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3(일).장마철 우중 산행-습도가 높아 엄청 더움
광주한빛산악회원 31과 함꼐...
산행코스: 주차장-전남대수련원-국립공원 지킴터-남창3교-입암산성 남문-북문 갈림길-갓바위-은선고개-6교-3교-주차장
약 3시간20분 소요,.
입암산..
높이 626m이다. 내장산국립공원에 속하며 호남평야와 나주평야를 가르는 노령산맥이 서남쪽으로 벋으면서 생긴 산이다. 이름은 정상의 갓바위가 마치 갓[笠]을 쓴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과 백암산 능선 서쪽에 있으며, 내장산(763m)이나 백양산(741m)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그래서 산행도 백양산 상왕봉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고, 창새재에서 서쪽 능선길로 내려가다가 장성 새재로 올라가는 연속 등반을 하는 등산객이 많다.
등산로 초입에 폭포와 기암괴석이 즐비한 남창계곡이 있고, 산의 8부 능선에는 입암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에 쌓은 높이 3m, 길이 약 5km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성벽을 협축식(夾築式)으로 쌓았다. 1256년(고려 고종 43) 이곳에서 송군비(宋君斐)가 원나라 군사를 물리쳤으며, 임진왜란 때는 관군과 승병·의병들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1593년(선조 26)에는 현감 이귀(李貴)가 이곳에 포루와 군량창고를 쌓았고, 1653년(효종 4)에는 이유형이 성벽의 폭과 둘레를 늘렸다고 한다. 성곽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훼손되어 장성군에서 복원중이다.
내장산국립공원에 있는 새재는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과 전라북도 정읍시 신정동의 경계로 입암산성을 왼쪽에 두고 있다. 내장산에는 '새재' 란 이름을 단 고개가 여럿 있는데 입암산성을 낀 이 고개는 '장성새재' 로 불린다. 옛길 산행은 남창계곡 매표소에서 약 3.9km 올라간 북하면 신성리 전남대학수련원 앞에서 시작한다. 수련원 앞에서 새재 너머 정읍시 신정동의 입암안내소(매표소)까지 약 4.5km로 걷는 데만 약 2시간30분 걸린다.
새재 옛길의 자랑거리는 옛길 산행 도중 고갯마루에서 가까운 입암산성 답사를 겸할 수 있다는 점. 또 입암산 지구는 내장산 단풍이 한창인 11월 중순에도 내장사나 백양사 쪽과는 달리 등산객이 적어 조용한 단풍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새재 고갯길은 평지나 다름 없을 정도로 완만하여 길도 잘 나 있어 아이나 노인을 대동해도 무리없는 산행을 할 수 있다.
남창계곡의 끝에 자리한 전남대수련원 앞에서 간이화장실을 지나면 첫 이정표가 나온다. 은선골 코스와 갈라지는 삼거리다. 왼쪽은 은선골로 오르는 입암산 산행 코스이고 오른쪽이 새재 옛길이다. 이정표에서 40여 분 가면 시야가 트이며 감나무가 듬성듬성 선 넓은 묵밭이 나오는데 이곳이 새재 언저리다. 묵밭 사이로 돌담과 디딜방아 터, 깨어진 사기그릇 조각 등 화전민들이 살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넓은 묵밭을 지나 왼쪽으로 무덤 2기를 지나면 두번째 이정표가 나오며 입암산성까지 1.7km라 적혀 있다. 두번째 이정표를 지나서는 내리막길인데 약 300m 거리에 다시 세번째 이정표가 나온다. 내장사와 9.4km란 이정표가 있는 이곳이 진짜 장성 새재의 고갯마루다. 이후 입암안내소까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남창1교에서 ...
남창1교 위,아래 계곡
입암산성 가는길엔 숲체험길과 등산로가 구분되어 원하는 길로 갈 수 있다.
입암산에는 삼나무 숲이 많이 조성되어 피톤치드가 푹푹 풍겨나와 공기가 상쾌한것 같다.
삼나무숲을 하늘로 처다보며...
남창3교위에서..
남창3교를 막 건너면 바로 갓바위와 산성으로 갈리지는 길이 나온다...우리는 산성길로...
산성길은 제법 오르막길이다. 우기에 습도가 높아 무덥기 그지 없다..잠시 휘식을 취하며...
입암산성 남문 도착
1993년 11월 10일 사적 제384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30만 8,429㎡. 노령산맥과 전라북도 정읍시와의 경계에 있는 해발 626m의 입암(갓바위)산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총연장 약 5km 중 약 3.2km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문헌상으로는 1236년 몽골의 제3차 침입 때 장군 송군비(宋君斐)가 수축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옹성식(甕城式) 남문의 문도(門道)와 주변의 배수구시설, 성벽 하단에 종출초석(縱出礎石)을 둔 성벽축조 방식이 특이하고, 특히 성내에 크고 작은 방축(防築)을 두어 수원(水源)을 확보하여 장기간의 농성이 가능하도록 배려한 점 등이 조선 후기 관방(關方)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남문은 문도 중앙에 암거를 가진 수구(水口)를 겸한 형식으로 되어 있고, 문구부(門口部) 내외에 문돈(門墩)을 겸한 옹성식 문도를 형성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계곡을 이룬 남쪽 성벽 하단에 40~50cm 돌출된 종출초석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아 축조한 특수한 구조이다. 또 남문에서 50m 떨어진 곳에 집수용(集水用) 연못이 있고 출수(出水)를 위한 배수구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배수구 외향의 경사면은 자연암반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그 위에 대형 방위를 놓아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엄폐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입암산성 남문을 지나 북문으로 가는 길은 마치 분지를 이룬듯 평지길로 계속 이어진다.
옛날에 사람이 살았다는 성내마을 터...
돌절구가 길 양쪽에 하나씩 있다.
윤진 순의비 갈림길...오늘은 시간산..우천상 다음 기회에 가 보기로 하고 그냥 지나친다.
유명조선국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윤공 순의비명 병서
가선대부 전라도관찰사 권적 글을 지음.
통정대부 장성도호부사 이현윤 글씨를 씀.
옛날 조송(趙宋) 말엽에 원나라 군대가 지주(池州)를 침범했을 적에 통판 조묘발이 성벽을 수리하고 양식을 모아 굳건히 수비할 계책을 행하다가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 지경에 미쳐서 마침내 술자리를 두고 벗들을 모아 더불어 이별하고서 아내 옹씨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을의 수령(守臣)이라서 떠날 수가 없소. 그대는 먼저 탈출하시오”라고 하니 옹씨가 말하기를 “당신이 충신이 되는데 저인들 충신의 지어미가 되지 못하겠습니까? 원컨대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묘발이 웃으며 이를 허락하고서 마침내 함께 종용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재주 없는 내가 글을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러 일찍이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며 그 일을 슬피 여기고 그 절개를 기특하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제 저 栗亭 尹公(윤진)의 사적을 보니 그 부부가 함께 죽어 절개와 의리를 함께 이루었으니 참으로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통하는 동일한 도리이며 백대(百世)의 세월의 격차에도 서로 감동시킨다’는 것이라고 말할만하다. 어찌 훌륭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진(軫)이요 자는 계방이니 본관은 파평이다. 고려 때의 선조 휘 영찬은 도적을 토벌한 공으로 남원군에 봉해졌으며 사대조 휘 혜는 예부 원외랑이 되어 성삼문, 박팽년과 벗으로 친하게 지내다가 세조(光廟) 때에 관직이 삭탈되어 장성으로 귀향하여 살았다. 부친이신 휘 강원은 판교가 되어 바른 도로써 권세가(權凶)를 거스르다가 양구(楊口)로 장배(杖配)되었는데, 이에 현감 이시영의 딸을 아내로 맞아 유배지에서 공을 낳았으니 가정 27년 무신년이었다. 윤공이 일곱 여덟 살 무렵(齔髫)에 하서 김선생(김인후)께서 한번 만나보고 크게 특이하게 여겨서 원대한 성과를 이룩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조금 장성하여서는 과거공부(科業)를 일삼지 않고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었다. 부친상(判校艱)을 당함에 미쳐서(1572년 11월) 삼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의지하고 사모함이 정도를 지나쳐서 아침저녁으로 묘에서 통곡하니 슬픔이 주변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효행으로 제거(制擧)되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봉사로 예승(규례에 따라 벼슬을 높이는 것)되었다.
경인년에 모친상(內艱)을 당하여 임진년 정월에 탈상하였다. 4월에 왜구가 경성을 침범하자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장성의 별장(別業; 곧 別莊)으로 돌아왔다. 공은 본디 타고난 성품이 강개(慷慨; 불의를 용납하지 않음)하고 옛사람의 절의를 사모하여 달 밝은 밤에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와 호담암(胡澹庵)의 봉사(封事; 밀봉하여 올린 상소문)를 송독할 때마다 일찍이 무릎을 치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계사년(1593년)에 이르러 전라관찰사(湖南伯) 이정암이 입암산성의 형세가 험준하고 우뚝 솟아서 왜적의 행로를 차단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공에게 축성을 감독하게 하였다. 공이 이 성은 곧 국가의 보장중지(保障重地)라고 여겨서 마침내 부름에 응하여 사양하지 않았다. 몸소 판자와 삽을 잡고 밤낮으로 계책을 세워(성을 쌓는 일을 시행하여) 포루를 설치하고 창고를 세우고 군량을 저장하여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하였다. 정유년 가을에 적군이 한산도를 함락시키자 공이 처자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왔다. 남원이 함락(失守)되고 경기와·충청(湖甸)까지 흉악한 왜적의 선봉이 다다른 때에 미쳐서 공의 친척들이 모두 성을 나가 피할 것을 권하며 말하기를 “공은 성을 쌓을 것만을 명받았지, 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이 성이 바로 내가 죽을 곳이요, 오늘이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였다.
이웃 고을의 수령 몇 사람으로 함께 지키기로 약조한 자들이 모두 오지 않자 공이 홀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힘을 다해 경계하고 지켰으나 성이 함락되었다. 창칼로 겨루면서도 안색이 변치 않았으며 적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그치지 않았고 꼿꼿이 앉아 죽음을 당했다.
아내 권씨는 본래 참의 권벽의 딸인데 도적이 다다른 것을 보고 차고 있던 칼로 자결하였다. 왜적들이 부인을 의롭게 여기고 안타깝게 여겨 의복을 벗기지 않고 떠났으니 과연 이른바 부부가 함께 죽어 절개와 의리를 함께 이루었다는 말이 어찌 사실임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난이 평정되자 공은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부인 권씨는 정려를 받았으니, 죽은 공신을 애도하여 추봉하는 법(隱卒之典)이 또한 지극하구나. 아! 공의 대대로 전해지는 덕은 남원(윤영찬)과 예부(윤혜) 두 공(公)에게서 볼 수 있다. 공이 일찍부터 판교공(윤강원)의 가르침(義方之訓; 집안에서 부친에게 받는 가르침)을 받아 귀로 익숙히 듣고 눈으로 익숙히 보아(耳濡目染) 충효와 절행이 아님이 없었는데 마침내 성취한 것이 저와 같이 탁월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호중의 부로들이 그 일을 말하면서 때때로 눈물을 흘리니 의열의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음이 있구나.
장성사또 이현윤이 부임해온지 이년동안 온갖 폐해졌던 제도(좋은 제도)를 모두 다시 행하고 굳게 지키고 절의를 숭상하는 방법에 더욱 힘을 다하였다.
가장 먼저 입암성을 중수하였는데 공의 의열에 유달리 감동하여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워서 윤공의 의열을 표창(表章)하여 후세 사람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글을 보내 비문을 써주기를 청해오니 재주 없는 내가 마침 이 전라도의 관찰사이고 권부인이 나의 종고조모가 된다. 돌아보건대 먼저 옛 의리를 생각해보니 감히 공의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린 자초지종을 약술하여 그 충심에 돌이키지 않을 수 없으니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이 혹여 나의 의를 사모하고 옛 일을 생각하는 마음을 믿어 나의 참람되고 망령됨을 용서하겠는가!(불초한 자신이 과분하게 윤공의 비문을 쓴 것에 대해)
이어서 찬하노라 “저 남방의 강기(南紀)를 바라보니 우뚝 높은 바위로다. 지아비 절개를 지켜 죽으니 한 몸이 인을 이뤘도다. 만고의 나란한 의열, 부서지지 않는 바위와 같아서 이름과 함께 없어지지 않으리.”
마치 시골길 개울같은 개울이 거의 평지를 흐른다.
어름..입암산에는 어름 덩굴이 참 많다.
입암산성 북문 도착...산행 약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북문에서 갓바위로 가는 산길에 음료수를 파는 여인들이 불을 피워 옷을 말리고 있단다.
갓바위가 보인다. 세찬 바람과 함꼐 구름이 갓바위를 휘감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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