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까지 걸린 시간을 알기위해 그냥 한컷..
여원정... 귀가길에 이곳 정자에서 점심을 먹었다. 좀 늦은 시간이지만...
여원재에 얽힌 전설‥‥‥
남원에서 함양으로 통하는 24번 국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10킬로 쯤 되는 곳에 해발 485미터의 여원치(여원계곡)가 있다. 현재 운성대장군이 서 있는 이곳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자락이 이어져내려온 1304 미터의 고리봉과 세걸산. 바래봉. 황산이 있고, 남쪽으로 바로 지척에 장기바우를 머리에 이고 있는 주지산(일명 신선봉)이 우뚝 서 있다. 북쪽으로는 삼한시대 때 축성한 장교산성(방학산)과 고남산성(고남산)이 있으며, 서쪽으로 남원평야를 바라보면 멀리 시루봉과 그 남쪽으로 양가리 목가마을(나뭇거리)이 보인다.
과거 운봉 사람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수 없이 남원과 운봉 사이를 넘나들며 오가던 이곳 여원재 골은 여원치에서 양가제(陽街堤)를 돌아 양가리 나뭇거리로 통하는 골짜기를 말한다. 나뭇거리를 출발하여 여원재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양 편으로 산을 깍아 세운 듯한 기암괴석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고 계곡 전체가 울창한 자연림이 우거져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여원치는 저 아래 남원 시내보다 2-3도의 온도차를 보이는 운봉 고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따라서 여름의 서늘한 기온 때문에 고랭지 채소와 감자 경작에 매우 알맞은 풍토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과거 이 고개는 호남과 영남의 경계를 잇는 군사적 요충지로써 경제·사회·문화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다하였다.
여원치에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일반 여행객을 위하여 여원치에 '여원'이란 원(여관)을 설치하였다. 여관 건물을 원우(院宇)라 하였는데 이곳 여원 터에는 지금도 암벽에 마애여래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원우는 사원(寺院)을 개조 혹은 전환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헌과 전설에 따른 여원재 골의 역사의 흔적은 많다. 먼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곳은 백제 지역인 남원과 신라 지역인 운봉에 산성을 쌓아 양국이 대치해 오던 국경지대이다. 백제는 초고왕 23년(188)과 무왕 3년(602), 무왕 17년(616)에 각각 신라 모산성(운봉성)을 공격하였으며 백제 동성왕 6년(신라 소지왕 6년, 484)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를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이곳 모산성 아래에서 격퇴시키기도 하였다.
지리산 줄기가 멈춰선 주지산 서쪽에 위치한 주지암(住智庵)은 신라때 건립되었으며 정상에 신선이 와서 장기를 두었다는 장기바우가 있다. 이곳은 또한 영봉의 영험이 슬기로운 명산으로 산신제와 기우제를 지내는 기도단으로 유래가 깊은 곳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왕 6년(1380) 황산대첩시 안개가 자욱한 이 곳 여원치에서 이성계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 받았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 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왼쪽 젖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한다. 후에 이성계는 이 백발 노파가 필시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노파를 만났던 고개의 석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산신각을 지어 보존케 하였다. 따라서 지리산 산신령은 보통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지리산 산신령이 사는 이곳을 여원치(여원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광무 5년(1901) 운봉현감 박귀진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산신각을 복원하고 이 여상(마애여래상이라고도 함)을 새긴 내력을 석벽 옆에 암각문으로 새겼다. 여원터 북쪽에 당시 군사들이 막사를지어 주둔했던 병막동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난중잡록'에 의하면 임진왜란(1592-1598) 때 왜군과 관군 그리고 명군이 30여 차레에 걸쳐 이곳 여원을 오가며 군사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과거 군병 이동지역은 민폐가 심하였고 특히 왜군이 휩쓸고 지나간 운봉현은 임진왜란 이후 한 때 폐현이 되기도하였다.
계사년(1593) 8월 22일 명나라 원군 도독 유정이 지금의 경북 성주 본진으로 돌아가던 중 이곳 여원재에서 자신이 모월 모일 이곳을 지난다는 내용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바위에 새겼다.
<만력 22년 갑오 세계 춘월 정왜도독 예장 성오 유정 복과(萬曆二十二年甲午歲季春月 征倭都督豫章省吾劉綎復過)>.
이 암각은 지금 여원정 아래 계곡에서 운봉 쪽으로 50여 미터 되는 계곡을 향해 옆으로 돌출된 큰 바위에 다른 비문들과 함께 새겨져 있는데, 오랜 풍우에 씻겨 서체를 겨우 알아볼 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그런데 윗쪽으로 100여미터 되는 큰 바위에 좌영장 이민수가 자기 이름과 함께 똑같은 내용의 비문을 개각(改刻)하여 두었다.
속칭 연재라고도 불리우는 이 고개는 또한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金開南)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1894년 9월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이 진주.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고개) 전투에서 대파하였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하여 기세를 몰아 남원성 남문을 불지르고 남원 동학군을 패주시켰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박봉양이란 인물이 추앙될 수 있는 인물인가 하는 판단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동학 농민군은 당시 봉건 조선이 가지고 있던 모순을 자주적으로 해결해 보기 위한 민중의 궐기였고, 이런 민중의 힘을 분쇄한 것은 피폐한 조선 왕조와 외세인 일본의 군사력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이런 우리의 자주적인 민중의 힘이 꺾여버린 데에 그 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런 역사적인 차원에서 거시적으로 접근할 때, 역사의 한 시점에서 활약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내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한편 연재의 그 험준했던 아흔 아홉 굽이의 고개도 여러 차례의 도로공사를 통해 말끔히 포장된 지 오래다. 너 나 할것 없이 걸어다녀야 했던 옛날 길손들이 잠시 땀을 식히고 쉬어가던 이곳 여원치. 운봉과 남원, 과거 서로 다른 지역의 경제와 문화와 국경의 통로 역할을 하던 유서깊은 계곡, 여원재 골. 여원치와 큰 주조장(도개집)이 있던 목가마을은 한나절 거리의 남원을 오가며 나무와 베쌈을 팔고 생필품을 교환하던 운봉 사람들에게 그나마 짧은 휴식을 제공하던 유서 깊은 통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힘들게 지고가던 나뭇짐을 내려 쉬곤 하던 이곳 목가 마을을 나뭇거리라 칭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여원치 고갯 마루에는 주막집이 성황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어느 곳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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