 저수지는 연꽃 자생지로 유명하며, 섬과 연결된 철교가 있다.
당초 정자는 1944년에 건립된 우진각 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이었으나 낡고 훼손이 심해 2002년 육각 정자로 신축하였으며 정내에는 공병주가 찬한 「觀魚亭記」현판이 걸려있다.

나산저수지와 저수지 가운데 섬에 있는 관어정

관어정 들어 가는 철다리 현수교... 다리를 건너면 바닥 철판이 꿀렁꿀렁한다.

관어정

연못에서 물고기 노는 모습을 오롯이 볼수있는 정자

정자 옆에 세워져 있는 돌에 풍취라대(風吹羅帶) 라 쓰여 있다. 아주 좋은 명당자리를 뜻한다.

나산마을 유래가 풍취라대에서 따 왔다는..

어떤 사람이 취(吹) 를 흡(吸)으로 잘못 읽어 풍흡라대라 하는데 아닌것 같다. 그 어떤 사람이 마을 유래를 풍흡라대에서 따왔다고 한것 이외에는 풍흡라대라는 말은 없다.

관어정 지킴이가 쓴 관어정 설명문

1953년 주민합심으로 건립

서편 다리는 목교 였으나 1970년 새마을 사업으로 철교로 교채 설치

동편 현수교는 1991년 주민성금으로 설치

연못은 함양박씨가 축조해서 박지(朴池)라고 도 한다.

연못에는 3개의 섬이 있었으나 현재는 하나뿐이고 2007년부터 연꽃을 심어 2년마다 연꽃축제도 한다는 내용

 

나산방죽의 4계 설명

관어정기...기해년이면 1959년 일까? 최초 건립이 1953년이니...담양군 안내문에는 1944년 건립했다고...

서편 철교

동편 현수교

 

관어정을 나와 담양 고서에 있는 명옥헌으로..

 

명옥헌- 지정별 : 명승 제58호- 시대 : 조선시대- 지정일 : 2009년 9월 18일- 소재지 : 전남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103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오희도(吳希道)의 넷째 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 바 장계정(藏溪亭)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꾼 정원으로 소쇄원(瀟灑園)과 같은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이다.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옛 연못이 모두 원형이 아니라 네모 형태를 한 것은 세상이 네모지다고 여긴 선조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계곡의 물을 받아 연못을 꾸미고 주변을 조성한 솜씨가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그대로 담아낸 조상들의 소담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소쇄원이 그러하듯이 이 명옥헌의 물소리도 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다고 여겨, 명옥헌이라고 하였다. 건물에는 명옥헌 계축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명옥헌의 오른편에는 후산리 은행나무 또는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이라 불리는 은행나무가 있다. 300년 이상된 노거수로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보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온 말을 매둔 곳이라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국농어촌공사 저수지..물이 조금 있다.

저수지 뚝에 노거수 있다.

주차장에서 보인 정자..저수지 뚝  끝 산자락에 있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

주차장에서 명옥헌 안내 표지가 없어 이 정자인가? 하고 왔는데 아니다.

저수지에 엄청 큰 자라가 2마리..처음 볼때 2마리 였는데 인기척에 물속으로 들어가 버려 나오면서 또 보니 1마라가 나와 있다.

명옥헌 가는 길 담장에 핀 인동초꽃

이제야 안내가 나온다.

기린초

연못과 명옥헌 정자가 보인다.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6~700m 쯤되겠다.

명옥헌 앞 연못

이곳은 오래 된 베롱나무(백일홍)가 엄청 많다. 16~700년대 정자 설립시 심어 졌으니 엄청 노목이다.

명옥헌

베롱나무

명옥헌 현판 .. 계축년이면 1676년? 1733년?

삼고..유비가 제갈량을 모셔 오기 위해 세번이나 찾아간 삼고초려에서 따온듯...

주련柱聯을 사진에 담아 뜻풀이를 해 본다.

 

題目, 作者 未詳 節義高秋霜雲底 절의고추상운저 절의는 높고 추상같아 서리와 구름을 능가하고 對花猶道是吾師 대화유도시오사 꽃을 대하는 것이 도와 같아서 나의 스승이다. 

김삿갓 자탄시

嗟乎天地間男兒 차호천지간남아  한탄스럽도다. 천지간 남아들이여

知我平生者有誰 지아평생자유수  내평생을 이해해 줄 사람 누가 있으랴 인데

첫 구절 남아(男兒)를 후손(後孫)으로 개사한것 같다.

엄청 큰 거목

⓭山野草木年年綠산야초목년년록 ⓮世民英雄歸不歸세민영웅귀불귀 산과들의 초목은 해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푸르되, 사람은 능력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산객이 되면 돌아오기 어렵다.

시래천지개회력     때가 되면 천지는 스스로 제 자리를 잡는데

운거영웅부자모    운이 가버린 영웅은 홀로 도모하기 어렵다.

舊交皆是歸山客 (구교개시귀산객)

옛 친구들 모두 다 북망산으로 돌아갔고

新少無端隔世人 (신소무단격세인)

나이 어린 후진들 다른 세상 사람일세

老吟노음 (늙음을 읊다) -김립金笠

傳承舊院花應落(전승구원화응락) 대대로 내려오는 옛터에 꽃피고 진들 누가 알리 世守先塋草必荒(세수선영초필황) 지켜온 선영 뒷산은 잡초로 황폐하구나

* 강항의 간양록에 나오는 구절로 전라 좌병영 이엽(李曄)이 가등 청정에게 잡혀가다 도망가면서 쫓아오자 물에 빠져 죽기 전에 읊은 시. 

정자 좌측에 있는 연못..위 계곡에서 물이 흘러 들어 온다.

참 오래된 베롱나무

청국의 원세개(袁世凱), 신재삼한명만국(身在三韓名萬國)이요, 생무백세사천추(生無百歲死千秋), 몸은 한국에 있었으나 만국에 이름 떨치었고, 살아 백 살 못 채웠지만 죽어 천년을 갈 것이라고 의사님의 순국을 애도하였습니다.

百川逝意慾歸海(백천서의욕귀해) - 모든 냇물이 흐르는 뜻은 바다로 돌아가고자 함이고, 萬樹生心畢境花(만수생심필경화) - 모든 나무가 살아가는 이유는 반드시 꽃 피우고자 함이다. 글자는 건물 뒤 개울에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세긴 글자를 그대로 모각해 만들었습니다. 

만고소마응시몽 /만고의 지난 일은 응당 사라지는 꿈 같은 것이니

인생노재부지중 /인생이란 모르는 사이에 절로 늙고 있었구나.

玉輦一游非好事(옥련일유비호사) : 임금님 한번 유람, 좋은 일 아니니

太平風月與民同(태평풍월여민동) : 태평세월 풍월이야 백성과 함께인 것을

몸통의 1/4 정도밖에 남지않았는데도 잘 살고 있는 베롱나무

명옥헌을 나와 왔던길로...

쥐똥나무꽃..일명 기생오래비첩꽃...향기가 엄청 찐하다. 그 어떤 꽃 보다...

명옥헌에서 300미터 나오는 갈림길에서 200미터 올라가면 은행나무가 있다.

어마무시하게 크다.

 

명옥헌과 후사리 은행나무를 보고 쳥창에 있는 남극루를 찾아가는데 바로 옆에 남극루를 두고 삥삥돌아 가게 한다. 네비가 미친듯...ㅋㅋㅋ

남극루

남극루(南極樓)- 지정별 : 담양군향토유형문화유산 제3호- 규모 :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 시대 : 조선시대- 지정일 : 2003년 6월 30일- 위치 :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396번지

2003년 6월 30일 담양군향토유형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된 남극루는 1830년대에 고광일을 비롯한 30여 명에 의해 건립된 누각으로,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하삼천마을 논 가운데에 있다. 원래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 면사무소 앞의 옛 창평동헌 자리에 있었으나 191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식 팔작지붕으로, 담양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지에 세운 정자이며, 여타의 정자들보다 규모도 크다. 외벌대의 기단에 높은 누하 기둥을 세웠고, 2층에는 이보다 가는 원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5량가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되었다.지금은‘남극루(南極樓)’ 현판은 물론 기문(記文) 또는 중수기(重修記) 등 아무런 현판도 걸려 있지 않으나 현판을 걸었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남극루 바로 옆 도로변에 창평현문ㅇ이 있다. 그렇타면 이 안이 창평현?

남극루를 나와 같은 창평의 상월정을 찾아 가는데 위치를 착각해 대덕면의 미암박물관에 도착해 보니 상월정 가는 길이 아니어서 다시 나오다 다른 길로 가다 되돌아 나와 간신히 상월정 가는 용운마을에 도착한다. 

남극루에서 차로 5분 걸이에 두고 얼마를 헤메였는지..ㅋㅋㅋ

용운마을회관(경노당) 앞에 주차하고 상원정을 찾아 간다. 상월정이 월봉산 중턱에 있어 월봉산 생행을 겸해서...

마을회관 왼쪽 이정표..용운저수지 방향으로...

용운저수지..아무런 이정표가 없다.

여기 저기로 알바를 한다. 길따라 가다 보면 묘지다.

트랭글 지도를 보며 무조건 월봉산 가는 길을 따라 간다. 길이 있다가 없어지다가..이길로는 별로 안다니는것 같다.

싸목싸목길..마을회관에서 1.4km 이정표에 있는 돌담길이다.

싸목싸목길 표지..방향표시도 한다.

대숲길도 지나고

집 한채가 있다. 사람이 사나?

싸목싸목길 산길을 따라 숨차게 올라 와 임도를 만난다.

알고보니 저수지에서 임도따라 쭉 오면 산책길 같은 길이라는데 고생 고생 올라 왔다.

드뎌 상월정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에서 상월정 사는 길

상월정

상월정(上月亭)- 지정별 :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7호- 규모 : 정면 4칸, 측면 2칸- 시대 : 조선시대- 지정일 : 1984년 2월 29일- 위치 : 담양군 창평면 용운길 142-1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된 상월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4칸 중 좌우는 방으로, 중앙 2칸은 마루를 깔아 강당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걸치고, 보아지를 직각방향으로 끼워 넣은 다음 주두를 얹었다. 주두 위에는 다시 우미량형의 툇보를 걸쳤으며, 장여받침 굴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형식이다.
조선 세조3년(1457) 언양인(彦陽人) 추재 김자수(楸齋 金自修)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대자암(大慈庵)터에 상월정(上月亭)을 창건하였다가 손자사위인 함풍이씨(咸豊李氏) 덕봉 이경(德峰 李儆)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이경은 사위 학봉 고인후(鶴峰 高因厚)에게 다시 양도하여 줌으로써 김(金), 이(李), 고(高) 3성(姓)과 기연을 지니게 된 것이다.
1808년 연재(淵齋), 초정(草亭) 2공(二公)이 이를 중창하였고 1851년 신해년(申亥年)의 수해로 또 다시 고재준(高在俊), 고광호(高光鎬) 등이 보수하였고, 1858년 월헌장(月軒丈)이 서까래와 보를 수리하는 등 여러차례 개ㆍ보수(改ㆍ補修)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한말 근대교육의 선구자인 춘강 고정주(1863~1933)는 상월정터에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하여 가인 김병로,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에게 근대학문을 가르쳤다.

상월정 약수..참 시원해 두모금 마셨다.

월봉산 600미터...

조금 올라 가니 이정표는 또 600미터란다...참~

까치독사..일명 칠점사...독사중 제일 독이 강하다는 독사다.

머리에 7점이 있다고 해서 칠점사라고 한다고..또는 물리면 7보도 못가서 죽는다는...

이넘이 도망도 안간다. 독이 자신 있다는 걸까? 예전 같으면 잡아 병에 담고 술 부었을텐데...

상월정에서 부터 엄청 가파르게 올라간다.

떼죽나무꽃이 하얗게 낙회되어 있다.

국수봉 갈림길 올라가는 계단..어휴~목마르고 덥고...힘들고...

갈림길..월봉산이 0.28km 상월정 0.55km 합이 0.83km .거리가 230미터나 늘어 난다.

월봉산..무지 덥고 목마르다.물은 다 마셔버리고 없다.

월봉산 정상석

조망은 좋은데 뿌였다.

정상에서 용운마으로 하산하는 계단

뒤쪽 만덕산

계단이 또 나온다. 엄청 가파르다.

성상에서 용운마을이 3.1km였는데 0.6km 조금 내려 오니 0.9km... 참 개판도 아니다.

헬기장

뭐야..이 이정표는 모르겠다. 워낙 개판이라..목은 말라 죽겠는뎅...

용운 마을회관 앞 도착..정상에서 50여분만에 내려 왔다. 

마을회관과 왼쪽 용운저수지 가는길

 

남극루에서 처음 찾아 갔던 미암박물관으로 다시 간다.

엄청 큰 물버들나무..뒤 보이는 정자가 연계정

보호수

연계정

연계정(連溪亭)- 위치 :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1570년(선조 3)에 건립된 연계정(漣溪亭)은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 1503~1577)의 강학장소로서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머물며 교육을 하였던 곳이다. 미암 유희춘은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생활일기인 『미암일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해남 출신이었다.그는 후에 담양으로 이거하게 되는데, 당대의 여류문인이었던 담양출신 송덕봉과 혼인한 때문이었다. 유희춘이 살았던 16세기의 혼인풍습은 고려의 남귀여가혼(男歸女家昏) 풍습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남성이 혼인한 후에 처변에 거주하는 일이 많았다. 그 또한 당시의 풍속에 따라 해남에서 처가가 있던 담양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던 것이다.그는 하루하루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무슨 편지를 받거나 어떤 소식을 들으면 놓치지 않았다. 집안 살림살이는 물론 자신에게 흠이 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병들어 누웠을 때에도 그치지 않았다. 『미암일기』는 자상하고 근실한 생활의 소산이었다. 유배가 끝나고 조정에 나온 선조 1(1567)년 10월부터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인 선조 10(1577)년 5월까지 10년 간의 일기가 현재 남아 있다. 아마 이전의 유배지의 일기는 없어졌을 것이다. 일기는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다양하여 조선중기 선비의 생활과 향촌사회의 모습을 소상히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정의 대소사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다.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승정원일기 등 선조대 초반의 기록이 다 불타버리자, 광해군대 선조실록을 편찬하면서 『미암일기』를 기초 사료로 활용할 정도였다. 『미암일기』는 현재 보물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담양 대덕면 장산리의 종택에 있는 모현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새로운 유물관이 건립 중에 있다.

연계정에서 내려 다 본 연지..건물은 모현관

미암박물관..담 기회에 너무 목마르고 피곤하고...

미암박물관앞 연계정을 끝으로 담양 정자 탑방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